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92화 (192/1,307)

# 192

쭈우우욱―!

“야! 이 자식아! 너… 네가 감히 내 엉덩이를……. 으으윽!”

퉤에―! 퉤에. 퉤에!

서너 번 빨아내니 확연히 선홍빛 선혈이 흘러나온다. 코를 가까이 하여 냄새를 맡아보았다.

비릿한 혈향 속에서 비슷한 비린내를 내는 독을 구별해 내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 괜찮은 듯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독을 모두 빼냈다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현수는 확인 차원에서 상처를 쥐어짰다.

그리곤 알콜 묻힌 탈지면으로 상처 부위를 닦아냈다. 다음엔 마데카솔을 바르고 크기가 조금 큰 밴드를 붙였다.

그러는 동안 줄리앙은 아무런 말이 없다.

고통 때문이나 창피함 때문이 아니다. 우연히 현수가 뱉어놓은 독혈을 본 때문이다.

양을 보니 제법 많이 빨았던 모양이다. 풍기는 냄새가 고약한데 저걸 어찌 입으로 빨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나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다 큰 처녀의 엉덩이를 사내가 빨았다. 엉덩이를 모두 보았을 것이다. 아울러 손으로 만지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상처를 치유시키려는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사실 현수가 빨아낸 곳은 엉덩이 한복판이 아니다.

그럼에도 줄리앙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쪽의 감각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하여 허리 약간 아래쪽에 붙인 밴드가 현재 엉덩이 한복판에 붙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제 괜찮을 거야. 의식도 돌아왔고, 이제 독혈도 안 나와. 그러니 조금 쉬어. 그럼 나아질 거야.”

“……!”

“근데 말이야, 네 엉덩이 꽤 찰지더군.”

“……!”

“그래도 가끔은 목욕 좀 해라.”

말을 마친 현수가 밖으로 나가가 줄리앙의 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마지막 말 때문이다.

더럽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혹시 냄새가 났다는 뜻일 수도 있다. 시집도 안 간 처녀로서 어찌 바르르 떨지 않겠는가!

“이익! 저 자식을……!”

줄리앙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 다가온 때문이다. 서둘러 흘러내린 상의를 끌어내렸다.

“하인스……! 줄리앙은 어때?”

용병대장인 랄프의 음성이었다.

“다행히 위기는 넘긴 것 같아요. 그나저나 엄청 춥군요.”

“그래. 땔감을 구해보려 했는데 이 근처엔 아무것도 없어. 할 수 없이 마차를 뜯어냈네.”

“그랬군요.”

여기저기 피워져 있는 모닥불을 본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거라도 없었다면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을 것이다.

“줄리앙이 있는 곳은 어때? 장작 좀 줄까?”

“저긴 바람이 덜 들어와서 조금 덜 해요. 하지만 춥기는 하죠. 하나 불을 땔 수 없어요. 저거 다 탈 테니까요.”

현수는 용병들의 피풍으로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것을 가리켰다.

“그렇겠군. 그래도 좀 추울 텐데.”

“숯이나 좀 가져다 놓으면 될 거예요.”

“숯……? 그게 뭔가?”

“그런 게 있어요. 그건 제가 챙길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그건 알아서 해. 그나저나 큰일이야.”

랄프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말은 모두 도망갔다. 하나 나후엘 자작가가 있는 율리안 영지까지 가야 하는 호송 임무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가는 동안 디오나니아의 열매도 구해야 하고, 쏘러리스의 간도 구해야 한다.

“그래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거는 가지고 가야지요.”

“그렇긴 해. 그런데 어떻게 이 사막을……?”

“남북으로는 긴데 동서로는 폭이 넓지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가다보면 끝이 나겠지요.”

“그렇긴 해도 물도 그렇고, 식량도 그렇고, 장비도 꽤 많이 버려야 해.”

쏘러리스는 검으로는 잡을 수 없는 몬스터다.

너무 빠르기 때문에 잡으려다간 거꾸로 당하게 된다. 하여 놈을 잡을 포획망이랄지 기타 등등을 가져왔다.

그런데 모두 버리고 가야 한다. 말이 없으니 맨몸으로 가야 하는데 그 많은 걸 지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우린 용병이잖아요.”

“하긴……. 그래, 우린 용병이지.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용병. 죽을지 뻔히 알면서도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칼을 빼 드는 용병이지.”

랄프의 표정이 어둡다. 자조 섞인 표정인 것이다.

하지만 현수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하긴 대단한 마법사이니 어떤 곳에 있어도 충분히 헤어나올 능력이 있다.

그러니 이 정도에 좌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신 좋은 술 많이 먹고, 남들 못 가보는 온갖 곳을 다 가보는 호사는 누리잖아요.”

“그래. 용병은 그렇지. 그래……! 근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용병인 게 싫다.”

“조금 쉬시면 나아질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자고 나면 어떻게든 하게 되겠지.”

돌아서서 걷는 랄프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축 늘어진 채 비틀비틀거리며 늦은 밤거리를 걷는 대한민국의 가장들 모습과 비슷하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군에 입대하기 전 모처럼 친구들과 술 한잔 마시고 늦은 귀가를 하던 날이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가는데 누군가 앞서간다.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축 늘어진 어깨, 비틀거리는 발걸음. 콧노랜지 뭔지 알 수 없는 것을 흥얼거리면서 걷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들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으로 알았던 것은 아버지의 푸념이었다.

가족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직장에서의 어려움, 살아가는 동안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짐들,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푸념 섞어 중얼거리고 계셨다.

도무지 밝아 보이지 않는 미래에 아버진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데 직업도 없이 알바만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신 듯하다. 그런 아들이 사회에 나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지 그것도 걱정하셨다.

자식 키우느라 정작 본인의 노후는 조금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암담한 미래가 곧 도래하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다.

그게 아버지를 힘들게 했나 보다. 잘 드시지도 않던 술을 만취할 때까지 마시고 비틀거리며 귀가 중이셨다.

현수는 지름길로 먼저 집에 들어갔다. 얼마 후,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오는 길에 기분 좋아 샀다면서 바나나 한 송이를 꺼내 들었다. 언제 축 늘어진 어깨로 비틀거렸느냐는 듯 환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 귀한 부인, 우리 착한 아들이라 하셨다.

그날 현수는 밤새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의 어려움을 전혀 생각지 않고 살아왔던 시절이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중학생 때엔 남들 다 가진 핸드폰 사달라고 떼를 썼다.

비싼 브랜드 청바지, 브랜드 운동화를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교복도 공동구매는 싫다고 했고, 겨울이 되면 비싼 오리털 파카를 사달라고 땡깡을 피웠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등한시했다.

그 모든 게 아버지의 어깨에 쌓이는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하여 눈물 흘리며 후회한 것이다.

지금 랄프의 뒷모습이 그렇다. 오는 동안 들은 이야기론 랄프에게도 부인과 아들들이 있다.

작은 아들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신음하는 중이라 한다.

신관에게 데려가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기만 하면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한다.

문제는 돈이다. 신관들의 치료를 받으려면 엄청난 돈을 갖다 바쳐야 한다고 한다. 그 돈을 마련키 위해 이번 호송 임무의 대장 직을 맡은 것이다.

나후엘 자작가는 식솔들이 무사히 영지에 도착해야 보수를 준다고 했다. 다시 말해 임무가 끝나야 돈을 받는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몬스터를 만나 꼭 필요한 짐을 버리고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장비 대부분을 버리고 가야 하는 이번 임무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올 것이다.

현수는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러리라 마음먹었다. 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가 연상되어 그런 것이다.

“좀 어때? 괜찮아졌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프진 않아.”

줄리앙의 음성엔 독기가 빠져 있었다.

“다행이군. 근데 조금 춥지?”

“조금이 아니라 많이 추워…….”

어두웠지만 입술이 파란 것 같다. 말할 때마다 입김이 나는데 얇은 천 조각 하나 깔고 있으니 왜 안 춥겠는가!

“나뭇조각 주워다 불 좀 피울까?”

“그래주면 좋지만 여긴 불을 피우면 안 되잖아.”

얼기설기 엮어놓은 것들은 불길만 닿으면 바로 타오를 것이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걸치기에 겉에 기름을 먹여놓은 까닭이다.

“그럼 어떻게 해? 좀 안아줄까?”

“엉큼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지?”

“이 상황에……? 나도 좀 추워서 그래.”

“그래도 안 돼.”

줄리앙은 몹시 추워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짐짓 의연한 척했다. 괜스레 현수에게 얕잡혀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 사막의 추위를 어찌 맨몸으로 감당하랴!

현수가 재 속에서 숯을 찾아 가져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뿐이었다.

새벽이 되자 둘은 서로의 등을 댄 채 웅크리고 있었다. 줄리앙이 맨 정신이기에 온찜질팩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주 안지 않은 것은 냄새 때문이다. 현수가 견디기엔 그녀에게서 너무 역한 냄새가 풍겼다. 하여 등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자 바람이 잦아든다. 아울러 추위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하다.

“잠을 잘 잤어? 몸은 어때?”

“자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몸은 조금 나아진 듯합니다.”

줄리앙의 대답을 들으며 랄프는 현수를 바라본다. 치료한 사람으로서 줄리앙의 용태에 대한 설명을 바라는 것이다.

“다리 때문에도 그렇고, 스콜론의 독 때문에도 줄리앙은 오늘 걸을 수 없습니다.”

“내 생각도 그랬어. 그럼 예서 며칠이나 머물러야 해?”

“한 사흘쯤……. 샌드 웜들은 물러갔습니까?”

“아니, 놈들도 밤새 이 근처에 있었나 봐.”

“그렇군요.”

“낮엔 마차나 끌어당기지 뭐.”

“그래야겠군요.”

갈고리를 던져 마차를 끌어당겨도 샌드 웜들은 솟아오르지 않았다. 걷는 소리와 끄는 소리가 내는 진동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을 부탁해도 되겠는가? 물이 부족해서 어렵겠지?”

“일단 식재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맙네.”

랄프는 줄리앙에게 눈짓으로 몸조리 잘하라는 신호를 하곤 현수의 뒤를 따라 나왔다.

“독하지?”

“네에……? 무슨 말씀이신지……?”

“줄리앙 말이야. 어떤 때 보면 독기로 뭉쳐진 것 같아.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것도 어쩌면 그 독기 때문인지도 몰라.”

“무슨 말씀이신지요?”

현수의 물음에 랄프는 딴 소리를 한다.

“줄리앙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지?”

“그걸 제가 어떻게……?”

“B급 용병 하시쿤이야. 덩치가 산만 해도 머리 좋고, 아주 빠른 용병이지. 줄리앙은 아빠에게서 검술을 배웠어. 근데 지금은 하시쿤이 줄리앙을 못 이겨.”

현수는 랄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줄리앙이 어렸을 때 하시쿤의 마누라, 그러니까 줄리앙의 모친에게 어떤 귀족이 못된 짓을 했어. 제법 예뻤거든. 줄리앙이 그녀를 닮아서 얼굴이 괜찮은 거야.”

“……!”

“그 귀족놈을 찾아 죽이겠다고 아빠를 졸라 검법을 배웠어. 그리곤 용병이 되었지. 한데 아직 그 귀족을 못 찾았어.”

“그래서요?”

“그래서 의뢰되는 모든 임무를 맡아. 언제 어디서 그놈을 만날지 모르니까. 몹시 피곤하고 힘들 텐데 내색하는 법이 없어, 줄리앙은……! 모르긴 몰라도 독기가 그걸 버티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다.”

“네에.”

“그런데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아침엔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나저나 오늘 아침 메뉴는 생각해 보았나?”

“대강은……. 가급적 물이 덜 들어가는 걸로 구상 중입니다.”

“부탁하네.”

반쯤 부서진 식재료 마차에 당도한 랄프는 현수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곤 암석지대 외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선 새벽부터 갈고리를 이용한 낚시질을 한 사내가 있다. 로렌스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검을 떼어놓고 왔는데 그걸 건져 올리겠다고 계속 갈고리를 던지는 중이다.

‘오늘 아침 메뉴는… 빵으로 해야지. 오랜만에 곰보빵을 만들어볼까? 아님, 바게트?’

이곳의 곡물가루는 매우 거칠다. 한국의 그것처럼 곱게 가루 낼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현수는 모두가 맡은 임무를 처리하기 위해 바쁘게 오가는 동안 슬쩍슬쩍 아공간의 식재료들을 덜어냈다.

그리곤 소보로를 만들었다. 식재료도 변변치 않은데 너무 잘난 놈을 만들어놓으면 문제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꺼낸 재료가 강력분, 박력분, 이스트, 설탕, 소금, 달걀, 생크림, 버터, 물엿, 물이다. 반죽을 한 뒤 슬쩍 패스트 타임 마법을 걸어 순식간에 발효를 시켰다.

오븐이 없기에 조잡하지만 임시 오븐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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