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95화 (195/1,307)

# 195

현수는 장부를 샅샅이 살폈지만 어디에서 밀매가 이루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거래 장소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매번 장소를 바꾸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영악한 자식!”

유진기가 주관하는 세정파가 괜히 서울 강남 지역의 노른자를 차지한 것은 아닌 것이다.

현수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30억 원 정도는 있어야 한다. 지금껏 거래한 금액 규모로 추산한 것이다.

다섯 배 장사이니 무사히 들여오기만 하면 120억은 버는 알토란같은 사업이다. 물론 세정파 입장이다.

물론 이 돈이 없으면 문제가 된다. 상대로부터 신용을 의심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대가 거래선을 바꿀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마약밀매 시장에 경쟁자가 발생된다.

따라서 반드시 마약대금을 지불해야 한다.

아무튼 조직원 가족 명의로 예금되어 있는 돈도 상당히 많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충당되지 않을 것이다.

의심 많은 놈이 남의 명의로 몇 십억이나 예금해 두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수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조직원 명의로 예금된 것은 10억 남짓이다.

모르긴 몰라도 부하들을 신임한다는 뜻으로 예금해 두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돈은 언제든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럴 경우 부하들의 충성도가 낮아질 수 있다.

급하긴 해도 케이먼 제도의 율리우스 바에르 은행의 비밀계좌의 돈은 빼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금 세탁을 또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건물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다.

사무실은 아무 데나 다시 얻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흐음, 세정빌딩으로 대출받은 게 182억이니까 220억을 받으면 놈들이 손에 쥐는 건 30억 정도 되겠군.”

금액 차이는 38억이지만 세입자들의 임대보증금을 모두 제하고 나면 30억을 조금 넘길 것이란 예상을 한 것이다.

“후후, 한번 당해보라지.”

현수는 나직한 웃음을 지었다. 이때 핸드폰이 진동을 한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허, 이 사람 보게. 그렇게 급했나?”

전화기에 뜬 번호는 역삼동 제일부동산 사무실 번호였다.

“네, 김현수입니다.”

“김 사장님! 좋은 소식입니다.”

부동산 사무소 사장은 상당히 흥분된 음성이다. 하긴, 일생일대의 부동산 거래를 주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소식이요?”

“네, 저쪽에서 그 금액에 팔겠다고 합니다.”

“그래요?”

현수는 짐짓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그것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11장 빌딩을 사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은행에 저당 잡혀 있는 금액과 임대 보증금을 뺀 나머지를 최대한 빨리 지급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액 현금으로 달라고 합니다.”

“현금으로요……? 좋아요. 그 금액이 얼마나 된다고 하죠?”

“31억 3천만 원입니다.”

부동산 사장은 현수의 통장에 있던 잔고를 보았기에 이번 거래가 성사될 것이란 확신을 하는 듯하다.

“흐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전화 드리지요.”

“사, 사장님!”

저쪽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전화를 끊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삐이잉―!

“네, 사장님!”

“이 실장님 잠깐 안으로 들어오세요.”

이은정은 지시사항을 메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안으로 들어섰다. 미니스커트에 얇은 티셔츠 차림이다.

생활 형편이 나아져서인지 패션에도 신경을 쓰는 듯 맵시있어 보인다.

“부르셨어요?”

“그래요. 현재 가용한 자금이 얼마나 되죠?”

“으음, 11억 2천 정도 됩니다.”

“그럼, 그중에서 급하게 써야 할 돈은 얼마죠?”

“금요일에 인성제약과 대호약품 자금 결제가 있어요. 둘을 합쳐서 5억 8천만 원 정도 됩니다.”

“그럼, 킨샤사에서 올 돈은 얼마나 되죠?”

“다음 주 월요일에 보내주신다고 했는데 72억 5천만 원 정도 됩니다.”

“알았습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은정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현수는 드미트리와 통화를 했다. 그런데 자금 세탁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하여 다시 이은정을 불러들였다.

“이 실장님, 이 계좌의 돈을 회사 통장으로 이체한 뒤 그중 30억 원을 현금으로 인출하세요.”

현수가 건넨 것은 영국에서 송금 받은 183억 원이 들어 있던 것이다.

이중 50억은 지난 17일에 사용하고 133억이 남아 있다. 통장을 받아 잔고를 확인한 은정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엄청난 거금이 들어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네에? 30억을 전부 현금으로요? 그건 쉽지 않은 일인데요? 은행지점에 그만한 현금이 없거든요.”

“아,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러니 거래 은행에 협조를 요청하세요. 내일 점심 때까지 준비해 주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외화예금이 되는지 알아봐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이실리프 무역상사와 거래를 트게 된 우리은행 지점은 이은정 실장을 VVIP로 분류해 놓았다.

하여 언제든 기다림없이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중이다. 그러니 전화로 부탁만 하면 즉각 처리해 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은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물러갔다. 그런데 얼굴이 비장한 기운이 감돈다.

처음 이실리프 무역상사에 취업했을 때엔 좋은 사람을 만나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게다가 가난으로 해방시켜 준 은혜를 베풀어주었으니 정말 열심히 일하여 보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대한약품 주식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도 주가가 올랐으니 이젠 여유까지 있다.

그런데 점점 더 다루는 금액의 규모가 늘어나고 있다.

킨샤사의 천지약품에서 들어오는 오더는 물론이고, 드모비치 상사로부터 들어오는 오더 역시 상상을 초월한 금액이다.

수익률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현수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현수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리라는 결심을 한 것이다. 돈 때문은 아니다. 현수의 너그러우면서도 부드럽고, 배려하는 마음이 더없이 좋았던 것이다.

“아아, 사장님……!”

은정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리곤 지시받은 대로 일처리를 시작했다. 전화로 통화할 일이 아니다 싶어 은행 먼저 들른 것이다.

“이은정 실장님! 어서 오세요.”

우연히 시선이 마주치자 지점장이 반색하며 일어난다.

“아, 안녕하세요?”

언제나처럼 VIP룸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한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네, 일단 이 계좌로 30억 원을 송금해 주세요.”

“3, 30억 원이요?”

“네.”

“잠시만요.”

키보드를 몇 번 두들긴 지점장의 눈이 커졌다. 은정이 건넨 계좌에 133억 원이 입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의 어떤 계좌에도 들어 있지 않은 거금이다.

지점장은 계좌번호를 찬찬히 확인해 가며 송금을 했다.

“그리고 어려운 부탁일지 모르는데 내일까지 30억 원을 현금으로 준비해 주세요.”

“네에?”

“저희 사장님이 꼭 필요하시대요. 부피가 적은 5만원권으로 부탁드려요.”

“네, 30억 원이요. 알겠습니다.”

“참, 이 지점에서도 외화예금 통장 개설 가능한 거죠?”

“그럼요. 일반 예금과 마찬가지로 가능합니다.”

“알았습니다. 내일까지 부탁드려요.”

“네, 근데 아직도 사장님께서 사무실 방문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네, 저희 사장님이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셔서요.”

“이렇게 큰 고객이신데 인사조차 못하게 하시니……. 아무튼 대단히 고맙다는 뜻을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이거…….”

“어머, 이게 뭐예요?”

“여자들 피부에 상당히 좋다고 해서 이 실장님 드리려고 준비한 겁니다. 가져가십시오.”

은정은 지점장이 내민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태을제약에서 만든 듀 닥터였던 것이다.

“제가 이런 거 받아도 되나요?”

“아이고, 그럼요. 당연히 되죠. 가시거든 사장님께 말씀 좀 잘해주십시오. 앞으로도 저희 은행을 이용해 달라고요.”

“네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정은 거절하지 않고 듀 닥터를 받아 들었다.

효능도 좋지만 현수는 이런 거 주는데 안 받았다고 뭐라고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녀왔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내일까지 현금으로 30억 원을 준비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외화 예금 계좌 개설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요? 잘했네요.”

“근데 지점장님이 이걸 주시더라고요.”

“그건… 듀 닥터군요.”

“네, 품질 확실한 거라 받아왔어요.”

“잘 했네요. 그거 이 실장님이 쓰세요.”

“정말요?”

“하하, 그럼요. 남자인 내가 그걸 쓰겠습니까? 그러니 이 실장님이 쓰세요.”

“호호, 고마워요.”

은정은 사양치 않고 냉큼 집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샘플로 받아왔던 걸 거의 다 써가는 중이다. 하여 새 걸 사서 써야 하는 고민을 하던 참이다.

돈은 많이 생겼지만 이전에 가난할 때를 잊지 않기에 근검절약하는 마음 때문에 주저하던 중이다.

“나는 잠시 나갔다 올게요. 시간 되면 퇴근하세요.”

“네, 사장님!”

은정이 나가자 전화를 집어 들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띠리리리링―!

“민 사장님!”

“네, 김 사장님.”

“오늘 사모님 치료를 시도해 보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저야, 그래주면 감사하죠.”

“지금 출발하려고 하는데 댁에서 만나지요.”

“그, 그럼 그럴까요?”

민윤서 사장과 통화를 마친 현수는 역삼동 제일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저 김현수인데요.”

“네, 김현수 사장님!”

저쪽에선 이쪽의 결정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 그런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내일 오후 5시쯤 계약을 하죠. 계약과 동시에 잔금까지 모두 치를 테니 준비해 주십시오.”

“그, 그러겠습니다. 차질 없이 명의변경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수수료를 정해야 할 것 같군요.”

“네, 수수료요.”

부동산 사장은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다.

한편, 현수는 집을 얻으면서 부동산 거래에 대한 상식을 얻었기에 얼마나 줘야 하는지를 안다.

법에서 정한 최고 금액은 거래액의 1,000분의 9에 해당되는 1억 9,800만 원이다.

하나 이 금액을 다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금액이 큰 만큼 중개업자가 중개 의뢰인과 협의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정 최고 수수료는 0.9%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그렇지요.”

“근데 거래금액이 크면 협의하도록 되어 있지요?”

“그것도 그렇습니다.”

“저는 0.6% 정도면 어떨까 하는데 사장님 의견은 어떠십니까? 조금 섭섭하신가요?”

“아이고, 아닙니다. 저는 만족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중개 수수료도 내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보나마나 전화기를 든 채 허리를 숙이고 있을 것이다.

“네, 그럼 내일 오후 5시에 뵙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서민으로 살아보았기에 부동산 중개 사무소 사장이 어떤 표정일지 훤히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래, 가끔은 좋은 일도 있어야지.”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중개수수료로 5천만 원 이하를 제시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좋다고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1억 3,200만 원이나 주겠다고 한 것은 없는 집에 소 들어가는 기분을 느껴보라는 배려였다.

“어서 오세요.”

“네.”

15일 날 보았으니 딱 사흘이 지났다. 그런데 윤영지의 안색이 몹시 창백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병세가 악화된 모양이다. 그래도 손님이라고 웃는 낯이라는 것이 애처로워 보인다.

“그이는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예요. 차는 뭐로 드릴까요?”

“커피 한 잔 주세요.”

조만간 커피 농장을 할 생각이라 부러 청한 것이다.

“기력이 더 떨어지신 듯하네요.”

“네, 움직이는 게 조금 불편해요.”

목소리도 힘이 없었다.

그냥 놔두면 촛불 꺼지듯 그렇게 가물거리다 꺼질 목숨이다. 왠지 처연한 기분이 들었지만 짐짓 웃음 지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배운 건 제도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는 다른 겁니다. 그래서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습니다.”

“네에.”

“희망은 가지시는 것은 좋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네에, 근데 그거 하면 아픈가요?”

한때 브라운관을 주름잡던 당대의 여배우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현수를 만나기 얼마 전 자칭 침술에 조예가 있다는 돌팔이를 만나 지독한 고통을 겪었던 때문이다.

현수는 싱긋 웃음 지었다.

“아뇨,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제가 드리는 약은 쓰지도 않을 거구요.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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