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74화 (174/1,307)

# 174

“여기 좋은 데 있어요?”

“좋은 데라니요?”

“그냥 놀기 좋은 데요. 모처럼 외국에 왔는데 조금 놀기라도 해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맞아요. 혼자 다니느라 못 가본 데가 너무 많아요.”

“그럼 이제부터 슬슬 다녀볼까요? 제일 먼저 어딜 갈래요?”

“펍이요! 혼자 와서 한 번도 펍엘 못 가봤어요.”

“좋습니다. 그럼 저만 따라오십시오.”

“네에.”

카메라를 가방에 넣은 연희가 얼른 현수의 곁으로 다가선다. 은은한 화장품 냄새가 난다.

불현듯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 억지로 참아냈다. 아직은 그래선 안 된다 생각한 때문이다.

“참, 어젠 런던의 펍에서 시비가 붙었었어요.”

“네에……? 시비요?”

“어제 첼시와 맨유의 경기가 있었잖아요.”

“그랬어요?”

여자인지라 연희 역시 축구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네, 맨유가 1대 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첼시의 드록바가 프리킥을 했어요. 그때 누군가가 박지성 선수를 건드리는 바람에 골이 들어갔어요.”

“어머, 그래서 비긴 거예요?”

연희는 안타깝다는 표정이다. 박지성 선수가 있는 맨유가 더 가깝다 느낀 때문일 것이다. 현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 골은 무효가 선언되었어요. 드록바가 프리킥 할 때 반칙을 했기 때문이죠.”

“아! 그랬군요. 근데 무슨 시비가 벌어진 거예요?

“그게 기분 나빴는지 어떤 놈이 시비를 걸더라구요.”

“어머! 그래서요? 그래서 맞았어요?”

연희가 새삼 현수의 얼굴을 살핀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맞아서 부었거나 멍든 곳이 있나 찾아본 것이다.

“에이, 제가 왜 맞고 다녀요?”

“그럼 다행이네요.”

13장 맨체스터에서 만난 연희

“하여간 그래서 그 녀석하고 아주 잠깐 실랑이를 벌였죠.”

“그래서요?”

연희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듯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현수는 자신이 때렸다는 이야기는 쏙 뺐다.

여자들 대부분 폭력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함성 소리가 들렸어요.”

“왜요? 어디에서요?”

“그 펍 안에서 난 소리에요.”

“그래서요?”

“맨유가 한 골을 먹어 동점 상황이 돼서 소리를 지른 거예요. 경기가 5분도 안 남았었거든요.”

“아, 그래요?”

이제 이야기가 끝났다 싶었는지 슬쩍 물러난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봤더니 이상하게 조용했어요.”

“다 진 경기를 비겼으면 난리가 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그런데 왜 조용해요? 영국 사람들 아주 축구에 환장해서 사는데. 그거 조금 이상하네요.”

“그래서 화면을 봤더니 박지성 선수가 보이더군요.”

“박지성 선수요?”

연희도 박지성은 아는 모양이다.

“슬로비디오인데, 센터 써클 부근에서 상대방의 공을 가로채고는 그야말로 쏜살처럼 골문을 향해 쇄도했어요.”

“어머, 그래서요?”

“달려드는 상대편 수비수 여섯을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휘날리고는 골키퍼까지 제치더군요. 그리곤 그대로 골이었어요. 경기 종료 30초 전에 결정골을 원맨쇼로 넣은 거예요.”

“정말요?”

“네, 퍼거슨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펄펄 뛰면서 환호하더군요. 무승부로 끝날 경기였거든요.”

“네에.”

연희는 5분 남았는데 동점골이 터졌다면 대부분의 경기가 무승부가 된다는 것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면서 신문을 보니 어제 그 경기가 대서특필되어 있더군요. 박지성은 당연히 MOM이었구요. 평점이 9더군요. 선제골도 어시스트했어요.”

“아! 그랬어요?”

“네, 그 패스도 정말 일품이었어요. 오버헤드킥으로 보내준 걸 루니가 넣었거든요.”

“와, 오버헤드킥이었다면 굉장했겠네요.”

“네, 아무튼 어제 경기의 결과로 박지성 선수의 주가가 확 올라갔어요.”

“근데 박지성 선수가 넣은 그 골이 멋있었어요?”

“폭풍 같은 드리블이었고, 그야말로 그림 같은 볼 컨트롤이었어요. 하지만 그 펍에 있던 훌리건들에겐 악몽이었겠지요.”

“흐음, 나중에라도 동영상을 찾아서 봐야겠네요.”

“네, 아마도 올해의 골이 될 거예요. 정말 멋있었거든요.”

“네에.”

연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작은 공원을 지나쳐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맨체스터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피카딜리 가든에서 안데일 쇼핑거리로 들어서는 마켓 스트리트(Market Street)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영국인들도 많지만 인도인, 중동인, 특히 지나인들이 많았다. 길에서 만난 거의 모든 동양인이 지나인이라고 한다.

뭐 먹고 살판났다고 남의 나라까지 이렇게 많이 왔는지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건물 구경, 풍경 구경, 사람 구경을 하며 길을 가는 동안 상당히 많은 예술인들이 거리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멈춰서 구경을 하곤 깡통에 돈을 넣어주었다.

세 번째 깡통에 넣은 돈도 20유로짜리 지폐였다. 한국 돈으로 약 3만 원이다.

“현수 씨! 보너스 많이 받았나 봐요.”

느닷없는 물음이기에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그냥 1유로 정도면 충분해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도인지 안 것이다.

“아! 네에. 알아요.”

“근데 웬 돈을 그렇게 많이 넣어줘요? 벌써 60유로나 썼어요. 경비 넉넉해요?”

타박하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듯하다. 하여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밤에 카지노에 갔었어요.”

“카지노요?”

“네, 엠파이어 카지노라는 곳엘 갔는데 거기서 돈을 좀 많이 땄어요. 그래서 이 정도는 써도 돼요.”

“대체 얼마를 땄는데 그래요?”

연희는 혼자 여행하느라 저녁만 되면 식사를 하고 곧장 숙소로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혹시라도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펍에도 가보고 싶고, 늦은 밤의 거리도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룸에서 마신 몇 병의 맥주가 전부이다.

현수가 말한 카지노에도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못 가본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돈을 땄다고 하니 궁금해서 물은 것이다.

“어제 제가 심심해서 엠파이어 카지노에…….”

또 한 차례 무용담이 펼쳐졌다. 남은 코인은 다섯 개뿐이니 딱 한 번 게임을 하고 나머진 다른 머신에 넣을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게 코인 세 개를 넣고 버튼을 눌렀다.

그랬더니 중앙에 7 다섯 개가 나란히 줄을 서곤 10분에 걸친 팡파레가 터져 나왔다고 했다.

“어머, 그래서요? 그래서 돈은 얼마나 나왔는데요?”

연희는 수퍼 메가벅스에 대해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돈이 나왔는데 조금 많아요.”

“글쎄, 얼마냐구요.”

“1,215만 2,765유로예요.”

“네? 네에……?”

연희는 흰자위가 많이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1유로당 1,500원씩 잡아도 약 183억 원이란 엄청난 거금이기 때문이다.

“조금 많지요?”

현수는 괜한 자랑을 하는 것 같아 조금 쑥스러웠다. 돈으로 연희의 환심을 사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아공간에 담긴 금은보화의 가치에 비하면 183억 원은 푼돈도 되지 못할 정도가 아니던가!

“그, 그래서 그 돈 다 어떻게 했어요?”

“1,215만 유로는 제 계좌에 입금해 뒀어요. 나머지로 포커 게임을 조금 했는데 거기서도 돈을 좀 땄어요.”

“또요?”

연희는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포커를 해서 돈을 또 땄다는 말에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다.

“네, 그래서 2,765유로가 18,000유로쯤으로 늘어났었어요. 그런데 같이 게임했던 사람들이 전부 잃어서 그중 6,000유로는 개평으로 줬어요.”

“그럼 지금 12,000유로를 가지고 다닌다는 거예요?”

한국 돈으로 1,800만 원이나 되는 돈이기에 물은 것이다.

“네, 이쪽으로 곧장 오느라 은행에 들를 시간이 없었거든요.”

“세상에……!”

연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혼자 돌아다니는 여행객이 그 많은 현금을 들고 있다는 걸 알면 좋지 않은 의도를 지닌 녀석들이 접근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대화를 누군가 들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이 왠지 귀여웠다.

사실 누가 있어 현수에게서 돈을 뺏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12,000유로 가운데 11,000유로는 아공간에 담겨 있다. 7써클 마스터의 아공간에 손을 댈 수 있는 인물은 지구상에 단 하나도 없다.

게다가 현수의 신변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자들도 거의 없다. 바로 곁에서 핵폭탄이 터진다면 혹시 모를까 웬만한 공격은 앱솔루트 배리어에 의해 전부 차단되지 않던가!

“그러니 배고픈 예술가들에게 약간의 선심을 쓰는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안 그래요?”

“그래요. 잘 하셨어요. 하지만 계속해서 그러진 말아요. 관광객을 노리는 소매치기나 강도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알아요. 돈 가진 게 죄라는 걸……. 그나저나 어디 가죠?”

“우선 저녁을 먹어요. 저번엔 제가 샀으니 이번엔 현수 씨가 내요. 돈도 많으니까요.”

“하하, 물론입니다. 뭐든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드십시오.”

“호호, 네에! 오늘 현수 씨 덕에 제 입이 호강하려나 봐요.”

연희는 예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 순간 현수의 뇌리로 불현듯 스치는 상념 하나가 있었다.

오늘 내내 연희는 자신을 현수 씨라 칭했다.

한국에 있을 땐 깍듯하게 김현수 씨라 부르곤 했는데 어느새 성이 빠진 것이다. 이걸 느끼는 순간 현수는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의 전신엔 소름이 돋고 있었다.

진지하게 사귀어 보자는 자신의 청에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을 했지만 만나는 순간부터 이미 허락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연희 씨!”

“네?”

“아, 아니에요.”

현수는 얼른 말끝을 흐렸다.

사람 많은 길바닥 한복판에서 사랑스런 연희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친 때문이다.

얼른 감정을 추스른 현수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음 한구석을 얻은 상황이다. 이런 때 사내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 나머지까지 몽땅 얻어내려는 의도였다.

같은 순간 연희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연희 씨’라는 말 때문이다.

늘 강연희 씨, 아니면 강 대리님이라 부르던 현수가 처음으로 이름만 불렀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여인이 된 기분이 든다.

이때 연희의 뇌리로 평소 애송하던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스쳐 지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현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연희의 고개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져 있었다.

둔감한 현수는 얼버무린 말 대신에 무얼 말할까 생각하는 중이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연희의 마음 대부분을 자신이 얻게 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럴 때 조금 더 확실한 퍼포먼스가 필요하다. 와락 껴안고 진한 키스를 해준다면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순진한 현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현수 씨! 우리 어디로 가죠?”

“그야 모르죠. 전 여기 초행이잖아요. 그러니 연희 씨가 아는 데 있으면 그리로 가요. 될 수 있으면 근사한 데로.”

‘어머, 또 연희라고 했어.’

연희의 두 볼은 볼터치라도 한 듯 붉게 물들었다. 마침 노을이 지고 있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둘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던 중 현대식으로 지어진 대형 건물을 만나게 되었다.

맨체스터 전체에 딱 세 개밖에 없는 오성급 호텔 Rococo Forte Lowry Hotel이다.

“잠깐만요.”

갑자기 연희가 멈춰 서서 가방을 뒤지기 시작한다. 현수는 왜 이러나 싶어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연희가 꺼낸 것은 여행가이드북이다. 서둘러 뒤적거리더니 환한 웃음을 짓는다.

“저 호텔에는 Marco Pierre White’s라는 레스토랑이 있어요. 저기서 파는 햄버거가 세계 최고라고 해요.”

“세계 최고요?”

“네, 스테이크 요리도 일품이라고 해요. 저리로 가요.”

“뭐, 그럽시다.”

레스토랑에선 이전처럼 연희가 주문을 했다. 현수의 외국어 실력이 아직도 자신만 못하다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문을 마치고 술을 하겠느냐는 말에 로마네 콩티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웨이터의 허리가 약간 펴졌다.

움찔한 것이다.

“손님, 로마네 콩티로 준비해 드릴까요?”

“네, 그걸로 한 병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웨이터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간다.

“현수 씨! 로마네 콩티가 뭐예요? 와인 이름 같은데…….”

“맞아요, 와인! 프랑스 브루고뉴 지방의 본느 로마네 마을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예요.”

“어머, 그걸 어찌 다 안대요?”

“연희 씨와 식사할 때 꼭 한 번 마셔보고 싶은 와인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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