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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173화 (173/1,307)

# 173

현수는 다른 곳을 더 기웃거리는 것보다는 성당에서 제일 가까운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죽치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곤 하염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평상시의 영리함 내지는 영특함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우직하게 기다렸다. 기다리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40분쯤 지났을 무렵이다.

저쪽에서 베이지색 플레어스커트 위에 연보랏빛 블라우스를 걸친 여인 하나가 두리번거리며 다가온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릿결,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육감적인 몸매, 하늘하늘한 스커트, 그리고 쪽 뻗은 각선미는 현수로 하여금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

분명한 강연희였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아프로디테의 현신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현수가 보기엔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춰지고 있다.

마침 석양이 그쪽으로 지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현수뿐만 아니라 주변에 앉아 있던 모든 남자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본능이다.

“현수 씨!”

“강연희 대리님!”

연희는 현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속력을 높였다.

“저 여기 앉아도 되죠?”

“그, 그럼요.”

현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있었다.

“우리 반년 만인가요?”

“네, 아마도 그쯤……. 정말 반갑습니다.”

“네에, 저도요. 근데 몸은 좀 어때요?”

몸이 아프다고 휴직했던 것을 잊지 않은 듯하다.

“네, 다 나았어요. 지금은 멀쩡합니다.”

“다행이네요. 근데 영국엔 웬일이에요?”

“말씀드렸잖아요. 강연희 대리님 보고 싶어서 왔다고……!”

“정말요……? 이거 어쩌죠? 전 농담인줄 알았어요.”

“강 대리님! 이런 말씀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꼭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뭔데요?”

현수가 정색해서 그런지 연희의 눈이 커진 상태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던 것이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네에……? 아, 네에. 고마워요. 절 좋게 봐주셔서.”

“……!”

현수는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말을 모두 잊었다. 너무도 환한 아름다운 미소가 기억중추 뇌세포를 잠재워 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한참 동안이나 멍한 표정으로 연희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 그대로이다. 아니, 기억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한 생활을 떠나 자유롭게 지내면서 모든 강박으로부터 벗어난 때문일 것이다.

현수가 말을 잊은 동안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아 갔다.

그리곤 잠시 후 필굿 크랜베리라임 스파클링이라는 긴 이름의 탄산주스 두 잔을 가져왔다.

뭘 마실 거냐는 말에 그냥 같은 걸 달라고 한 때문이다.

연희는 빨대로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는 궁금하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참, 현수 씨! 복직은 했어요? 근데 여긴 어떻게……?”

“네, 복직했죠. 그리고 지금은 휴가 중이에요.”

“어! 아직 여름 휴가철도 아닌데……. 근데 왜 이렇게 일찍 휴가를 냈어요?”

고개를 갸웃거린다. 연희의 말대로 오늘은 본격적인 여름휴가가 시작하기 보름쯤 전이다.

“강 대리님 뵙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휴가를 일찍 썼습니다.”

“치이, 그간 농담만 느셨나 봐요.”

살짝 곁눈질을 하는데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

“농담 아닌데……. 정말 강 대리님 보고 싶어서 왔어요.”

“어머, 정말요?”

현수의 표정과 분위기를 보아하니 진짜인 듯하다는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 부담되세요?”

“어머, 아니에요. 사실 저도 현수 씨가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어요. 병 고친다고 산속에 들어갔는데 다 나았는지, 복직은 했는지 정말 알고 싶었거든요.”

“그러셨어요? 네, 다행히도 강 대리님 염려 덕분에 회복되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아주 씽씽하죠. 보실래요?”

현수는 짐짓 알통을 보여주려는 몸짓을 했다. 그런데 정말 근육이 불룩 솟아오른다. 이 모습을 본 연희의 눈이 커졌다.

“우와, 산속에서 운동만 하셨나봐요.”

“네? 아, 그런 건 아니고……. 근데 업무지원팀인데 왜 여기에 와 계신 거예요?”

그간 정말 궁금했던 내용이다. 그렇기에 현수는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건 말이죠. 현수 씨가 휴직하고 난 뒤에…….”

연희의 설명이 이어졌다.

현수가 휴직한 뒤 연희는 문득 쓸쓸함을 느꼈다. 매주 주말마다 이 산 저 산을 오르내리던 것도 못하게 되었다.

주변에 등산을 좋아하는 친구는 하나도 없다.

모두들 짙은 화장을 하고, 어떻게 하면 괜찮은 남자와 인연을 만들까 하는 속물이 되어버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다녀볼까도 생각했는데 포기했다.

그때 하필이면 홀로 등산하는 여자들을 노리는 성폭행범이 자주 출몰한다는 기사가 뜬 때문이다.

문득 회사일이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을 받을 즈음 기획3팀장이 된 박진영 과장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툭하면 전화하고, 걸핏하면 별일도 아닌 일을 협조해 달라면서 업무지원팀 사무실을 드나든 것이다.

아주 노골적으로 연희에게만 접근했기에 업무지원팀 사람들은 둘 사이의 로맨스를 기대하고 자리를 비켜주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연희는 박진영 과장의 접근이 싫었다. 잘난 체하는 것도 싫고, 느물느물한 태도도 싫었다.

그렇지만 같은 직장이고, 한 직급 높은 사람이기에 억지로 웃어주는 나날을 보냈다.

이런 와중에 설계팀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회사에선 2014년에 있을 대규모 공사를 수주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시 당국이 계획 중인 대대적인 재건축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전체 규모는 일산 내지는 분당의 절반 정도 된다.

낡고 더러운 주거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도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것이 시 당국의 계획이다.

브라질은 수도를 이전하면서 브리질리아를 계획도시로 만든 바 있다. 그래서 하늘에서 보면 날개를 펼친 거대한 제트기처럼 보인다. 소위 파일럿 플랜(Pilot Plan)의 결과이다.

신도시 건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기에 이전의 수도였던 리우데자네이로를 개선하려는 것이다.

아무튼 이 공사는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엄청난 규모이기에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지건설 역시 국내의 다른 건설사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이 공사에 입찰할 계획이다.

첫째는 디자인이다. 공사비도 공사비지만 리우데자네이루 시 당국이 혹할 만한 디자인이 있어야 한다. 하여 설계팀 인원이 보강되고 각종 자료 수집이 시작되었다.

건축물은 한국의 최신 아파트와 빌딩의 디자인을 고려하기로 했다. 문제는 건축물이 아닌 정원과 공원, 산책로, 자전거길, 조깅로, 접근로 등이다.

주거 생활을 풍요롭게 할 환경 역시 매우 중요하기에 이것에 대한 자료 수집이 필요해졌다.

그런데 설계팀은 자신들만의 인력으론 감당해 낼 수 없어 업무지원팀에 요청을 했다. 너무 광범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신형섭 사장의 적극적인 업무지원 지시도 있었다.

이에 업무지원팀장은 해외로 나가 자료 수집을 해올 직원을 선별하여야 했다. 이때 강연희 대리가 나섰다.

꼴 보기 싫은 박진영 과장을 피할 수 있고, 무미건조해진 회사 생활에서도 탈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 영국의 아름다운 정원 내지는 건축물들을 카메라와 캠코더에 담아오는 임무가 배정되었다.

출국하기 전날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하여 문자라도 남기려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산속에서 요양하고 있는 사람을 괜히 심란하게 만들지 말자는 뜻이다.

애초의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귀국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업무지원팀장으로부터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다.

정원뿐만 아니라 고건축에 해당되는 성곽 등도 찍어오라는 것이다. 하여 일주했던 영국을 다시 한 번 도는 중이다.

“아! 그러셨군요.”

“네에, 이제 대충 마무리되고 있어요. 다음 달 초까지만 하면 될 것 같아요. 근데 현수 씨 휴가는 언제까지예요?”

“제 휴가요? 7월 24일까지요.”

“네에? 오늘 7월 11일인데 24일까지라고요? 어떻게 휴가가 이렇게 길 수 있죠?”

연희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지건설의 하기휴가는 주말을 빼고 4일이다. 원칙적으론 주 5일 근무이므로 주말을 포함해도 6일이다.

그런데 앞으로 13일간 더 휴가라 하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사실 4월 25일부터 7월 24일까지 석 달간 휴가예요.”

“네에? 3개월 휴가라구요?”

1년은 12개월이다. 그중 3개월이 휴가라면 4분의 1을 쉰다는 뜻이다. 한국의 어떤 기업이 이런 휴가를 주겠는가!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 잠깐만요. 그, 그럼……?”

콩고민주공화국의 대규모 공사를 한국의 천지건설이 수주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발전소와 댐 등을 건설하는 큰 공사이다.

하여 본사 홈페이지로 들어가 보았다.

김현수 사원이 놀라운 활약을 펼쳐 공사를 수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사에선 김현수 사원을 즉각 과장으로 진급시키고, 석 달간의 유급휴가를 주었다고 했다.

당시 연희는 이 기사를 보고도 현수를 떠올리지 않았다. 산속에서 요양 중일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부서에 김현수라는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희는 그가 공을 세운 직원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과장님이 된 거예요?”

“에구, 그 소문이 여기까지 났어요?”

“어머! 어머머머……! 현수 씨! 아니, 김현수 과장님!”

연희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뜬다.

“에이, 그러지 말아요. 괜히 쑥스럽잖아요.”

“세상에나 맙소사! 저는 다른 김현수 사원이 그랬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세상에……! 어떻게 된 일이에요? 네?”

“그게 말이죠. 쩝, 제 입으로 말하기 조금 남세스러운데…….”

“아니에요. 말해줘요. 대체 어찌된 일이죠?”

“흐음, 강 대리님이 궁금해 하시니 말씀드리죠. 제가 예상보다 조금 일찍 복직을 하고…….”

현수의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박진영 과장의 치사한 외압에 의해 자재과가 아닌 해외영업부에 배속된 과정부터 시작되었다.

콩고민주공화국에 가서 돌아다니다가 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했다. 그 아이가 킨샤사 경찰서장의 아들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세인 가에탄 카구지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 덕에 공사를 수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신형섭 사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고, 적지 않은 보너스와 3개월 휴가를 받은 이야기이다.

“세상에……! 정말 잘 되었네요. 현수 씨, 아니, 김현수 과장님 정말 능력자세요.”

“에구, 쑥스럽습니다. 근데 이전처럼 대해주세요.”

“어머, 아니죠. 이젠 과장님이신데. 저보다 상사네요. 호호!”

“강 대리님!”

“네?”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뭔데요?”

강연희는 어떤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자세까지 고친다. 현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시선을 마주쳤다.

“저, 강 대리님과 진지하게 사귀고 싶은데 안 될까요?”

“네에……?”

강연희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에 현수는 틀렸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다.

“미안합니다. 제가 괜한 말씀드린 것 같네요. 불편하신 듯하니 방금 전에 제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어머, 아니에요. 다만 제게 시간을 좀 주세요. 너무 갑작스런 말씀이라…….”

“네에.”

현수는 말을 끊었다. 그리곤 목이 탄다는 듯 앞에 놓인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연희는 그런 현수의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현수의 갑작스런 제안 때문이 아니다.

사실 연희는 오래전부터 현수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다만 같은 직장을 다니는 동료이기에 일부러 약간의 거리를 유지시키고 있었을 뿐이다.

오늘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보고 싶었던 얼굴을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예전과 약간 달라진 듯하다.

오관이 더 바르게 정렬이 된 것 같다. 다시 말해 이전보다 더 준수해진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어려 보인다.

게다가 아프다더니 몸도 건장해졌다. 이전보다 볼륨감이 많이 늘어난 듯하다.

티셔츠를 걸치고 있음에도 드러나는 대흉근의 윤곽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상체가 상당히 발달된 듯하다.

팔뚝의 근육 역시 예사롭지 않다. 강인함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강연희 대리님!”

“그냥 이름 부르셔도 돼요.”

“네……?”

“여긴 직장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대리님, 과장님 이런 말은 하지 않기로 해요.”

“그럼……?”

“전 아까부터 현수 씨라고 불렀어요. 현수 씨도 제 이름 부르셔요.”

“……!”

“며칠만 더 있으면 끝이에요. 그럼 한국으로 돌아가겠지요. 그 며칠 동안 생각해 볼게요. 현수 씨와 사귀는 거 말이에요.”

“네에.”

“근데 이제부터 우리 뭘 하죠?”

일부러 화제를 바꾸려는 듯하다. 눈치 빠른 현수가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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