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78화 (178/1,307)

# 178

수정이 먼저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항공사 승무원으로서 비행기를 타기 전에 전화를 끊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던 때문이기도 하다.

“흐음, 그랬단 말이지?”

팔베개를 한 채 의자에 기댄 현수는 생각을 정리했다.

지현은 성폭행 당할 위기에 처했었다. 그때 자궁의 마나는 잔뜩 위축된 상태로 정체되어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같은 증상을 보이는 여자가 있다면 임신이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기회가 닿으면 언제고 확인해 볼 일이다.

수정의 경우는 어렸을 적 비행기 안에서 체했던 기억이 뇌리에 남아 비행하는 동안 물을 제외한 어떠한 음식물도 섭취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 기억을 제거하니 그런 증상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외상 후 스트레스로 인한 기억상실로 일곱 살짜리로 되돌아간 지현의 모친 역시 구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려면 마나가 충분해야 하는군.’

수정의 기억을 읽고 삭제할 때 거의 모든 마나가 빨려 나갔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현수는 체내의 마나량을 점검했다.

어제 저녁 산책 삼아 아차산 기슭으로 나갔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마나 심법을 운용했다.

하여 꽉꽉 채워 넣은 그대로이다.

‘흐음, 언제고 시간을 내서 써클 올리기에 힘을 쓰던지 해야지. 이거야 원…….’

7써클 마스터에서 한 단계만 업그레이드되어 8써클 비기너가 되면 체내에 담을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대폭 늘어난다.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일일이 마나량을 점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거의 네 배 가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삐이이익―!

“네, 사장님,”

언제 들어도 상냥한 은정의 음성이다.

“민 실장 좀 들어오라고 하고요. 민 실장 자리로도 인터컴이 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주영이 들어왔다.

“앉아라.”

“그래.”

“신상품 개발을 해보니 어떠냐?”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상품은 많은데 어떤 게 좋을지 골라내기 어렵기 때문이야.”

“하긴 콩고민주공화국과 러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니 적당한 걸 찾기 어려울 거야.”

“필요하다면 출장 보내줄 수 있냐?”

“물론이지. 언제든 말만 해.”

“알았다. 하여간 열심히 찾아볼게.”

“그래, 매달 5천만 달러어치를 수출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 알지? 그러니 잘 부탁한다.”

“알았다. 걱정 마라! 최선을 다할 테니…….”

주영이 나간 후 현수는 또 다시 생각 속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상념이 있어 전화기를 들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리링!

“네, 역삼동 제일부동산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수라는 사람인데요.”

“네, 김현수 고객님!”

부동산 사무실 사장 역시 반색하는 음색이다.

“세정빌딩 어떻게 되었습니까? 알아보셨어요?”

“네, 그렇지 않아도 전화 기다렸습니다. 일단 더 이상의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쪽에 대고 팔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러겠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남은 건 가격이네요.”

“네, 그래서 지금 밀고 당기기를 하는 중입니다.”

“흠, 현재 얼마를 달라고 하는가요?”

“아다시피 세정빌딩은 공시가가 230억이지만 실제론 이보다 높은 가치를 지녔습니다. 대로변은 아니지만 지하철역에서 가깝기 때문이죠. 게다가 유동인구도 엄청 많습니다.”

부동산 사장은 가치를 증명하려는 듯 말이 많았다.

“그래서요?”

현수의 대꾸는 다소 퉁명스러웠다. 구구절절한 이야긴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저쪽에선 260억 정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60억이면 제 능력으론 안 되는군요.”

“알고 있습니다. 250억까지만 가능하다 하셨으니까요.”

부동산 사무소 사장은 어떻게든 이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귀신이 출몰하는 건물을 제값 다 주고 사면 바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거 아시죠?”

“물론 압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론 더 이상의 귀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사장이 말끝을 흐렸다.

“알겠습니다. 당장 급한 건 아니니 조금 더 두고 보죠.”

“네에.”

부동산 사무소 사장의 음성엔 맥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흐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다 이거지?”

현수는 유진기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나직이 이를 갈았다.

세상에 온갖 나쁜 짓을 다하는 놈이 제몫을 모두 챙기겠다고 나서는데 어찌 좌시하겠는가!

이때 은정이 서류철을 들고 들어선다.

“사장님, 안 계신 동안 결재하실 게 이만큼 쌓였네요.”

“한 일주일쯤 자리 비워서 그런지 조금 많군요.”

“네, 킨샤사의 천지약품에서 추가로 주문한 것들이 워낙 다양하고 양도 많아서 그래요.”

밀린 업무를 하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리곤 우선 순위를 정했다.

첫째가 세정빌딩 매입이다. 조만간 대대적인 인력 충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흐음, 금고 안에 있던 것들이 사라졌음에도 별 타격이 없다는 건가?”

그날 유진기의 금고에서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다.

1㎏짜리 골드바 300개 : 약 180억 원.

10,000엔짜리 지폐 뭉치 : 약 14억 8천만 원.

100달러짜리 지폐 뭉치 : 약 5억 7천만 원.

50,000원짜리 지폐 뭉치 : 약 10억 원.

금액으로만 따지면 211억 5천만 원 정도 된다.

이밖에도 조경빈의 머리카락을 수집해 놓은 앨범 외 여섯 권의 앨범이 더 있었다. 또한 200여 권에 달하는 각종 장부가 있었고, 고려청자, 이조백자 등 골동품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스미스&웨슨의 M&P 권총 다섯 자루와 실탄 2,000여 발도 있었다.

실질적 가치를 지닌 골드바 등이 사라졌음에도 유진기는 경찰에 신고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것 자체가 불법행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상당히 큰 금액이 사라졌음에도 세정파는 여전하다. 케이먼 군도에 은닉해 둔 거액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번에 장부를 살피던 중 외국 은행으로 송금된 기록을 본 바 있다. 그렇기에 서둘러 장부들을 꺼냈다.

그리곤 독서삼매경에 빠진 사람처럼 다시 한 번 장부들을 샅샅이 훑었다.

시중 은행에도 차명계좌로 상당히 많은 금액이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조직원들의 가족명의인 듯하다. 이 돈은 현수의 능력으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잔뜩 이맛살을 찌푸린 채 나머지 장부들을 뒤적였다. 그러던 중 케이먼 제도(Cayman Island) ‘율리우스 바에르 은행’이라는 이름이 눈에 뜨였다.

이때부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나머지 부분들을 세세히 살폈다.

“유레카(Eureka)!”

현수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장부 뒤표지 포켓에 끼워진 주황색 포스트잇을 발견한 직후였다.

거기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숫자와 문자가 어우러진 두 장의 포스트잇에 적힌 것은 율리우스 바에르 은행의 비밀계좌와 비밀번호임이 틀림없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우선 케이먼 제도의 은행들은 예금주의 이름 없이 숫자와 문자가 조합된 계좌번호만으로 거래를 한다. 따라서 거래명세서를 분실하더라도 예금주가 드러나는 일이 없다.

은행직원들도 이 계좌번호만으로는 예금주의 신원을 알 수 없다. 극소수 은행 간부들만이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실수로 번호를 잘못 기재하여 송금하면 남의 계좌로 들어가 영영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비밀계좌는 당좌계정으로, 유동성 예금이기 때문에 이자가 붙지 않는다. 1980년 이전까지는 예금자가 보관료를 무는 형태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나머지 장부를 모두 뒤져 보았지만 구좌는 두 개뿐인 것 같다.

장부에 쓰여 있기론 60으로 시작하는 계좌엔 6,000만 달러, 89로 시작하는 계좌엔 5,700만 달러가 예치되어 있다.

한국 돈으로 환산해 보니 1,343억 7,450만원이란 거금이다.

“이놈들은 대체 뭐야?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돈을 챙겼지? 그리고 뭐야? 어디다 아방궁이라도 차릴 셈이었나?”

현수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 돈 가운데 일부는 유진기의 부친인 유국상이 동료들을 배반한 결과 얻은 돈이다.

젊은 시절, 대규모 금괴밀수에 가담했다가 동료들을 죽이고 가져온 금괴가 바탕이 되어 모인 돈이기 때문이다.

“흐음, 이걸 어떻게 찾아온다?”

외국 은행과의 거래를 해본 적이 없기에 현수는 난감했다. 이때부터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방법을 찾기 위함이다.

전액을 국내 봉사단체 등에 기부하는 것을 고려해 보았다. 하지만 기부자가 기부를 철회하면 되돌려 줘야 한다.

따라서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전산이 발달된 시대이기에 웬만한 방법으론 놈들의 돈을 빼돌릴 방법이 없다. 추적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묘안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방법이 먹힐까? 으으음……!”

현수가 고심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어라! 드미트리가? 웬일이지?’

현수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아! 미스터 드미트리!”

“네, 김 사장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덕분에 아주 편한 여행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잠시 의논할 일이 생겼는데 방문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시죠. 편한 시간에 오십시오.”

“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거래가 원만하게 합의되었고, 그 내용대로 진행되는 중이기 때문이다.

“흐음, 대체 무슨 일일까?”

현수의 고심은 그리 길지 못했다.

이은정 실장이 들어온 때문이다.

똑, 똑, 똑―!

“네, 들어오세요.”

“사장님, 이건 대구에서 온 우편물이고요. 이건 할머니 검사 결과예요.”

“그래요? 근데 할머니는 어떠시대요?”

현수는 별뜻 없이 편지와 검사 기록지를 받으며 물은 것이다. 그런데 은정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듯하다.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 된다.

“많이 좋아지셨대요. 병원에선 당뇨 증상이 사라져서 다른 사람 검사한 거 아니냐고 했대요.”

“다행입니다. 좋아지셔서.”

“네에, 모두 사장님 덕분입니다.”

“내 덕은 무슨……. 아무튼 좋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네에. 그럼 전 이만……!”

현수가 편지에 시선을 돌리자 은정이 나간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 사장님…….’

은정의 내심이 어떤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하나 그녀의 몸짓을 보면 대충 짐작은 된다.

사장실 문을 닫고 나간 은정은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살짝 누르고 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왜 심장이 두근거리는지는 은정 자신도 모를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은정 할머니의 검사 기록을 살펴보았다.

공복 혈당 98, 식후 2시간 혈당은 126이다.

모두 정상 범주에 드는 수치이다.

다음은 대구 동부경찰서 최창혁 경사의 검사 기록지이다.

꺼내보니 검사 기록 복사본 외에도 쪽지 하나가 더 있다.

너무도 고마운 김현수 도사님께!

도사님, 안녕하신지요?

먼저 제 생명을 구해주신 점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이들만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면 어찌 살까를 생각해 보니 지금도 너무 고마워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게다가 오랜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까지 낫게 해주셨으니 필설로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릴 수 없어 아쉽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또 고맙습니다.

제 아이들에겐 도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알고만 있고 절대 발설치 말라 하였으니 소문이 나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이야길 듣고 큰 아이는 도사님을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고 늘 고마워하며 살겠다고 합니다.

작은 녀석도 고마운 아저씨라면서 다음에 만나면 꼭 큰절을 올리겠다고 합니다.

아무튼 도사님께서 베푼 은혜 덕에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부터는 남들을 돌아보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작은 지면이기에 도사님이 베푼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군요.

어쨌거나 언제, 어디서든 제가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불러만 주십시오. 분골쇄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도사님을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대구에서 최장혁 올림.

현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편지를 쓴 최 경사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 때문이다.

‘사람은 역시 착하게 살고 봐야 해.’

자신의 마법 덕에 한 사람이 병마로부터 해방된 것에 마음의 위안을 얻은 현수는 검사 기록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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