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67화 (167/1,307)

# 167

“그러게. 원석의 크기가 엄청났을 것이네.”

“그런데 어떻게 이렇듯 똑같이 만들 수 있지?”

“그러게 말일세.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참이네! 이건 솜씨 좋다는 드워프도 불가능하고, 드래곤도 못 만들 물건이네.”

“물론이네. 한눈에 보기에도 명품 중의 명품일세.”

“아무렴……. 꼭 구입해서 후작님께 가보로 길이 보존하시라 해야겠네.”

“나도 그렇네. 근데 가격이 만만치 않을 듯싶으이.”

“그렇겠지. 근데 그게 무어 대수란 말인가? 어차피 우리 지갑에서 돈 나가는 게 아닌데. 아니 그런가?”

“하긴 그렇군. 자아, 우리 꼭 구입하세.”

대한민국의 소주병이 귀족가의 장식장을 차지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는 순간이다. 그 병의 겉에는 각각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종이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처음처럼, 참이슬, 즐겨찾기.

어느 후작가의 시종장은 그날 공병 하나의 가치를 20골드나 썼고 낙찰 받았다. 한국 돈으론 2,000만 원이다.

한국에선 공병을 가게에 가져가면 귀찮다고 내쫓는다. 마음씨 좋은 가게 주인을 만나야 최고 40원까지 받을 수 있다.

40원 대 2,000만원이면 1대 500,000이다!

그런데 현수가 꺼내놓은 소주병만 300병이다. 로니안 자작이 이것을 모두 팔면 6,000골드를 받을 수 있다.

한국 돈으로 60억 원의 가치이다.

위스키와 보드카 병은 소주병에 비해 그 크기가 크다.

게다가 이것들은 모양이 조금씩 다르고 멋있다. 하여 빈 병 하나의 가격이 평균 30골드나 된다.

공병 하나에 3,000만 원인 셈이다. 이런 것이 200병이나 있다. 하여 이것들의 값 역시 60억 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현수는 결코 째째한 선물을 한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장본인인 로잘린을 위한 선물도 있다.

팬티 브래지어 세트, 실크 잠옷, 극세사 패드, 쟈가드 원단으로 가공한 오리털 이불, 라텍스 베개 등이다.

카이로시아에게 주었던 것과 조금도 다름없다.

나비 모양 머리집게와 머리핀, 헤어밴드 등도 나왔다.

물론 버터링 쿠키와 크래커도 적당량 꺼내 놓았다.

마지막으로 동서식품에서 만든 커피와 프림, 그리고 설탕을 꺼내 놓았다. 아마도 커피 향을 맡을 때마다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가 떠올라 진저리를 칠 것이다.

세실리아 부인은 이런 예물들은 왕가는 물론이고, 제국의 황실에서도 줄 수 없는 것이라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로니안 자작은 사위를 맞이하는 것을 기념하는 물건으로 기사가 방패와 함께 사용하는 한손 장검 아밍 소드(Arming Sword) 한 자루를 선사했다.

미스릴이 포함되어 있어 여타 장검보다 더한 강도를 지닌 것이라 자랑했다. 로니안 자작가에 대대로 물려오던 것이라 한다.

현수가 보기엔 아공간에 있는 어느 검보다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내색치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현수가 돌아간 뒤 로니안 자작과 세실리아 부인은 축배를 들었다. 로잘린에게 청혼했던 인물 가운데 가장 고위 인물을 꼽으라면 당연히 미판테 왕국 제2왕자이다.

현재 왕세자로 책봉된 제1왕자의 능력이 너무도 뛰어나기에 왕위에 오를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인물이다.

로잘린이 제2왕자와 결혼을 하면 늙어죽을 때까지 유폐 아닌 유폐를 당하게 된다. 혹시 있을지 모를 왕위 찬탈을 대비한 조치가 취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로잘린은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현수는 그런 것과는 관련이 없다.

보아하니 좋은 청년인 듯싶어 첫날부터 호감이 있었다. 하지만 붙잡을 빌미가 없어 그냥 놔줘야 했던 대어였다.

그런데 딸이 나가서 잘도 물어왔다.

어젯밤 마차를 타고 온 로잘린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부모로서 당연히 연유를 물었다. 전후 사정을 들은 부부는 곧장 작전을 짰다. 그리고 현수를 생포하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하여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축배를 들었다.

이 일로 인해 열 달이 지난 후, 로잘린은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남동생을 보게 된다. 현수에겐 핏덩어리 처남이 된다.

* * *

“백작님, 조금 전에 용병지부에서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내일 아침에 오라고 하면 아신다고 하더군요.”

부엌일을 하다 나온 로사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보고했다.

“알겠네.”

“그런데 왜 백작님을 백작님이라 하지 않고 그냥 하인스라고 부르죠? 버릇이 없어서 한마디 하려다 참았답니다.”

“아! 그런가? 그런 말 안 하길 잘했네. 흐으음, 가거든 버릇 좀 고쳐 놔야겠군.”

“네, 꼭 그러세요. 아직 나이도 얼마 안 되는 계집이었어요. 누군지 아시죠? 보시거든 경을 쳐 주세요.”

존경하는 하인스 멀린 백작을 감히 하인스라고 칭했던 계집의 모습을 떠올린 로사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네.”

보아하니 줄리앙이 왔다 간 모양이다.

‘젠장……! 하루만 일찍 오지.’

어제 밤의 곤혹스런 순간을 떠올린 현수는 속으로 투덜대며 계단을 디뎠다. 예정된 날짜에 출발을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 싸가지랑 같이 가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는데?”

줄리앙이라는 안젤리나 졸리를 닮은 여자 용병을 떠올린 현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이도 어린 것이 반말을 찍찍 하는 것은 물론, 사사건건 애송이 취급을 할 텐데 어찌 마음에 들겠는가?

“흐음, 아예 B급 용병으로 승급 심사를……. 아니다. B급 이상이 되면 출국하기 힘들다고 했지? 제기랄……!”

투덜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현수는 메모지를 꺼내 카이로시아와 로잘린, 그리고 얀센에게 남기는 말을 썼다.

친애하는 로시아에게.

이곳 테세린에 와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을 나는 행운이라 생각하오. 짧지만 당신과 함께했던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오.

로시아! 나는 잠시 테세린을 떠나 여행을 다녀오겠소.

대륙의 곳곳을 돌며 안목을 넓히고, 세상을 조금 더 경험하려는 의도라오.

당신이라면 나의 이런 생각을 충분히 이해해 주리라 믿소.

혹시 내게 전할 말이 있거든 이레나 상단 지부에 연통을 넣어주시오. 가는 곳에 지부가 있으면 꼭 들러보겠소.

당분간 내 품이 그리워도 참아주시오.

나도 보드라운 당신의 교구를 안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오. 대신 당신과 다시 만나는 그날,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몸을 으스러지듯 안아줄 것이오.

다섯 자리 가운데 첫째는 로시아 당신의 자리라오.

당신의 하인스가…….

친애하는 로잘린에게.

장난으로라도 로자린의 마음을 힘들게 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정중히 사과하는 바이오.

내가 취할 수 있는 다섯 자리 가운데 하나를 로잘린에게 준 것은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라오.

누구보다도 현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할 것이기에 내가 먼저 부모님께 청을 넣은 것이오. 그러니 책임감 때문에 결혼을 약속했다는 생각은 버려도 좋을 것이오.

아무튼 지금은 내가 경험을 쌓아야 할 시기라오.

코리아 제국의 속담에 ‘젊어 고생은 돈 주고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있소.

그래서 대륙을 좀 더 돌아보고픈 열망에 테세린을 잠시 떠나려 하오. 이로 인해 얻은 경험은 훗날 나의 영지를 가꾸는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오.

아무튼 아무런 언질 없이 그대의 곁을 훌쩍 떠나는 나를 부디 용서하시오.

내게 전할 말이 있거든 이레나 상단의 카이로시아를 찾아가시오. 그곳 상단 지부의 연락망을 이용하면 내게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의 하인스가…….

얀센에게.

잠시 테세린을 떠나 대륙을 유람하고자 하네.

하인스 상단 본점 서기로서 맡은 바 소임을 잘 하리라 믿네. 상품이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지 못할 경우 새로운 물목을 취급해도 좋으네.

다만 이레나 상단의 지부장인 카이로시아 양과 긴밀한 협의를 해서 품목을 결정하게.

참고로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은 나의 정혼녀가 되었네. 그녀들을 대함에 있어 조금의 소홀함도 없기를 바라네.

혹시라도 내게 전갈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거든 카이로시아에게 협조를 부탁하게.

가급적이면 일찍 되돌아오겠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네.

테세린에서 자네를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네.

로사와 세실리아에게도 안부 인사 전해주게.

그리고 동봉한 반지는 새로 태어날 아가를 위한 작은 선물이네. 마법이 인챈트 되어 있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해줄 것이네. 소중히 간직하게.

하인스 백작.

현수가 쓴 편지는 팬시점에서 파는 화사한 그림 배경이 있고 편히 쓸 수 있도록 밑줄 그어져 있는 편지지이다.

카이로시아에게 쓴 편지는 바탕이 분홍색이고, 로잘린에게 쓴 것은 연한 초록색이다.

얀센에겐 하늘색 바탕의 편지지를 사용했다.

편지 작성을 마친 현수는 향수를 꺼내 각각의 편지지 뒤에 슬쩍 뿌렸다. 그리곤 전용 봉투에 넣고 딱풀로 밀봉했다.

세 통의 편지를 어디에 둘까 두리번거리다 창가의 탁자로 결정하고 막 일어서려던 찰나이다.

똑똑똑!

“백작님, 로시아예요. 들어가도 돼요?”

“들어오시오.”

삐이꺽―!

“영주성엔 잘 다녀오셨어요?”

“그렇소.”

편지를 쓰면서 마음을 정해서 그런지 왠지 카이로시아가 더 정감이 간다. 열렬히 사랑하는 애인처럼 느껴진 것이다.

“어떻게… 되었어요?”

“어떻게 되긴……? 아침에 말한 대로 했지. 가서 결혼을 약속하면서 반지도 주고 예물들도 줬어. 섭섭하지?”

“어머, 아니에요. 섭섭하긴요. 로잘린은 좋은 동생이 될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고마워. 내가 생각해 봐도 로시아는 좋은 언니가 될 거야.”

“치이, 겨우 언니요?”

“로시아!”

“왜요?”

“잠깐 이리와 봐.”

“……?”

현수는 대답 대신 다가온 로시아를 부드럽게 안았다.

“첫째 자리는 로시아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

잠깐 흠칫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더니 아주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흐느끼나 보다.

“내가 로시아의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네에. 전 백작님은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벌써 그런 걸요? 흐흑……! 백작님! 정말 정말 사랑해요.”

두 팔로 현수의 목을 감싼 채 로시아는 흐느꼈다.

백작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일찍 작고하는 바람에 사랑다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

철들 무렵부터는 가문의 상단 일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혼기를 놓쳤지만 아버지도, 오빠들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 그래도 청혼하는 사내들은 많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는 것은 카이로시아 본인이 아니라 이레나 상단의 돈이다. 그런 자들과 함께 하느니 그냥 늙어가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는 것은 로시아의 마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육체였다.

그들과 결혼하게 되면 상단의 모든 일로부터 떠나야 한다.

그리곤 집에 틀어박혀 그의 잠자리 시중을 들거나 육아에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다 시들어 볼품이 없어지면 관심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쓸쓸해질 것이다.

하여 결혼이라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타난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

그는 너무도 신기한 문물을 소유한 사람이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귀한 물건들을 줄줄이 꺼내 놓으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처음 본 날부터 이상스레 마음이 가서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러다 사소한 오해가 있어 잠시 품에 안기게 되었다.

보통 사내였다면 벌써 순결을 잃었을 것이다. 하나 하인스 백작은 그러지 않았다.

어떤 날은 아예 밤새 품에 안겨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럼에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신사이다.

그러다 자신이 제안한 장난 때문에 몹시 곤혹스런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평 한마디 안 하고, 타박 한 번 안 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정처(正妻)가 되어달라고 한다. 그리고 좋은 남편이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여자로서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카이로시아는 현수의 품에 안겨 한없이 흐느끼면서도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로시아!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네. 말씀하세요.”

“내일 아침 난 이곳 테세린을 떠날 생각이오.”

“네에……? 왜, 왜요?”

카이로시아의 눈은 금방 커졌다.

“아르센 대륙을 좀 더 돌아보며 경험도 쌓고, 안목도 높일 계획이오. 그러기 위해 C급 용병 등록을 했소. 로니안 자작으로부터 얻은 평민 신분증을 이용해서. 그리고…….”

현수는 나후엘 자작가의 호위 임무를 맡아 미판테 왕국을 돌아보겠다는 구상을 나름대로 조리있게 설명했다.

하나 아드리안 공국으로 가는 것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이 이어지는 동안 카이로시아는 고개만 끄덕였다.

“전, 백작님이 무엇을 하시려 하든 무조건 찬성이에요. 그래요. 다녀오세요. 오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로시아……!”

너무도 순종적인 카이로시아를 현수는 와락 껴안았다.

“여기 걱정은 마세요. 로잘린 동생하고 잘 협의할 것이니 별탈 없을 거예요.”

“고마워.”

“제가 오히려 고마워요.”

“참, 전에 줬던 반지 있지? 그거 줘봐.”

“네에. 여기…….”

한번 주었던 것을 왜 돌려달라고 하느냐 묻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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