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그, 그래요?”
연희가 수줍다는 듯 슬쩍 고개를 숙인다.
“로마네 콩티는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나 콩티 공작 등이 즐겨 마시던 와인이에요. 매년 수천 병밖에 생산하지 않아 매우 귀한 와인이기도 하구요.”
“어머, 그럼 비싼 거 아니에요?”
“조금 비싸요. 하지만 저 돈 많잖아요.”
현수가 싱긋 웃음지어 주자 연희가 알았다는 듯 웃어준다.
화사한 장미 한 송이가 그윽한 향을 뿜어내는 것 같다. 현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고, 물어보는 말에 모두 대답해 주니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웃어주기까지 한다. 황홀한 기분이다.
그렇기에 평상시엔 그리 많지 않던 말이 많아졌다.
“로마네 콩티는 ‘신의 물방울’이라는 일본 만화책에도 등장했던 와인이에요. 30년 이상 숙성된 것은 신주(神酒)라 칭한다더군요.”
“30년이요?”
“네, 그 정도로 오래된 건 2천만 원쯤 한다더군요.”
“네에……? 한 병에 2천만 원이나 해요?”
크게 놀라는 표정 또한 귀여웠다. 남들의 이목이 없다면 콱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이다.
연희의 말대로 스테이크와 햄버거 모두 맛이 일품이었다. 그러는 동안 연희가 영국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들어주었다.
마치 지저귀는 종달새 같은 여인이라는 느낌이다.
문득 아르센 대륙에서의 한 곳이 상상된다.
그곳의 계절은 초여름. 아직은 그리 덥지 않은 시기이다.
멀리서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히 참새나 뻐꾸기는 아니다. 그리고 한 마리도 아니다.
한 쌍의 종달새가 사랑을 속삭이는 듯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쪽엔 그리 깊지 않은 개울물이 졸졸 흘러내린다. 버들치나 송사리 몇 마리쯤이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다.
그 곁의 푸른 풀밭은 새벽에 내린 비로 아직은 촉촉하다. 자세히 보니 클로버와 토끼풀도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위로 하얀 색 토끼 한 마리가 총총걸음으로 움직인다. 녀석의 앞에 붉은 당근 하나가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당근을 흘렸는지 모르는 농부는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축사로 들어가 암소들에게 여물을 준다. 녀석들은 먹을 것이 반갑다는 듯 음메 하며 반긴다.
축사 뒤쪽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연희가 일어난다.
흰색 린넨으로 만든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젖 짜는 일이 힘들었는지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모양이다.
소매로 쓱 닦아내곤 신선한 우유가 담긴 통을 들고 나선다.
밖에서 놀고 있던 개구쟁이 두 녀석이 엄마를 발견하곤 졸졸 따른다. 이제 겨우 다섯 살, 세 살쯤 된 사내 놈들이다.
아이들의 눈에 여물 주던 농부가 뜨이자 환한 미소와 함께 두 팔을 벌리며 달려든다.
형인 듯한 녀석을 번쩍 안아주자, 작은 녀석이 삐쳤다는 듯 앙증맞은 장화 신은 발로 농부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농부는 작은 녀석의 성화에 뒤로 돌아섰다.
그런데 그 농부의 얼굴을 보니 현수였다.
현수는 작은 녀석 또한 번쩍 들고는 몇 바퀴 빙빙 돈다. 아이들의 입에서 기분 좋다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이들을 내려놓고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이 모습을 지켜보던 연희에게 다가간다. 그리곤 입술을 내밀어 키스를 했다. 연희는 품에 안긴 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며칠 전 현수가 손을 본 나무로 만든 담장 위로는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고, 이마를 간질이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집 안에선 다 구워진 쿠키가 달콤한 향을 뿜고 있었다.
“현수 씨!”
“윽……! 왜요?”
행복한 상상 속에 잠겨 있던 현수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난다. 그리곤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희를 번쩍 안아 들고 집에 들어가는 상상을 하려 했던 때문이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밥도 다 먹었으니 이제 카지노에 가요. 저 거기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카지노요?”
“네. 데리고 가주실 거죠?”
“네, 그러죠.”
현수가 연희의 의자를 잡아 빼주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곤 옆 의자에 놓았던 가방을 들었다.
마음 같아선 그것도 들어주고 싶었지만 아직 연희의 마음을 모르기에 현수는 보고만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곧 비가 오려나 봐요.”
“네?”
“이렇게 바람이 불면 조금 있다가 비가 오는 동네거든요.”
“아! 여긴 영국이죠. 근데 우산은 있어요?”
“당연하죠. 언제 비가 올지 몰라 늘 갖고 다녀요. 그런데 현수 씨는요? 우산 없죠?”
“네, 하지만 괜찮아요. 비가 오면 한번 맞아주죠. 영국의 비는 한국의 비와 무엇이 다른지 논문 한 편 쓰려 하거든요.”
“네에? 호호, 호호호!”
같이 등산을 다니는 동안에도 가끔 현수는 연희를 웃겨주었다. 그때의 생각이 났는지 연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 비 오기 전에 갑시다.”
“네에.”
“근데 카지노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요?”
“아뇨, 제가 알 리가 없잖아요.”
“그럼 택시를 탑시다.”
택시를 타고 카지노로 가자는 말에 운전사는 바로 우회전을 한다. 그리곤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붉은색 네온사인으로 카지노라 쓰인 건물 앞에 내려줬다.
Circus Casino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니 도박의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진다. 내부엔 스테이크나 생선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있다.
밖으로 나가지 말고 안에서 해결하라는 뜻일 것이다.
환전을 하곤 슬롯머신 앞으로 갔다. 그리곤 어떻게 하는 건지를 설명해 줬다.
연희는 코인을 밀어 넣고 버튼을 누른 다음 침까지 삼키며 보고 있다. 수박 두 개가 멈추고 마지막 릴이 천천히 돈다.
수박이 보이고 그 위엔 7이 있다.
“수박! 수박! 수박! 에이∼!”
수박에서 멈출 듯하더니 7로 넘어갔다. 그리고 기계는 침묵했다. 또 코인을 넣고 버튼을 누른다. 이번에도 꽝이다.
“쳇! 이거 원래 이렇게 안 되는 거예요?”
세 번째로 코인을 넣고는 버튼을 눌렀다. 릴이 빙빙 돈다. 그러더니 센터에 체리 세 개를 나란히 세웠다.
팅팅팅팅! 팅팅팅팅……!
코인 튀어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 어머! 나 이거 맞았어요. 현수 씨! 이거 봐요.”
호들갑을 떠는 연희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 표정이다.
옆에 앉은 현수는 단 하루 만에 고수가 된 듯 코인을 넣고 버튼을 누르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10여 분쯤 지났을 때 현수의 기계에서도 코인이 쏟아져 나온다. 센터에 2바 세 개가 나란히 놓인 것이다.
팅팅팅팅! 팅팅팅팅! 팅팅팅팅! 팅팅팅팅!
“어머! 그거 되게 좋은 건가 봐요.”
연희는 일희일비하며 게임을 즐겼다. 그런 모습을 보는 현수는 행복했다. 이렇듯 아름답고 착한 여인과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두 시간쯤 지난 후 연희와 현수는 카지노 밖으로 나왔다. 그러는 사이에 블랙잭과 바카라, 그리고 룰렛까지 해보았다.
현수는 120유로를 잃었고, 연희는 200유로를 땄다.
선머슴이 무당잡고, 초짜가 일을 낸다더니 딱 그 짝이다. 하나 행운은 잠시였다.
계속해서 돈을 잃은 연희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엔 룰렛이 있었다. 그녀의 수중에 남은 돈은 6유로뿐이다.
“현수 씨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현수는 룰렛에 관한 설명을 해줬다. 연희는 오늘 날짜가 11일이라면서 6유로 전부 11에 걸었다.
현수도 따라간다면서 3유로를 걸었다.
이 게임에서 돈을 가장 많이 건 사람은 연희였다. 룰렛 매니저가 공을 건네자 연희는 입으로 바람을 훅 불었다.
어떤 영화에서 본 모양이다. 그리곤 매니저가 휠을 돌리는 반대 방향으로 공을 힘껏 밀어냈다.
이 카지노의 룰렛엔 0과 00, 그리고 1∼36까지 숫자가 있다. 다시 말해 11에 가서 공이 멈출 확률은 38분의 1이다.
맞으면 원금 포함하여 서른여섯 배를 배당받는다.
“레드 일레븐! 레드 일레븐!”
연희는 자신이 건 11번에 공이 들어가라고 소리쳤다. 환전했던 돈의 대부분을 잃은 상황이지만 기분은 좋은 상태이다.
물론 현수와 같이 이런 걸 할 수 있어서이다. 그렇기에 한창 돈을 따던 사람처럼 소리를 낸 것이다.
팅, 팅, 팅, 티티팅……!
휠의 회전력이 현저히 떨어지자 공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수는 어찌할까 망설였다.
마법을 쓰면 100% 이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연희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공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
사내라면 환장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저기에 이기기까지 하면 대체 어떤 얼굴일까 싶다.
‘좋아! 이번엔 연희 씨가 이기게 해주지. 대신 딴 만큼 잃어주면 되잖아.’
“휠드 오브 매지션스 마나(Field of Magician’s Mana)!”
마법이 구현되자 눈에 보이지 않는 현수의 마나가 룰렛을 뒤덮었다. 이제부턴 현수의 뜻대로 공이 멈추게 되는 것이다.
공은 계속해서 튕겼다.
사람들은 탄식을 내기도 하도, 두 손을 모아 자신이 건 번호에 멈추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팅팅, 팅! 팅! 팅! 딸그락!
“우와! 현수 씨, 현수 씨! 우와아아!”
현수의 뜻에 따라 공은 레드 일레븐의 구멍 속에 얌전히 자리 잡았다. 그 순간 연희는 두 팔을 벌리며 환호작약한다.
곁에 있던 신사는 연희의 행운을 축하해 주었다.
룰렛 매니저는 연희에겐 216유로, 그리고 현수에겐 108유로를 지불했다. 잃었던 돈을 단번에 만회한 것이다.
“현수 씨, 이제 가요.”
“더 안 하고요?”
“네, 땄을 때 가야죠. 호호, 오늘 기분 너무 좋아요.”
딴 만큼 잃어주려던 현수의 계획은 깨졌다.
밖으로 나오는 동안에도 연희는 레드 일레븐에 공이 들어올 때의 기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온몸의 엔돌핀이 팍팍 돈 모양이다.
“참, 현수 씨 호텔 잡았어요?”
“네, 연희 씨가 묵는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맨체스터 호텔에 잡았어요.”
“네에, 잘하셨어요. 어서 가요. 가서 우리 둘만의 파티를 해요. 오늘 같은 날 안 하면 언제 하겠어요? 그쵸?”
“네? 아, 네에.”
현수는 문득 나쁜 생각을 했다. 호텔방에 단둘이 있는 상상이다. 하나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괜히 불경죄를 저지른 것만 같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우리가 게임하는 동안 비가 왔나 봐요. 이젠 그친 모양인데 걸어갈까요? 아님, 택시를 탈까요?”
“바람도 기분 좋으니 슬슬 걷죠.”
“네에.”
연희가 냉큼 팔짱을 낀다. 불과 수 시간 만에 엄청나게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비가 그친 밤하늘엔 별들이 총총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그러는 내내 연희의 입을 쉬지 않았다. 그간 있었던 소소한 일들까지 낱낱이 이야기한 때문이다.
그렇게 걸어 목적지 인근에 당도했을 때이다.
“어라!”
“왜요? 어머……!”
지나치려던 골목 안쪽에 누군가 있다. 남자 둘 여자 하나이다. 그런데 달빛에 번쩍이는 것이 있다.
칼이다! 길 가던 여자가 강도를 만난 듯하다.
“연희 씬 여기 있어요.”
“현수 씨! 위험해요.”
현수는 만류하려는 연희를 뒤로 하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때 놈들의 나직한 말소리가 들린다.
“이런 썅……! 가진 거 다 내놓으라는데 왜 말을 안 들어?”
“어이, 아가씨! 우리가 몹쓸 짓까지 해야 내놓을 거야?”
“보아하니 일본 아니면 지나인 같은데 우리하고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뭐, 그런 거라면 사양하지 않지. 호오, 그러고 보니 몸매도 좋은데? 안 그러냐?”
“크크, 그렇군. 이쯤 되면 그냥 보내줄 순 없게 된 거지?”
“당연하지. 괜히 횡재한 기분이군.”
“크흐흐흐! 아가씨, 우리 좀 따라와야겠어.”
“아악! 안 돼요! 살려주세요.”
여자의 영어는 몹시 서툴렀다. 보아하니 여자는 놈들이 한 말의 의미도 모르는 듯하다.
다시 말해 현수가 개입하지 않으면 몸을 망칠 수 있다. 그저 강도를 만난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사내 하나가 여자의 뒷덜미를 움켜쥔다.
신장 190㎝쯤 되는 건장한 놈이니 163㎝쯤 되는 가녀린 여자를 제압하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일 것이다.
“크흐흐! 가자. 근데 가는 동안 시끄러울 수 있으니 이년의 입을 막아.”
“좋아! 크크! 이거 물어!”
사내 가운데 하나가 여자의 입에 무언가를 쑤셔 박았다. 주머니 속에 있던 더러운 손수건인 듯하다.
“우우! 우우우우! 우우! 우우우!”
여자가 뭔가 말을 하려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상황이다.
놈들이 여자를 끌고 가려는 순간이다.
“아아! 거기까지……!”
“뭐야?”
“이건 또 뭐하는 놈이야? 어서 썩 꺼지지 못해?”
사내 둘이 돌아서는 순간 현수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맞아서 기절한 듯한 사내의 곁에는 빈 지갑 하나가 떨어져 있다.
여자와 데이트를 하다 강도를 만난 듯하다.
“여자는 내려놓고, 강도질한 돈도 모두 내놔. 그리고 꺼지면 용서해 주지. 만일 그러지 않으면…….”
“않으면 어쩔 건데?”
“그야 두고 보면 알겠지.”
“어이, 해리! 너 이 계집애 잡고 있어.”
둘 가운데 체격이 더 큰 녀석이 주먹을 말아쥐곤 접근했다. 그리곤 대뜸 주먹을 날렸다.
『전능의 팔찌』 제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