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마음 같아선 매일 밤마다 와서 로시아를 안아주고 싶어. 하나 모험의 길을 나서면서 그럴 순 없잖아. 그래서 생각보다 더 오랫동안 안 올지도 몰라. 그래도 날 잊지 마.”
“물론이에요. 저는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까지 로시아는 자기야를 잊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요!”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키스를 해야 한다. 하나 현수는 스스로를 자제했다.
로시아의 마음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현실과 이곳 아르센 대륙을 어찌 경영할지 완전한 결정을 하지 못한 때문이다.
아무튼 로시아와 한참 동안 이야길 주고받았다. 테세린을 떠나면서 걱정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향후 연락을 취할 방법에 대한 것도 이야기했다.
멀린이 제작한 수정구가 있기는 하다. 300㎞까지 송수신을 할 수 있는 마법 기물이다. 그런데 현수는 이보다 더 멀리 갈 생각이었기에 꺼내 놓지 않았다.
대신 아르센 상단의 지부를 이용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카이로시아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현수와 같은 침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콜콜 잠만 잤다.
짹, 짹, 짹!
이른 새벽 새들이 모이를 찾는 시각 현수의 눈이 떠졌다.
잠시 후, 곤히 잠들어 있는 카이로시아를 살며시 떼어냈다. 그리곤 용병지부로 향했다. 물론 전형적인 C급 용병 차림이다.
“흠! 일찍 나와 있었군.”
“당연하지.”
줄리앙은 여전히 매몰찬 태도로 현수를 무시했다.
“내가 담당할 위치는 어디쯤이냐?”
“너, 내가 상급 용병에겐 반드시 존댓말을 쓰라고 했는데 왜 반말이지?”
눈썹을 추켜올리며 성난 표정을 짓는 줄리앙을 본 현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아직 나보다 상급인지 아닌지 실력을 모르니까. 나보다 세다는 게 인정되면 그때부터는 존댓말을 써주지.”
“으드득! 애송이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줄리앙은 나직이 이를 갈았다. 그리곤 한 발짝 내디디며 검의 손잡이를 쥐어갔다. 여차하면 뽑을 생각인 듯하다.
이때였다.
“자자, 나후엘 자작가의 호위 임무를 맡은 용병들은 모두 모여라. 지금부터 임무 배치를 하겠다.”
40대 중반쯤 되는 강인한 표정을 지닌 장한의 말에 여기저기 흩어진 채 현수와 줄리앙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용병들이 어슬렁거리며 모여든다.
나후엘 자작가까지 마차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용병들의 수효는 정확히 50명이다. 이들의 리더는 방금 전 사람들을 불러 모은 A급 용병 랄프이다.
이외에 B급 네 명이 있다. 줄리앙도 그중 하나이다. 나머지 45명은 모두 C급이다.
랄프의 지시에 따라 용병들은 다섯 개 팀으로 나뉘었다.
A급 랄프와 B급 네 명이 각 팀의 팀장이다.
각각의 팀장은 45명의 C급 용병 가운데 아홉 명씩 맡았다. 이렇게 해서 열 명이 한 팀이 되는 것이다.
제비뽑기로 팀이 배정되었는데 현수는 행렬의 선두를 맡은 척후팀에 배속되었다.
현수의 조장은 B급 용병 로렌스이다. 따로 자신의 조를 불러 모은 로렌스가 조원들을 둘러보곤 입을 연다.
“율리안 영지까지는 먼 길이다. 중간에 캐러나데 사막도 지나쳐야 하고, 마물의 숲도 넘어가야 한다.”
“저기요, 팀장님! 캐러나데 사막과 마물의 숲을 우회하면 안 됩니까? 거기 엄청 위험한 데라고 하던데요.”
누군가의 발언에 로렌스 팀장은 알고 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곳은 나도 피하고 싶은 곳이다. 하나 우리는 그곳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팀장?”
“먼저 사막을 지나야 하는 이유를 말하겠다. 우리는 가는 도중 디오나니아(Dionanea)의 열매를 구해야 한다.”
“팀장님! 디오나니아라면 식인 선인장이 아닙니까?”
“그래, 사람도 잡아먹는 선인장이다. 넓적한 두 개의 잎사귀 주변에 가시가 잔뜩 박혀 있는 것이지.”
로렌스 팀장은 식인 선인장의 모습을 말로 설명하는 것조차 싫다는 듯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 묻는다.
“그 열매를 구해서 뭐에 쓴답니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무슨 약에 쓴다고 한다.”
“제기랄, 나후엘 자작가의 어떤 미친 마법사가 그걸 주문한 모양이군.”
누군가가 충분히 짐작된다는 듯 투덜거렸다.
나머지 용병 모두 이해한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현수만 멀뚱멀뚱하다. 디오나니아가 어떤 건지 감도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럼 언제 마물들이 튀어나올지 모를 마물의 숲까지 지나야 하는 이유는 뭐랍니까?”
“그건 쏘러리스의 간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쏘러리스라면 미노타우루스처럼 생긴 몬스터가 아닙니까? 근데 그게 아직도 세상에 있습니까?”
“그래. 몬스터인 미노타우르스의 조상이지. 소문에 의하면 마물의 숲에는 아직도 있다고 한다.”
“그거 그냥 소처럼 생긴 거죠?”
“생긴 건 그렇지만 덩치는 아니다.”
“커요?”
“아니, 작다.”
“얼마나 작은가요? 설마 손바닥만 한 건 아니겠지요?”
“크기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인간의 여인을 취해 몬스터인 미노타우르스를 태어나게 했지.”
“위험합니까?”
“달리는 속도만으로도 샤벨타이거를 뚫어서 죽일 정도로 빠르고 강력하다.”
“헉! 샤벨타이거를……?”
“오우거도 이놈을 만나면 피한다. 속력에서 도저히 상대되지 않고 강력한 뿔을 지녔기 때문이다.”
“좋아요. 그런 놈을 잡았다고 쳐요. 근데 그놈의 간을 어디에 쓴대요?”
“나도 모른다. 그저 약재로 사용될 것이라는 것만 안다.”
“제기랄! 누가 아픈지 몰라도 잘못되면 우리 모두 죽을 수 있다는 거 아냐?”
“그러게, 어째 보수가 후하다 생각했어.”
용병들은 자기들끼리 투덜대고 있었다. 쏘러리스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임무가 끝난 뒤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후엘 자작가는 라수스 협곡에 인접한 곳에 위치한 율리안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가이다.
그곳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마치는 즉시 협곡을 지나 미판테 왕국을 가로지를 생각이다. 다음엔 베세른 산맥의 끝자락을 넘어 아드리안 공국으로 가야 한다.
현재 아드리안 공국은 전화(戰禍)에 휩싸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여 저잣거리에 떠도는 모든 정보는 모호하다.
다시 말해 확인할 수 없는 정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직접 상황을 살펴본 후 공국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구상하여야 한다 생각했다.
“자자, 오늘은 여기까지……. 출발은 이틀 뒤이다. 팀이 정해졌으니 팀원들끼리 얼굴도 익혀라. 팀장들은 팀별로 배분된 준비물을 챙기도록!”
A급 용병 랄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팀별로 모여서 준비할 것들을 의논했다. 현수는 용병에 대해 아는 바가 적기에 가만히 앉아서 하는 말만 듣고 있었다.
현수네 팀은 가는 동안 먹을 식량을 준비하기로 했다. 긴 여정이기에 상당히 많은 양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B급 용병 로렌스와 C급 용병 셋이 알아서 준비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현수는 이틀 뒤 다시 이곳에 집결하기만 하면 된다. 잘 되었다 싶어 지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용병지부에 들러 10실버를 내는 게 우선이겠군.’
앞으로 임무를 배속 받지 않아도 C급 용병 신분이 유지되게 하는 면책금 10실버를 내려는 것이다.
터덜터덜 여관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로시아는 이레나 상단 사무실로 갔고, 얀센은 하인스 상단 사무실로 갔다. 세실리아는 어디론가 놀러나갔고, 로사는 못다 잔 새벽잠을 자는지 조용하다.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현수는 체력을 단련할 겸 장작패기를 하려 후원으로 나갔다.
로사의 출산이 다가오자 주방은 온전히 얀센의 책임이다.
낮에는 상단 사무실에서 장사를 하고 아침저녁으로 장작을 패서 연료를 준비한다. 당연히 힘들 것이다.
그러기에 얀센의 일손을 도울 겸 나선 것이다.
휘이익―! 탁―!
후원에 발을 들여놓자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린다. 그리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과녁 중앙에 정확히 꽂힌다.
그것은 화살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멀대처럼 키 큰 사내가 활을 들고 서 있다. 유카리안 영지 감옥에서 구출해 온 엘프 레이찰 토들레아이다.
“……!”
“아! 은인이셨군요.”
큰 키에 멋진 금발, 그리고 뾰족한 귀와 왼쪽 얼굴의 긴 흉터가 유난히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내이다.
“은공께 인사드립니다.”
“아! 오마샤 토들레아님, 그리고 하일라 토들레아님! 여기에 계신지 몰랐습니다.”
지구에 있다 오느라 이들의 존재를 깜박한 현수는 얼른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네, 카이로시아 아가씨가 남들의 이목도 있고 하니 후원을 쓰라 하여 이곳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 완전하진 않습니다.”
“흐음, 한시바삐 돌아가셔야 할 텐데요.”
“네, 얼른 돌아가야 하는데 몸이 이래서…….”
오마샤 토들레아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제가 좀 봐드릴까요?”
“……!”
레이찰 토들레아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백작이 C급 용병 차림을 한 것이 이상했고, 의원인 척하는 것도 괴이하다 느낀 때문이다.
“저부터 봐주세요.”
나선 이는 하일라 토들레아이다. 조금 전부터 현수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름다운 엘프 여성이다.
“그러지요. 가만히 계십시오. 마나 디텍션!”
“……! 마법사셨습니까?”
레이찰 토들레아가 화들짝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에게서 마나의 향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때문이다.
현수는 대답 대신 하일라 토들레아의 신체를 스캔했다. 마나의 유동이 불규칙적이며, 간혹 끊기고 있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내부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마나여, 모든 부위를 원상대로 회복시켜라. 리커버리!”
샤르르르릉―!
서늘한 푸른 빛 마나가 하일라 토들레아의 몸 속으로 파고드는 순간 레이찰 토들레아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나온다.
“헐……!”
7써클 마법이 너무도 쉽게 시전되기에 놀란 것이다. 잠시 후, 하일라의 창백했던 안색이 서서히 붉어지고 있다.
“레이찰 토들레아님도 봅시다.”
“네에.”
또 다시 리커버리 마법이 구현되었다. 다음은 오마샤 토들레아의 차례였다.
현수가 마법사임을 감추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이곳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 머물면 언제 또 잡혀갈지 모른다. 따라서 한시바삐 동족들이 있는 숲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헤어지면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기에 드러내 놓고 마법을 쓴 것이다. 물론 인간들에게 현수가 마법사라는 소문을 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법사셨습니까? 어떻게 저희조차 감쪽같이 모를 수가 있는 겁니까?”
레이챨은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건 마나 봉인 마법이 구현된 때문입니다.”
현수는 이실리프 마법사라는 것을 감춰야 한다. 그렇기에 어느 누가 마나를 스캔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는 아티팩트를 끼고 있다. 왼손 약지의 반지가 그것이다.
“아! 그러셨군요. 아무튼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랄 것도 없습니다. 그나저나 몸은 어떠십니까?”
“찌뿌뜨하고 무겁기만 하던 몸이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이런 기분 정말 오랫만입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현수가 오마샤와 하일라를 바라보니 둘도 마찬가지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가고픈 곳으로 가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이건 여비에 보태 쓰십시오.”
아공간에서 금화를 꺼냈음에도 엘프들은 놀라지 않았다. 7써클 리커버리를 쓰는 마법사라면 당연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언제고 베세른의 검은 숲에 오시면 저희를 방문해 주십시오. 은인께 입은 은혜의 10분의 1이라도 꼭 갚고 싶습니다.”
“하하, 네에. 그럴 기회가 되면 꼭 그러겠습니다.”
베세른 산맥엔 멀린의 레어가 있기에 언젠가는 방문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때 이걸 보이면 저희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레이챨 토들레아가 현수에게 내민 것은 아직 초록이 가시지 않은 물푸레나무 잎 비슷한 것이다.
현수가 뭔지를 살피자 오마샤가 입을 연다.
“그건 베세른 깊숙한 곳에 있는 검은 숲의 근원인 위그드라실(Yggdrasil)의 잎입니다. 사막에서도 샘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아, 그래요?”
곧 캐러나데 사막으로 가야 할 상황이기에 현수는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었다.
“샘이 있는 곳에 당도하면 잎의 끝이 땅 쪽으로 휘어집니다. 거길 파면 물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일라 토들레아의 보조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쓸 수도 있겠군요. 나중에 만나면 돌려 드리겠습니다.”
현수는 엘프가 어떤 존재인지를 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본 때문이다. 또한 여러 권의 판타지 소설을 읽었기에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것이다.
위그드라실의 잎이라 할 때에도 반문하지 않았다.
북유럽의 신화에 나오는 세계수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