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70화 (170/1,307)

# 170

“저희는 이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은공!”

“하인스 멀린 백작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드려요.”

“하하, 네에. 먼 길 조심해서 가십시오.”

토들레아 남매는 현수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곤 곧장 길을 나섰다. 인세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사라진 때문이다.

“흐음, 무사히 잘 가야 할 텐데.”

멀어져 가는 엘프들을 바라보던 현수는 곁에 놓인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나직이 중얼거린다.

“좋아! 오늘 하루에 얼마나 팰 수 있는지 한번 볼까?”

휘이익―! 퍼억―!

나무를 세워놓고 수직으로 갈기니 쉽게 갈라진다. 잘 마른 때문이다. 그렇게 약 두 시간쯤 쉬지 않고 장작을 팼다. 그 결과 상당히 많은 장작을 팰 수 있었다.

“휴우∼! 땀이 다 나네.”

마법을 쓰지 않고 순전한 근력으로만 작업을 했기에 상체에서 솟은 땀이 허리춤을 두른 수건을 흠뻑 적신 상태이다.

그런 현수의 상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예술이다.

영화 G. I. Joe에 나온 이병헌의 상체보다도 훨씬 멋지다.

허리춤의 수건을 뽑아 샘솟듯 솟아나는 땀을 닦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을 뵈어요.”

“주인님을 뵙습니다.

“응? 아……! 로즈. 그리고 릴리!”

현수의 눈에 뜨인 사람은 하녀 복장을 한 로즈와 릴리 자매였다. 유카리안 영지에서 거금 44골드나 주고 산 노예들이다.

현수는 이들 또한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 슬쩍 미안했다.

돈 주고 위기로부터 구해주기는 했지만 이후의 배려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상기한 것이다.

“둘은 어디에 있었어?”

“저흰 건너편에 위치한 만물상회에서 일해요.”

세실리아 여관의 건너편에는 별의별 물건을 다 파는 가게 하나가 있다.

언젠가 우연히 들은 말에 의하면 나이 70이 넘은 늙은이가 소일거리 삼아 운영하는 곳이라 하였다.

하일라가 가면서 현수가 왔다는 이야기를 해줘서 온 것이다.

“일을 해? 너희 둘이?”

“네, 밥값은 해야 하니까요.”

“얀센이나 로사가 밥값을 내래?”

“그건 아니지만 공짜 밥은 먹을 수 없잖아요.”

“흐음……!”

나직이 한숨을 쉰 현수는 로즈와 릴리를 살펴보았다.

속해 있던 나라에서 반역의 죄를 물어 타국에 노예로 팔아버린 존재들이다.

로즈는 무표정이다. 주인이 된 현수가 무슨 짓을 하든 받아들이겠다는 듯 태연하다. 반면 릴리는 눈치를 살핀다. 혹시라도 고통을 줄까 두려운 모양이다.

아무튼 공짜 밥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은 이들에게 의식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무지렁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신분을 물어봤자 대답하지 않을 듯하다. 현수는 이들의 거취를 어찌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노예에서 해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종속 마법을 해제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풀어줘도 아무런 기반이 없기에 자립할 수 없다. 따라서 뭔가 대책을 세워주고 풀어줘야 한다.

그런데 그 대책이랄 것도 없기에 잠시 상념에 잠겼다.

“주인님, 땀을 많이 흘리셨는데 목욕물 데울까요?”

“응? 그, 그래.”

얼떨결에 대답해 놓고는 다시 상념에 잠겼다. 좋은 방법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그런데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스무 살쯤 된 로즈와 열세 살짜리 릴리에게 마땅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현수 역시 이곳에 기반이 없어서이다.

하인스 상단은 얀센과 로잘린만으로도 인력이 차고 넘친다. 세실리아 여관은 영업을 접은 상태이니 일손이 필요없다.

설사 일손이 필요한 상황이 되더라도 취객들을 상대하여야 하는 홀에는 내놓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레나 상단 소속 상인들만 드나든다 해도 문제가 발생될 수 있다. 연약한 몸으로 술 취한 개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주인님! 목욕 준비 다 되었어요.”

“응? 그래, 알았어.”

현수는 어찌하면 좋을지를 고심하며 로즈의 뒤를 따랐다.

자욱한 수증기로 뒤덮인 욕실에 들어선 현수는 옷을 벗고 물속에 몸을 담갔다.

“흐음, 좋구나.”

11장 카지노에서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물은 따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그래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인기척이 느껴진다.

누군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안에 있던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주인님! 목욕 시중 들어드릴게요.”

“으잉……? 로, 로즈? 여태 거기 있었어? 왜?”

“네. 주인님. 시중 들어드리려구요.”

현수가 뭐라 말하기로 전에 등을 문대는 손길이 느껴진다.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로, 로즈! 자, 잠깐만.”

“네, 주인님!”

“목욕은 나 혼자 해도 되니까 나가 있어.”

“네……? 왜요? 혼자서 어떻게 등을 닦아요? 제가 문질러 드릴게요. 별로 힘 안 들어요. 주인님!”

“아, 아니야. 난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밖에 나가 있어.”

“네, 주인님!”

로즈는 두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휴우∼! 근데 설마 다 본 건 아니겠지?”

현수는 서둘러 목욕을 마쳤다. 그런데 옷이 보이지 않는다.

“로즈! 내 옷 어디 있어?”

“주, 주인님. 아직 옷이 마르지 않았어요. 흐흑! 죄송해요.”

릴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목욕하는 사이에 입었던 옷을 모두 빨아버린 모양이다.

현수는 내심 웃음이 나왔다.

여긴 세탁기도, 짤순이도, 건조기도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 목욕하는 동안 어찌 그걸 빨아서 말리려고 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울지 마.”

아공간에서 의복을 꺼내 입은 현수가 밖으로 나오자 릴리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없던 옷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주, 주인님! 그 옷은… 그건 어디서……? 주인님!”

“릴리! 아무 소리도 하지 마. 알았지?”

“네, 주인님!”

“그런데 밥은 먹었어?”

“아, 아직…….”

“따라와.”

현수는 릴리를 데리고 주방으로 갔다. 그런데 어디에 식재료가 있는지 찾을 수 없다. 워낙 어두컴컴했던 때문이다.

“라이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이 훤해진다.

릴리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마법사일 것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불을 밝혔지만 식재료는 여전히 찾기 어렵다. 하여 아공간에 담긴 것들을 꺼냈다.

그리곤 러시아에서 먹어본 샤우르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두어 번 실패한 결과 먹어본 것과 비슷한 맛을 찾아냈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익숙해진 솜씨로 샤우르마를 만들었다.

“릴리, 배고프지? 이거 먹어봐! 근데 로즈는?”

“언니는 만물상회에 갔어요.”

“그래? 그럼 이걸 갖다 줘. 거기 있는 노인에게도 주고……. 그리고 만물상회는 이제 그만둬. 알았지?”

“네. 그럴게요.”

“거기서 이거 다 먹으면 로즈랑 같이 와야 해.”

“네, 그러겠습니다.”

요리를 하는 동안 현수는 이들 자매에게 적합한 일거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잠시 후, 로즈와 릴리가 왔다.

현수는 둘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둘 다 글을 읽을 줄 알기에 입문 과정이 기록된 마법서를 꺼내서 건넸다.

그리곤 원피스 몇 벌을 꺼내주었다. 워낙 낡은 옷을 입고 있어 속살이 보일 지경이었던 때문이다.

그리곤 몇 가지 지시를 했다.

첫째, 날마다 여관 청소를 하라고 했다. 그것이 음식을 먹는 대가이다.

둘째는 날마다 목욕하는 것이다. 잘 씻지 않아 몸에서 냄새가 났던 때문이다.

셋째는 여관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지 말라 하였다. 자칫 나쁜 놈들에게 납치당할까 싶었던 때문이다.

넷째는 당분간 마법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단, 어느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비밀리에 수련하라 하였다.

로즈와 릴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주방으로 가서 샤우르마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언제든 배가 고프면 만들어서 먹으라고 재료들도 꺼내 놓았다. 물론 냉장고가 없는 세상이기에 보존 마법을 걸어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다음엔 마법등을 꺼내 불을 밝혀 놓았다. 주방이 너무 어두웠던 것이다.

로즈와 릴리는 주인님이 마법사라는 사실에 몹시 고무된 듯한 표정이다. 하나 자세한 것은 묻지 않았다.

노예는 주인에게 아무것도 물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일련의 조치를 끝낼 즈음 괜스레 심란한 기분이 든다.

생각해 보니 강연희 대리로부터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다.

서둘러 테세린 외곽으로 나갔다. 그리곤 결계를 치고 들어앉아 마나를 모았다. 확실히 마나가 풍부한 지역인지라 깊은 밤이 될 즈음 마나석이 까맣게 변했다.

“마나여, 나를 지구로 귀환시켜라.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꺼졌다.

* * *

“혹시 강연희 씨로부터 연락 온 것 있었나요?”

“아!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연락이 왔었습니다.”

“네에……? 언제요?”

현수는 아차 하는 마음에 얼른 다가섰다. 데스크 직원은 충분히 그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미소 띤 얼굴이다.

“기다리시는 분이 있다하니 이따 다시 전화한다고 하더군요. 연락이 오면 어떻게 연결해 드릴까요?”

“객실에 있을게요. 연락 오는 대로 연결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고객님!”

팁을 100파운드나 받아서 그런지 몹시 싹싹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러면서 조금만 더 일찍 올 걸 하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강연희 대리와 연결이 되지 않을까 싶은 조바심 때문이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시간으로 오는 건데.”

로즈와 릴리에게 마법을 가르치느라 시간 보낸 것을 후회한 현수는 룸에 들어앉아 전화통만 바라보았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록 전화기는 잠잠했다. 혹시 고장 났나 싶어 네 번이나 데스크로 전화를 걸었었다.

데스크에선 연락이 오기만 하면 곧장 연결할 테니 걱정 말라면서 안심시키려 했다.

텔레비전도 틀지 않았다. 착신음이 들리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는 내내 아공간에 담겨 있던 강연희 대리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얼굴을 보게 되면 오랜만에 만나는 셈인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심한 것이다.

띠리리링! 띠리링!

“여, 여보세요.”

“고객님, 강연희 씨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혹시 끊긴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참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여보세요.”

드디어 그리운 목소리가 들린다. 현수는 와락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왜 이러는지 본인도 모를 일이다.

연희는 현수와 헤어진 지 반년도 안 되었지만 현수는 연희와 아주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간 결계를 치고 들어가 앉아 있던 세월이 얼마던가!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려 했던 것이다.

“아……! 여보세요.”

“진짜 김현수 씨예요?”

“네에, 강연희 대리님!”

“어머! 반가워요.”

“네에. 저도요.”

현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분명히 생각해 두었었다. 그런데 그만 까먹고 말았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 때문이다.

“그런데 런던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네……? 그야 강연희 대리님을 만나려고…….”

“어머! 정말요? 농담이죠? 호호! 그래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런데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긴 셰필드(Sheffield)예요.”

현수는 벽에 붙어 있는 영국 지도를 보았다.

“셰필드라면 런던의 북서쪽이네요.”

“네. 맞아요.”

“근데 거기 왜 간 거예요?”

“사진 찍을 게 많아서요.”

“사진이요? 근데 거기 계속 계실 거예요?”

“아뇨, 오늘까지만 여기 있고 내일은 맨체스터(Manchester)로 이동할 거예요.”

“맨체스터요?”

“네, 거기에도 사진 찍을 게 좀 많거든요.”

“그럼 강 대리님은 어디에 묵을 겁니까?”

“맨체스터까지 오시게요?”

“네, 영국까지 왔는데 한번 뵈어야죠.”

“그래요? 그럼 내일 맨체스터에 있는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맨체스터 호텔(Holyday Inn Express Manchester Hotel)로 오세요. 데스크에 쪽지 남겨놓을게요.”

“네, 내일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맨체스터 호텔로 찾아가겠습니다.”

“네, 그럼 내일 봐요.”

불과 1분도 되지 않을 짧은 통화이다. 하나 현수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호흡도 제대로 되지 않는 듯하다.

과도한 긴장 때문이다. 등에선 진땀이 흐르는 듯하다.

“어휴……! 내가 왜 이러지?”

스스로도 이러는 연유를 모르겠기에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욕실로 향했다.

말끔하게 씻고 나서 맨체스터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볼 생각이다. 데스크에 전화해 보니 아래층으로 내려오면 깔끔하게 정리해서 주겠다고 한다.

잠시 후 현수는 인쇄물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런던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London Victoria’s Coach Station)에서 매시간 버스가 있으며 맨체스터까지 약 다섯 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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