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모두들 좋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야흐로 아르센 대륙에 라면 중독자들이 생기는 현장이었다.
이날 첫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현수에게 치료를 받았던 테일러가 죽은 것이다.
아픈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있어 절대 죽어선 안 된다던 그가 오우거에 의해 죽었다.
그 시각, 로렌스는 또 다른 오우거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현수 역시 오우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는 대부분 단독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꺼번에 다섯 마리나 덤벼들었다.
B급 한 명에 C급 아홉 명이 오우거 다섯 마리와 조우한 것이다.
같은 시각, 후속 행렬은 언덕 아래에서 힘겹게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고 있었다.
처음 오우거가 나타났을 때 현수는 덩치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작은 놈이 6m쯤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놈은 7m에 육박했다.
무엇 때문인지 이들은 척후팀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공격을 가했다. 길이가 적어도 10m는 될 나무를 뽑아 들고는 광란하듯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가장 선두에 있던 테일러가 당했다. 놀란 나머지 몸이 굳었던 탓이다. 현수는 후미에 있었기에 돕고 자시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손 쓸 틈 없이 당한 것이다.
이후 겨우 아홉 명이 다섯 마리나 되는 오우거를 상대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C급 용병 100명은 있어야 간신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놈들의 공격이 개시되자 경험 많은 B급 용병 로렌스는 자신을 공격하는 오우거를 숲으로 유인했다.
오우거는 너무 울창한 수림 때문에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했다. 반면 로렌스는 나무들 틈으로 요리조리 빠지면서 놈들의 공격을 차단했다.
오우거를 처치할 수는 없어도 빠른 몸놀림과 유효적절한 대처로 자신의 몸 하나를 간신히 유지한 것이다.
숲이 없었다면 아마 로렌스 역시 죽었을 것이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네 마리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7m짜리는 현수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하지만 방패에 인챈트된 오토 배리어 덕분에 공격 대부분을 무효화했다.
그렇지만 워낙 덩치가 차이 나기에 수세에 몰려 피하기에 바빴다. 물론 반격을 가해 상당히 많은 상처를 입히긴 했다.
그래도 크리티컬 데미지를 주지는 못했다.
마법은 7써클 마스터이지만 검법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 정도의 실력이다. 하지만 현재는 C급 용병일 뿐이기 때문이다.
테일러가 죽지 않았다면 현수는 마법을 써서 몰살시켰을 것이다. 하나 이미 당한 후이기에 검만 뽑아 든 것이다.
아무튼 세 마리는 나머지 일곱이 감당했다.
이것 역시 말도 안 되지만 지형적인 이점과 목숨을 걸고 동료를 구하려던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오우거 한 마리를 제거하기 위해선 C급 용병 스무 명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우거 세 마리가 겨우 일곱 명을 공격한 것이다.
만일 랄프와 동료 용병들이 늦게 도착했다면 이들 일곱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 전에 현수의 마법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결국 용병 전부가 투입되어 세 마리를 죽였다. 나머지 두 마리는 본능적으로 열세를 느꼈는지 숲 속으로 도주했다.
오우거가 물러간 후 일행은 테일러의 무덤을 만들었다.
땅을 조금 파고 시신을 놓은 다음 흙을 덮고 그 위에 어른 머리통만 한 돌들을 올려놓는 것이 전부이다.
행렬은 곧장 출발했다. 숲속에서의 야영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행렬이 야영할 만한 곳을 찾은 것은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저녁 식사는 딱딱한 빵 한 조각으로 끝났다. 며칠 동안 호식을 해서 그런지 유난히 투덜거리는 소리가 많았다.
“팀장님! 오늘 테일러가 죽었는데 아무도 그를 추모하지 않는군요.”
“죽은 이를 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잖아. 죽은 사람은 이미 죽었고, 그를 이야기하면 산 사람만 슬프잖아.”
“그래도 어제까지 고통을 분담했던 동료였잖아요.”
“그런데 지금 곁에 없어. 앞으로도 영원히……! 죽은 건 죽은 거야. 용병은 그런 거에 연연해하면 안 되네.”
“그래도…….”
현수는 배낭에서 하모니카를 꺼냈다. 그리곤 우울한 분위기를 내는 노래를 연주했다.
클레멘타인(Clementine)이라는 곡이다.
애절하고 슬픈 분위기가 고요한 숲을 더욱 고요하게 했다.
하모니카를 입에서 떼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묻는다.
“이보게, 그 노래 가사가 있나?”
“있죠.”
“불러줄 수 있겠나?”
“그러죠.”
현수는 나직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넓고 넓은 이 숲속에, 나의 친구 어디 갔나?
병든 아내, 어린 아들, 남겨두고 죽었다네.
내 친구야, 내 친구야! 나의 친구 테일러여.
같이 웃던 나를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현수의 노래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한 번 더 불러주게.”
“그러죠.”
현수는 계속해서 세 번이나 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누군가 기억력 좋은 자가 있는 듯하다.
현수가 불렀던 노래를 그대로 외워서 부른다. 몇 번 반복되는 사이에 모두들 곡조와 가사를 외운 듯 따라 불렀다.
현수는 같이 웃던 동료를 잃은 슬픔을 절감하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는 글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숲마다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쉴 만하면 또 다른 몬스터들의 공격이 있었다.
밤에도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살펴야 했다. 아흐레가 되는 날엔 한밤중 오크들의 급습을 받아 세 명이나 죽었다.
이후엔 하루에 두 번 있던 식사가 한 번으로, 그것도 딱딱한 빵으로 바뀌었다.
음식을 만들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현수는 복합 상처 치료제와 소독약, 그리고 붕대와 진통제, 항생제 등을 아끼지 않았다.
안 그랬다면 상처가 화농되어 여럿이 고생했을 것이다.
이십삼 일째 되는 날.
일행은 더 이상 숲이 보이지 않는 곳에 당도했다. 광대한 캐러나데 사막이 시작되는 곳에 당도한 것이다.
“드디어 캐러나데 사막이군.”
“그러게, 이 지겨운 사막을 또 건너가야 하다니. 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라 맹세했건만.”
“그깟 맹세가 무슨……. 목구멍이 포도청이면 백 번이라도 와야 하지 않겠는가?”
“맞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이곳에 또 온 것이네.”
“자……! 모두들 들어라. 우리는 드디어 악명 높은 캐러나데 사막 앞에 당도했다.”
언제나처럼 랄프가 한마디 하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이제 팀 편성을 새롭게 한다. 각팀 팀장은 지금과 같이 B급 용병들이 맡는다. 나는 총괄 지휘하겠다. 남은 인원들은 제비뽑기를 하여 팀을 정한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테일러를 비롯하여 여덟 명이 죽었다. 모두 현수가 손을 쓸 틈 없는 죽음이었다.
숲속에서 만난 던전 때문이다.
랄프는 시간이 없으니 그냥 가자고 했다. 그런데 늘 그렇듯 말을 안 듣는 이들이 있다.
잠시만 쉬었다 가자 해놓고 몰래 던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죽었다. 입구의 함정에 빠져 죽은 이가 둘이다.
둘은 위에서 떨어진 쇠창살에 꽂혀 죽었다. 나머지 셋은 무시무시한 염산 용액에 녹아서 죽었다.
결국 용병은 42명만 남았다.
A급 랄프와 B급 용병 4명을 빼고 나면 37명이다.
현수는 식사 당번이라 팀 배정에서 제외되었다. 하여 각 팀은 팀장 포함 열 명씩이다.
마차 행렬의 전후좌우에 각기 한 팀이 있기로 했다. 사방이 훤히 보이는 사막이기에 척후팀이 해체된 것이다.
선두에서 총괄지휘를 하는 랄프와 각팀 팀장들의 목엔 호각이 하나씩 걸려 있다.
현수가 준 것이다. 위기가 닥치면 고함을 지르는데 잘 안 들릴 때가 있다. 하나 호각의 날카로운 소리는 멀리까지 전해지기에 팀장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마차 지붕에 타기로 했다.
나후엘 자작가의 시종이 직접 랄프에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작가의 음식도 만들어줄 현수이기에 임무에서 배제시켜 달라는 것이다.
현수는 용병에서 요리사로 바뀌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런데 마차 안에 환자가 있는데 그 환자를 위해 그렇게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마음 약한 현수가 어찌 이를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하여 열두 대의 마차 가운데 열 번째 마차, 즉 식재료가 든 마차의 지붕에 올라타서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사막에서의 첫날은 별 문제가 없었다.
샌드 웜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모두가 숨죽이고 있자 한참 만에 물러난 것이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저녁 식사는 콩 통조림이 주원료였다.
붉은색 케찹 소스에 익힌 콩이 들어 있는 통조림 수십 개를 땄다. 그리고 스팸 깡통 또한 여러 개 깠다.
물을 붓고 케찹 소스 속의 콩들을 넣었다. 그리곤 스팸 잘게 썬 것들을 넣고 긴 주걱으로 휘저었다.
눌러붙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용병들은 그 부드러운 맛에 환장을 했다.
쫀득쫀득한 고기 씹는 맛과 입안에서 부드럽게 뭉개지는 콩만으로도 환상적이다. 여기에 은은히 풍기는 케찹 소스의 풍미가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다.
‘역시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맛인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친 현수는 여느 날처럼 칭찬을 들었다.
“이보게, 하인스!”
“네, 대장님!”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잃은 여덟 명의 용병들을 추념하고 싶네. 전에 연주했던 그 악기를 꺼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노래를 연주해 주겠는가?”
“그러지요.”
하모니카를 꺼내 클레멘타인을 구슬프게 연주하는 동안 용병들은 현수가 개사한 노래를 불렀다.
테일러부터 시작하여 죽은 용병들의 이름이 차례로 들어가 노래는 여덟 번이나 반복되었다.
클레멘타인이 이곳에서는 고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일종의 장송곡이 된 것이다.
그간 먼저 간 동료들을 추모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고된 여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 축 늘어져 있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 때문이다. 몹시 우울한 분위기이다. 어찌 이를 두고만 보겠는가!
“제가 분위기 전환용으로 신나는 곡 하나 더 연주할까요?”
“그래주면 고맙지.”
이번에 연주한 노래는 어린아이들도 아는 ‘루돌프 사슴코’라는 캐럴이다. 짧으면서도 경쾌한 곡이 거푸 연주되자 침울했던 분위기가 나아지는 듯하다.
그중 누군가가 묻는다.
“이보게, 그것도 가사가 있는 곡인가?”
“물론이죠.”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겠나?”
“왜 안 되겠습니까? 자아, 잘 들어보세요.”
현수는 즉석에서 개사를 했다. 분위기 쇄신용이니 웃기는 가사를 붙인 것이다.
드래곤 제니스는 방귀 냄새 지독해!
누구든 그를 보면 얼른얼른 도망가.
다른 모든 드래곤 놀려대며 웃었네!
가엾은 저 제니스 외톨이가 되었다네.
안개 낀 그 어느 날, 친구 말하길
제니스는 방귀쟁이, 냄새가 넘 지독해!
그후로 모든 드래곤 제니스를 피했다네.
제니스의 방귀는 길이길이 기억되리.
현수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용병들은 배꼽을 잡고 뒤집어졌다. 그리곤 가사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못 가르쳐 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몇 번 선창을 하니 쉽게 따라 부른다. 하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부르는 노래이다.
밤이 깊도록 제니스는 방귀쟁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같은 시각.
캐러나데 사막으로부터 1,200㎞ 떨어져 있는 깊은 산속 거대한 동굴 안에서 귀를 긁적이는 존재가 있다.
에이션트급 골드 드래곤 제니스이다.
“에이, 귀가 간지러워서 잠도 못 자겠네. 어떤 놈들이 내 얘기 하는 거야?”
헤츨링 때부터 사고란 사고는 다 치면서 살아온 제니스의 정식 이름은 제니스케리안이다.
하나 드래곤 로드는 그 이름의 절반만 부른다.
어린 시절부터 제니스케리안이 사고를 치면 그 뒷수습은 늘 쌍둥이인 옥시온케리안이 해야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고치는 횟수가 많아졌고 규모가 커졌다.
골치 아팠지만 어쩌겠는가! 쌍둥이이기에 자신이라도 처리하지 않으면 의심받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드래곤 로드가 되었다.
취임 후 첫말은 제니스케리안은 케리안 집안의 창피이므로 앞으로는 이름의 절반만 부르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드래곤들도 제니스라 부른다.
제니스가 저지른 멍청한 짓의 백미는 499년 전 가이아 신전에 똥을 싼 것이다. 그것도 폴리모프를 풀고 본체로 돌아간 상태에서 쌌다.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이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취중에 저지른 짓이다.
당시의 드래곤 로드는 노발대발했다.
그리곤 말썽을 일으킨 제니스의 족속인 골드 드래곤들로 하여금 500년간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했다.
그러다 쌍둥이인 옥시온케리안이 로드 직을 물려받았다. 그와 동시에 옥시온케리안에게 내려졌던 금제는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