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71화 (171/1,307)

# 171

기차를 타면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고 되어 있었으나 버스로 결정했다. 가는 동안 영국의 풍광도 즐기고 연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내일의 일정을 결정한 현수는 느긋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이제 런던에서의 밤을 즐겨보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데스크에 물어보니 캠든 팰리스(Camden palace)라는 곳이 런던에서 규모가 가장 큰 펍이라고 한다.

하여 모닝턴(Mornington)역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안에 발을 들여놓으니 소문대로 엄청나게 크다. 그런데 갑자기 함성이 들려온다. 웬일인가 싶어 살펴보니 대형 스크린에서 축구 경기가 진행 중이다.

라이벌인 첼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간의 시범 경기이다.

첼시는 런던의 프로축구팀이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내일 가게 될 맨체스터를 연고로 하는 팀이다.

현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박지성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축구엔 별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스크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시끄러워서 술도 못 마실 지경이다.

“와와와와……! 그 새끼 밟아버려.”

“저런 쌍눔의 새끼들! 콱 죽여 버려.”

“에이, 심판 저 새끼 맨유한테 돈 먹었나봐. 저게 왜 옐로야? 레드 카드를 줘야지.”

“그러게 말이야! 저 심판 새끼 누구야? 총으로 쏴서 죽여.”

슬로비디오를 보니 첼시 선수가 공을 몰고 갈 때 맨유의 퍼디낸드가 태클을 걸어 넘어졌는데 발이 약간 높이 들렸다.

보아하니 옐로 카드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현수는 관심도 없는 축구 경기 때문에 열 받을 일 없기에 묵묵히 잔을 들었다. 그리곤 천천히 잔을 비웠다. 그 순간이다.

“와와와와와……!”

“고올!”

퍼억―!

“켁! 크큭! 캑, 캑!”

첼시 선수가 찬 프리킥이 맨유의 골망을 흔들었다.

그때 환호하던 누군가가 현수의 등을 쳤다. 그 덕에 마시던 맥주에 사래 들린 현수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

앞섶은 물론이고 바지까지 적시게 생겼기 때문이다.

“와와와와와……!”

“잘 했어! 디디!”

“역시 디디야!”

디디는 디디에 드록바(Didier Drogba)의 애칭인 듯싶다.

“하하, 맨유 놈들 열 받았겠는데? 안 그래?”

“크크, 그럼! 짜식들이 감히 어디 우리 첼시에게……. 콱 5대 1로 눌러 버려야 해.”

“그럼그럼! 맨유 놈들 다시는 헛소리 못하게 눌러야지.”

“그래, 특히 퍼거슨! 저 늙은이 웃으면서 주둥아리 놀리는 꼴 보기 싫어.”

현수는 누가 자신을 쳤는지를 찾아보았다. 하나 여럿이 얼싸안고 방방 뛰는 모습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들 화면에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더 시끄러워진다.

“어라, 뭐야……? 심판 저 새끼 뭐라는 거야?”

“이런 썅……! 저 심판 새끼 죽여!”

“뭐? 무효 골? 이런 시방새가…….”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웬일인가 싶어 텔레비전을 보니 방금 전에 넣은 골이 무효라는 선언이 있었던 듯싶다.

너무 시끄러워서 해설자의 설명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슬로비디오로 재생되는 장면은 보니 드록바가 골을 차는 순간 골대 앞에 있던 첼시 선수 가운데 하나가 수비에 가담해 있던 박지성을 걷어찼다.

카메라에 안 잡히는 줄 알고 뒤에서 걷어찬 것이다.

자세히 보니 박지성은 낭심을 얻어맞은 듯하다. 갑작스런 고통에 그가 고꾸라지는 순간 점유하고 있던 공간으로 공이 스쳐 지나간다. 서 있었다면 헤딩으로 처리할 수 있을 높이이다.

다음 순간 골망이 흔들렸던 것이다.

“뭐야? 저 개 잡아먹는 새끼, 저거 할리우드 액션일 거야. 저 눈 찢어진 새끼 퇴장시켜야 해.”

“맞아, 저거 완전한 할리우드 액션이야. 가만히 있다가 어떻게 저렇게 엎어질 수 있어? 안 그래?”

“신발놈! 감히 첼시를 상대로 할리우드 액션을……?”

“개 잡아먹는 놈들 죽여!”

현재 스코어는 1대 0이다.

맨유가 리드하고 있고, 경기는 이제 겨우 5분 정도 남았다. 이번 골이 유효라면 무승부 내지는 역전을 노려볼 수 있다.

하지만 무효 선언이 되니 첼시 선수들은 맥 빠진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대로 경기가 속행된다면 첼시가 패할 확률이 90%는 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맥주잔을 든 채 쌍욕을 해대는 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맥주를 더 마셨다.

그때였다.

“이봐!”

퍼억―!

“커억! 캑, 캑……!”

또 누군가가 갑작스레 등을 쳤기에 마시던 맥주가 입과 코에서 뿜어졌다. 하지만 현수는 행여 다른 사람의 옷을 적실까 싶어 이 와중에도 고개를 숙였다.

그때 누군가가 뒤통수를 또 친다. 그것도 아주 세게!

퍼억―!

“으윽!”

당연히 기분이 나쁘다. 하여 고개를 들어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쳤는지를 살폈다.

시선이 마주친 자는 1m 90㎝쯤 되는 거구였다.

“어이, 너도 개 잡아먹는 코리언이지?”

“코리언이긴 하지만 개고기는 안 먹어. 근데 날 왜 쳤지?”

“왜 쳤냐고? 그야 기분 나빠서지. 저기 저 재수없는 팍 때문에 드록바의 골이 무효가 되었잖아.”

보아하니 전형적인 훌리건(Hooligan)인 듯싶다.

주변에 있던 녀석들도 비슷해 보인다. 이들은 현재 이놈과 현수의 실랑이를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숫자를 헤아려 보니 얼추 십여 명은 되는 듯하다. 하나 이에 겁먹을 현수가 아니다.

“뭐야? 그게 내 탓이야? 왜 날 쳐? 한번 붙어보자는 거야?”

현수가 강하게 나가자 잠시 움찔거리는 듯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태권도를 할 줄 안다는 헛소문을 들은 탓이다.

하지만 훌리건은 곁의 친구들과 자기 주먹을 믿는다는 듯 느물느물한 웃음을 짓는다.

“그래! 기분도 나쁜데 한번 붙자. 나와!”

훌리건은 대끔 현수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하나 이에 잡혀줄 현수가 아니다. 훌리건의 손을 강하게 밀쳤다.

타악―!

“어엇!”

의외로 강력하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훌리건은 친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친구가 제법 힘 좀 쓰는데? 좋아, 제대로 한번 하지.”

훌리건이 자세를 잡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소리친다.

“어이, 이 안에서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싸우려거든 나가서 싸워. 그리고 거기 동양인!”

현수가 왜 부르느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나이 50쯤 된 사내가 좋은 말로 타이른다.

“웬만하면 참게. 이놈들 축구에 미친놈들이라 그렇지 막돼먹은 놈들은 아니네.”

“……!”

“에이, 웰링턴 아저씨는 좀 빠지시죠.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그래, 대신 소란은 피우지 마라. 알았어?”

“네, 알았으니 어서 가기나 해요.”

웰링턴이란 사내가 물러가자 훌리건이 현수를 째려본다.

“어이, 개 잡아 먹는 코리언! 주차장에서 한판 어때?”

현수는 기분이 잡침을 느꼈다. 당연히 화가 난다.

“좋아, 주차장으로 가지.”

현수가 먼저 펍을 나서자 다들 뒤따라온다. 그중 하나가 훌리건에게 속삭인다.

“저 자식 세게 나오는 걸 보면 한가락 하는 놈일 수도 있어. 조심해.”

“걱정 마라. 저깟 놈은 한 주먹도 안 돼.”

“네가 힘들어 보이면 내가 도와줄까?”

“뭐, 그러든지.”

놈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게 된 현수는 어이가 없었다. 영국까지 와서 양아치를 만났다 생각한 때문이다.

주차장 가운데에 당도하자 훌리건이 상의를 벗는다.

문신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그걸로 위압감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그런데 어찌 현수가 그런 것에 쫄겠는가!

멍청하게도 제 몸을 도화지 삼은 훌리건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 이놈들을 어찌 요리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주차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보니 도난 사건 때문인지 CCTV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국까지 와서 경찰서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묘수를 짜내는 중이었다.

“어이, 노랭이! 오늘 뼈가 부러지더라도 내 탓은 하지 마.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까.”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덤비기나 해.”

현수가 눈빛을 빛내자 훌리건은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상대가 강하게 나오니 겁이 난 것이다. 하나 체면이 있지 어찌 물러나겠는가! 위기에 처하면 주변의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라 생각하고는 한 발짝 내디뎠다.

“이놈!”

휘이익―!

100㎏이 넘는 거구가 휘두르는 주먹은 위협적이다.

하지만 맞지 않으면 그만일 뿐이다. 게다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현수의 눈에는 슬로비디오처럼 보인다.

슬쩍 허리를 숙였다 일어선 현수는 다가온 자의 복부에 강력한 한방을 먹였다.

퍼억―!

“끄으윽!”

털썩―!

딱 한 방이다. 훌리건은 배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참을 수 없는지 호흡을 멈췄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덜 아플까 싶은 본능 때문이다.

이 순간 주변을 감싸고 있던 자들 모두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딱 한 방에 제법 맷집 센 걸로 이름난 데이비드가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이봐, 데이빗, 괜찮아?”

누군가 데이비드에게 다가서는 순간이다.

“와와와와와! 와와와와!”

펍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현수를 제외한 사내들 전부가 달리기 시작했다. 데이비드가 아프든 말든 첼시가 넣은 골을 슬로비디오로 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축구에 관심없는 현수는 데이비드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어때, 일어나서 다시 한 번 해볼 테야?”

“아, 아니야.”

데이비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한 번 더 맞으면 죽을 것 같기 때문이다.

“또 한 번 내게 무례를 범하면 그냥 두지 않는다.”

“아, 알았다. 미안하다.”

웰링턴이라는 아저씨 말대로 아주 막돼먹은 양아치는 아닌 모양이다. 데이비드는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현수는 천천히 걸어서 펍으로 되돌아왔다.

패배 직전에 동점골을 넣었으니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어도 시원치 않아야 한다. 그런데 왠지 싸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보니 얼이 반쯤 빠진 모습이다. 하여 텔레비전을 보니 박지성이 골 세레머니를 하고 있다.

재생되는 슬로비디오는 첼시의 만회골이 터지고 불과 20초 만에 넣은 결정골의 모습이다.

박지성은 센터 써클 부근에서 패스를 가로챘다. 그리곤 쏜살같은 속도로 페널티 에이리어까지 단독 드리볼을 했다. 훗날 폭풍의 질주라 이름 붙여질 장면이다.

그러자 첼시의 크로아티아 출신 골키퍼 마테이 델라치가 슈팅 각도를 줄이기 위해 튀어 나온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박지성은 무려 여섯 명의 육탄저지를 돌파했다. 실로 정교한 볼 컨트롤이다.

멋지게 마르세이유 턴과 사포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그리곤 공을 잡으려 튀어나온 델라치까지 침착하게 제쳤다. 다음엔 텅 빈 골대 앞에서 툭 차서 골을 넣었다.

첼시를 상대로 원맨쇼를 펼친 것이다. 절친인 에브라가 박지성을 얼싸안았고, 퍼거슨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펄펄 뛰는 모습이 화면에 비춰진다.

반면 펍의 분위기는 점점 더 싸해진다.

‘에구, 편한 맘으로 술 먹긴 틀렸군.’

현수는 미련없이 밖으로 나갔다. 다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분위기 속에서 술 먹긴 싫어서이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터덜터덜 걷다보니 눈에 번쩍 뜨이는 간판 하나가 보인다.

『엠파이어 카지노(Empire Casino)』.

어느새 피카디리 스트리트(Piccadily street)까지 걸어온 것이다. 곁에는 하드락 카지노와 나폴레옹 카지노가 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생각에 셋 중 가장 크고 깔끔해 보이는 엠파이어 카지노로 갔다.

이곳 역시 러시아의 클럽처럼 입구에 관리인이 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멤버십 카드가 있으십니까?”

“없는데요. 여기 처음입니다.”

“여행객이시면 여권을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흐음, 그럽시다.”

현수가 여권을 내밀자 금방 뭔가를 기재하고는 카드 한 장을 준다. 다음부터는 이것만 내밀면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

“Good luck!”

“Thank you!”

안에 발을 들여놓으니 각종 게임이 진행 중이다.

블랙잭, 바카라, 룰렛, 쓰리카드 등이다. 이밖에도 포커 테이블이 보였고, 사방 벽에는 슬롯머신들이 즐비하다.

한국에서는 일반 해외여행자가 해외여행 시 경비로 환전할 수 있는 금액이 미화 10,000불로 정해져 있다.

이 돈을 가지고 해외여행을 가서 여행 경비로 사용하든, 카지노를 하든 아무 문제 없다.

하지만 카지노 같은 데서 도박을 하다보면 전부 잃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현지에서 급전을 차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현지의 사채업자)의 한국 계좌로 한국 돈을 입금해 주고 현지에서 달러나 현지의 돈으로 계산해서 받는 경우가 있다.

이 과정을 일명 ‘환치기’라고 하는데 ‘외국환거래법’에 위반되어 처벌 대상이 되는 것이다. 또 도박을 상습적으로 할 경우에도 상습 도박으로 처벌받는다.

현수는 이러한 법령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흐음, 일단 돈을 다 잃으면 안 된다는 거지?”

나직이 중얼거린 현수는 5,000유로를 칩으로 바꾸었다. 미화로 6,500달러 정도 된다. 과거의 현수에겐 엄청나게 큰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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