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내 아들놈, 그거 하나뿐이오. 괘씸하겠지만 원만하게 합의해서 풀려나도록 해주시오.”
“……!”
현수가 대답하지 않자 변의화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감히 국회 부의장이 하는 말을 씹었다 생각한 모양이다.
“아들놈도 잘못을 인정했소. 그러니 합의를 해주시오.”
“아드님 때문에 웨이터 보조가 뇌출혈을 일으켰습니다.”
“그 친구는 이미 합의서에 사인을 해주었소.”
“의원님의 비서 아가씨는요?”
“흐음, 미스 김 역시 합의했소.”
“지출이 많으셨겠습니다.”
노회한 정치인인 변의화가 어찌 현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이제 자네만 합의해 주면 되네. 자넨 다른 이들과 달리 다친 데도 없고 하니 이만 합의해 주게.”
“……!”
현수가 대답하지 않자 변의화가 사무실을 둘러보고는 다시 입을 연다.
“콩고민주공화국 쪽으로 의약품 수출업을 한다고 들었네. 나는 이실리프 무역상사가 더 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네. 나이지리아나 이집트에도 아는 친구들이 좀 있거든.”
“……!”
현수는 대체 무슨 소리를 더 지껄이는지 두고 보겠다는 심사로 대꾸하지 않았다.
“합의만 해주면 회사가 금방 커질 것이네.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곤란해질 수도 있지.”
“곤란해진다니요?”
“사업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탈세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지금 제게 합의를 부탁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면 협박하러 오신 겁니까?”
현수의 어투가 약간 날카롭게 변하자 변의화가 느물느물한 웃음을 짓는다.
“그야, 합의서에 사인을 받기 위해서 왔지. 자, 여기……!”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내 펼친 종이에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현수가 내용을 읽어보았다.
청담동 클럽 제이에서 있었던 폭력사건 당사자 간에 원만하게 합의를 하여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또한 무고죄로 고소한 것을 취하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참 뻔뻔스런 합의서였기에 현수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선 한 줄도 없었던 것이다.
“합의금은 섭섭지 않게 주겠네.”
돈만 있으면 이 세상에 해결되지 않을 일이 없다는 투이다.
“좋습니다. 합의해 드리지요. 그런데 합의금은 얼마를 주실 수 있습니까?”
“내 그럴 줄 알고 준비했네. 자, 여기……!”
변의화가 내민 봉투의 내용물을 꺼내보니 100만 원짜리 자기앞 수표 서른 장이 들어 있다. 3,000만 원이다.
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변의화가 지갑을 꺼낸다. 그리곤 100만 원짜리 수표 열 장을 더 건넸다.
“이제 더 이상은 곤란하네. 그냥 이 정도로 합의해 주게.”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수표를 받아 챙긴 현수가 합의서에 사인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합의서를 챙긴 변의화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아, 난 볼일을 다 보았으니 이만 가겠네.”
변의화가 사장실 문을 열려는 순간 현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얼웨이즈 텔 더 트루스(Always tell the truth)!”
이제 평생토록 내심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며 살게 된 것이다. 아마 더 이상 정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변의화가 나간 후 현수는 주민센터로 이름이 바뀐 동사무소 사회복지과로 전화를 걸었다.
“네에, 사회복지과 길숙희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관내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 사람인데요. 소년소녀 가장을 돕고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 그러세요?”
확실히 반색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성금을 어떻게 전달해 드리면 되죠?”
“주민센터에 직접 내방하셔도 되고, 계신 곳을 알려주시면 저희가 가도 됩니다.”
“그래요? 그럼 조금 있다 방문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참으로 좋은 일 하시는 겁니다.”
현수는 4,000만 원 전액을 기탁했다.
사회복지과 길숙희는 자신이 돈을 받는 수혜자가 아님에도 깊이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현수는 남세스러워 얼른 자리를 떴다.
* * *
“어머! 언제 오셨어요?”
업무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현수가 도착해 있자 지현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곧바로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는데 힘드셨죠? 잠시만요.”
지현은 탕비실로 들어가 시원한 주스를 내왔다.
“토마토 주스예요. 몸에 좋다니 많이 드세요.”
“하하, 네에.”
“잠시만 기다리시면 퇴근해요. 기다려 주실 거죠?”
“당연하죠.”
“기다리시기 지루할 테니 이거 보고 계실래요?”
지현이 건넨 것은 요즘 청소년 문제를 다루는 책이다.
학교 폭력, 일진, 왕따, 빵셔틀, 자살, 가출, 게임 중독 등의 구체적인 사례와 그 원인이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이중 왕따의 경우 720만 초중고 학생 중 약 30만 명이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었다.
뒤를 확인해 보니 법무부 발행이다.
현수는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분노를 느꼈다. 타인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녀석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놈들은 웬만큼 타일러선 말을 듣지 않으니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방금 전에 읽은 내용은 잦은 폭행과 금품 갈취로 인해 한 학생이 자살한 것에 대한 것이다.
죽은 아이의 일기를 확인해 보니 2년 동안 무려 322회나 구타를 당했고, 빼앗긴 돈이 500만 원이 넘는다.
돈이 없다고 하면 매를 맞기에 부모의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매를 맞았고, 한 번에 15,000원쯤 돈을 빼앗긴 것이다.
배움의 터전이 되어야 할 학교가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기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가해자는 반성하지 않고 있다. 학교에선 다른 학교로 전학가길 종용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학생인권조례라는 것 때문에 교사는 이런 학생들에게도 체벌을 가할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알기에 교사에게 대드는 녀석들이 많은 세상이다.
‘이런 놈들은 어떻게 해야 말을 들을까?’
현수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5장 용서할 수 없는 놈
마법을 써서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입히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지은 죄에 대한 징벌 효과는 없다. 반성이나 보상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결방법은 다른 아이들에게 가한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하는 것이다. 페인 리플렉스 마법 정도면 될 것이다.
여기에 상대가 입을 정신적 상처를 고려하여 정신을 서서히 붕괴시키는 멘탈 브레이크다운(Mental Breakdown) 마법을 병용하면 충분한 처벌이 될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고도 전혀 반성치 않는 녀석들에겐 세상사는 게 지옥으로 느껴질 마법이 있다.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을 일으키는 컴플렉스 리저널 페인 신드롬(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 마법이 그것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현수가 전국의 못된 놈들을 처벌하러 다닐 수는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이 시간에도 매를 맞는 학생, 돈을 빼앗기는 학생이 있을 것이다.
현수는 분노가 해일처럼 치밀었기에 얼른 책을 덮었다.
계속 읽었다간 모든 일을 때려치우고 학교 폭력을 일삼는 놈들을 잡으러 다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업무 때문에 바쁘게 오가던 지현이 웃음 띤 얼굴로 다가온다.
“벌써 다 보신 건 아닐 거고, 읽어보니 화가 나는 거죠?”
“네, 아직 어린놈들인데 하는 짓을 보면 이건 조폭이나 다를 바 없네요.”
“어떤 면에서 보면 조폭보다도 더 잔인하고 악랄해요.”
“맞아요. 더 집요하기도 한 것 같군요. 그런데 만 열네 살이 안 되면 형사법상 성인이 아니라 처벌하는 게 경미하다면서요?”
“네. 그래서 형사처벌 연령을 만 12세로 낮춰야 한다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어요.”
“흐으음……!”
“지금 우리 지청에도 청소년 폭력으로 인해 자살한 학생 건이 하나 있어요. 죽은 아이를 얼마나 때렸는지 온몸이 멍투성이라 하더군요. 돈도 많이 빼앗겼고요.”
“때린 놈들은 누군데요?”
“중학교 2학년짜리예요. 근데 만으로 14세가 되지 않아 형사처벌은 불가능하고 소년법 적용 대상이에요.”
“기껏해야 소년원 송치가 다겠군요.”
“네, 근데 그놈을 조사해 보니까 별의별 나쁜 짓을 다했더군요. 여학생 성폭행 건만 열세 건이에요. 그것도 전부 단체로 그랬더군요. 그런데 조금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어요.”
“대체 어떻게 생긴 놈인지 한번 보고 싶군요.”
보기만 하면 두개골이 박살 날 정도로 갈기고 싶은 마음에 뱉은 말이다.
“보는 거야 어렵지 않죠. 아시죠? 저번에 고인철과 고진철 형제 사건을 맡았던 곽호 검사님이요.”
“아! 그분이요? 알죠.”
“곽 검사님이 그 사건 담당이에요. 그러니 가면서 슬쩍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이따 갈 때 한번 보게 해주세요.”
“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끝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현이 서류 작성을 하는 동안 현수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방금 말했던 놈에게 가할 마법을 확인한 것이다. 들어보니 아주 악질인 녀석이다.
이런 녀석에겐 이 세상 어떤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복합부위 통증증후군 유발 마법 정도가 딱일 것이다.
여기에 토탈 블라인드 마법을 중첩시킬 생각이다. 앞이 안 보이면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1∼2년쯤 어둠 속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고 나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때 봐서 마법을 해제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다.
“다 되었어요. 이제 가요.”
“네에.”
지현이 생긋 미소 지으며 앞서서 걷는다. 향긋한 화장품 냄새가 난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이다.
기억해 보니 선물했던 듀 닥터 냄새이다. 현수는 괜스레 웃음이 지어졌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곽호 검사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난번과는 차원이 다른 반김이다.
“하하, 네에. 여전하시네요. 바쁘시죠?”
“바쁘긴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아, 우리 권 사무관님하고 데이트하러 오셨구나?”
“네……? 데이트요?”
“두 사람 아주 잘 어울려요. 완전한 선남선녀입니다.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후딱 결혼하세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하기 힘든 말이었다. 현수가 뭐라 대답할 수 없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지현이 얼른 끼어든다.
“곽 검사님, 그 말썽쟁이 꼬마 어디 있어요?”
“말썽쟁이? 아! 그 골치 아픈 녀석이요? 그놈 꼬마가 아닙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한 짓을 보면 아주 악질이에요.”
늘 범죄자를 잡아들여 수사하는 검사의 입에서 악질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면 어떤 녀석인지 뻔하다.
“이제 재판만 남은 거죠?”
“아뇨, 그놈 저질러 놓은 짓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계속해서 수사 중입니다.”
“아……! 그렇구나.”
지현과 곽호가 하는 이야기를 듣던 현수는 화제의 장본인이 취조실에서 조사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여 슬쩍 끼어들었다.
“곽 검사님, 어떻게 생긴 놈인지 얼굴 좀 보여주세요. 괜히 궁금하네요.”
“뭐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취조실로 가려던 참이었으니까요. 그럼 지금 가볼까요?”
잠시 후 현수는 유리창 너머에서 조사받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조사받는 태도가 가관이다.
전혀 긴장한 빛 없이 묻는 말에 건성건성 대답한다. 한 눈에 보기에도 싸가지없게 생겼다.
곽 검사가 버튼을 누르자 안에서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날 그 여학생을 어떻게 했어?”
“어떻게 하긴요? 하도 말을 안 들어서 몇 대 때렸죠. 그 과정에서 치마가 올라가더라고요. 그래서 덮쳤죠.”
“성폭행을 했다는 거지? 그게 다야?”
“아뇨. 쫄따구 시켜서 그 장면을 다 찍었죠.”
“그래서? 그건 어떻게 했는데?”
“그걸로 약점 잡아 돈도 좀 뺏었죠.”
“얼마나?”
“한 넉 달……? 250만 원쯤 빼앗은 거 같네요. 재수없게 잡히지만 않았어도 더 뺏을 수 있었을 건데…….”
“뭐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그까짓 걸 가지고 뭐요. 그년 산다는 사람만 나타나면 확 팔아버리려고 했는데……. 쓰벌, 재수가 없어서……!”
정말 뻔뻔스럽기 이를 데 없는 놈이다. 현수는 양심이라곤 손톱 끝만큼도 없는 녀석이란 판단을 내렸다.
남이야 고통을 겪든 말든 내 몸 하나만 좋으면 된다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이기도 하다.
분노한 현수의 입술이 아무도 모르게 달싹였다.
“마나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느끼게 하라. 컴플렉스 리저널 페인 신드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