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네, 형님! 하지만 차도가 있어요.”
“차도는 무슨……! 오늘 치료를 했는데 오늘 차도가 있다는 게 말이 돼?”
현수는 윤 소령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섭섭한 마음을 품기보다는 말없이 듣는 쪽을 택했다. 나서서 말해봐야 변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매제! 생각해 봐. 내가 그 병에 대해서 알아. 우리 팀장님 아들도 지금 그 병에 걸려 있어. 별의별 병원을 다 찾았고, 심지어 미국에 있는 병원까지 갔지만 치료가 안 돼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
민윤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윤 소령이 핏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근데 딱 한 번 치료를 하고 차도가 있어?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어쩌면 사랑하는 사촌 여동생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때문인지 윤 소령의 음성은 커져 있었다.
이때 술을 꺼내오던 윤영지가 소리쳤다.
12장 인연의 끈
“오빠! 진짜예요. 많이 좋아졌단 말이에요.”
“어……! 다 들었어?”
“그래요. 그러니 저이 좀 닦달하지 말아요. 하나뿐인 매제라면서 그렇게 소리치면 어떻게 해요?”
“아! 미안, 내가 조금 흥분했나 봐. 매제, 미안해. 그리고 김 사장님에게도 미안하구요. 근데 너 진짜 괜찮은 거냐?”
윤 소령의 관심은 오로지 윤영지에게 쏠려 있었다.
“네, 김 사장님 치료를 받기 전엔 몸이 무겁고 움직이는 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아이고, 이 오빠가 맨날 속아서만 살았나. 진짜 괜찮다구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윤강혁 소령에게 있어 윤영지는 자랑의 대상이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상사와 부하들에게도 하나뿐인 사촌 여동생이 톱탤런트 윤영지라는 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흔한 스캔들 한 번 없이 좋은 이미지만 가져 안티가 거의 없는 탤런트이기에 모두들 그러냐고 하면서 부러워했다.
초급 장교일 때는 소개시켜 달라는 선배 장교들 때문에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너무나 예쁘고 착한 윤영지가 동생이라는 것이 흐뭇했던 것이다.
“네가 좋아졌다니 다행이다. 김 사장님, 고맙습니다.”
“아, 네에.”
“당신 정말 괜찮은 거야?”
“응, 이상해! 아까까진 몸이 무겁고 움직이는데 몹시 힘들었는데 지금은 아주 가뿐해. 김 사장님 치료가 효과가 있나 봐. 고맙습니다, 김현수 사장님!”
윤영지가 정색하고는 정중히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어휴,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은 더 두고 봐야 합니다. 최소 하루는 두고 봐야 정말 나아지는 건지 아니면 반짝하는 건지 알 수 있는 겁니다.”
“네에, 아무튼 고맙습니다.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얼마만인지 몰라요.”
“네에.”
무어라 하겠는가! 현수는 얼른 얼버무렸다.
“영지야, 뭐든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라. 이 오빠가 군바리라 돈은 많이 못 벌지만 네가 갖고 싶은 거 정도는 사줄 수 있을 거다. 알았지?”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올 땐 호떡이나 조금 사와요.”
“호떡? 갑자기 웬 호떡……?”
“몰라요. 요즘 자꾸 그게 먹고 싶어져요.”
‘헐……! 그게 그거였던 거야?’
현수는 내심 당황했다. 며칠 전 마나 디텍션을 구현시켰을 때 윤영지의 체내 마나량이 턱없이 적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다 아랫배 쪽에 도달했을 때 마나가 뭉쳐 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양이 적어서 그냥 정체된 마나인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이야길 듣다 보니 번개처럼 스치는 상념이 있었다.
뭉쳐진 마나가 다른 생명체의 것이라면 임신이다! 유난히도 금슬 좋은 부부이기에 임신일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저어, 다시 한 번 진맥해 봐도 되겠습니까?”
“네? 왜요?”
윤영지는 혹시 뭔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을까 싶었는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게 뭔데요?”
“혹시 임신이 아닐까 싶어서 그럽니다.”
“네에? 임신이요?”
“네, 그러니 진맥하게 해주십시오.”
“그, 그러세요.”
윤영지는 아픈 와중에도 할 일은 했다는 것이 부끄러운지 볼이 붉어졌다. 하지만 현수는 개의치 않고 맥문을 짚었다.
“흐으음……!”
웃고 떠들던 민윤서와 윤강혁 모두 지그시 눈을 감은 현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확인 결과 임신이 확실하다. 움직임 자체가 다른 마나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역시, 그랬구나. 근데 회복 포션과 리커버리 때문에 어떤 영향이 생기진 않을까?’
현수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발생 시기에 영향을 받으면 자칫 장애가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걸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거니 그렇진 않겠지.’
현수의 이런 생각은 기우이다. 윤영지의 태아는 리커버리 마법과 회복 포션 덕에 벌모세수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IQ183에 신체 건장한 둘째 아들을 얻게 된다.
현수가 진맥을 마치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제 느낌이 맞다면 사모님은 임신을 하신 듯합니다.”
“이, 임신이요?”
“네, 얼마 안 된 거 같으니 몸조심하셔야겠네요.”
“여, 여보!”
윤영지의 눈이 금방 글썽글썽해진다.
둘째를 갖고 싶어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도 생기지 않던 아기가 생겼다는 말 때문이다.
“축하하네, 매제!”
“하하, 여보! 만세다, 만세! 우하하하!”
민윤서가 기쁘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날의 술자리는 이것으로 끝났다.
몸조심해야 하는 윤영지는 방으로 들어갔고, 윤서와 현수, 그리고 강혁이 설거지와 뒷정리를 했다.
늦은 밤, 현수는 세정빌딩을 들러 집으로 돌아갔다.
건물 내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지하 1층과 12층엔 대걸레가 돌아다녔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이 출동했다. 그리곤 12층 복도에 기절한 채 누워 있던 도둑을 검거했다.
건물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잠입했던 도둑이 귀신을 만나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기절해 있었던 것이다.
* * *
부우우웅―! 부우우우웅―!
“여보세요.”
“아, 김현수 씨?”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현수는 듣기 좋은 나직한 저음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 이거 반갑소. 나 홍진표라 하는데…….”
“아, 네에. 안녕하세요? 홍 교수님!”
“하하, 다행히 기억하는군.”
“아이고, 그럼요! 그간 안녕하셨지요?”
“그럼, 김현수 씨 덕에 정말 많이 안녕했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현수는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부러 모르는 척했다.
“아무튼 서울에 볼일이 있어 왔는데 온 김에 우리 김현수 씨 얼굴이나 한번 볼까 싶은데 시간 있나?”
“그럼요. 지금 어디 계세요? 금방 달려가겠습니다.”
현수는 홍진표 교수의 인품과 학식, 그리고 흉중에 품은 마음 모두를 존경한다.
때 타기 쉬운 세상 속에 머물면서도 오염되기보다는 다른 이들을 정화하는 정신적인 지주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마냥 고고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본인의 말로는 한때 무협지에 빠져서 살았다고 한다. 이는 세류(世流)가 어떤지를 너무도 잘 알기에 적당히 몸을 실을 줄 안다는 뜻이다. 물론 정도(正道)이다.
“여긴 여의도인데 올 수 있나?”
“그럼요. 교수님이 계시다면 여의도 아니라 을숙도라도 달려갑니다. 근데 여의도 어디로 가면 됩니까?”
“차를 가져올 거면 KBC 방송국으로 오게.”
“네, 지금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아냐, 지금부터 녹화 중인데 한 두어 시간 지나야 끝날 것 같으네. 그러니 그때 오게.”
보아하니 끝장토론에 출연하려 서울에 올라온 모양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현수가 홍진표 교수를 만난 것은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예상보다 토론 시간이 길어졌던 것이다.
“허, 그 사람 참……! 사람이 어찌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듣는지. 그런 사람이 어떻게 4선의원이 되었는지 이해가 안 되네.”
“네?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충선 의원 말이네.”
“아! 한심당 원대부대표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그런 사람을 부대표로 세워놨으니 정말 한심한 당이지. 안 그런가?”
“네, 정말 정이 안 가는 당이죠, 한심당은……! 맨 위부터 맨 아래까지 온통 썩어빠진 놈들만 우글거리는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수와 홍 교수의 정치적 견해는 놀랍도록 일치한다.
여당인 한심당은 지극히 혐오하고, 제1야당인 민주실현당은 탐탁지 않게 여긴다.
군소 야당 역시 제대로 된 수권정당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이익단체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치권의 거의 모든 인사들에 대해 낙제점을 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몇몇 인사에 대해선 기대를 낮추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정권을 쥐거나 실세가 되었다면 나라꼴이 이렇듯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여긴다.
한마디로 현실 정치가 상당히 아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다수 누리꾼들의 견해와 일치한다.
사실 일치한다기보다는 홍 교수의 견해에 누리꾼들이 찬성하는 쪽이 맞다.
“오늘 토론의 주제는 뭐였습니까?”
“‘영어 교육, 과연 이대로 좋은가’였네.”
“아! 영어요.”
말을 하면서도 현수는 치를 떨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할 때까지 지겹도록 공부해야 했던 과목이다.
“나중에 방송 보면 알겠지만 영어가 글로벌한 언어라는 것은 나도 인정하네. 하지만 전 국민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은 아니지.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 영어와 별 관계없는 삶을 삽니다.”
“그렇지? 그런데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을 나와서도 입사시험을 보려면 영어를 공부해야 해. 심지어 입사 후에도 승진 시험에서 영어가 빠지지 않지.”
“네, 영어가 국어가 아닌 나라치고는 너무 과잉교육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현수와 홍 교수는 죽이 척척맞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
“음식 맛있게 하는 집이 있습니다. 토론하시느라 시장하실 것 같아 제가 한 끼 대접해 드리려고 합니다.”
“아! 그런가?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대신 나중에 내가 자네에게 두 끼를 사겠네.”
“하하, 네에. 저도 고맙습니다.”
현수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홍 교수는 잠시 창밖을 보더니 혼잣말처럼 다시 이야길 한다.
“휴우∼!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어 나라 꼴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네? 뭐 말씀하신 겁니까?”
워낙 나직한 말이었는지라 제대로 듣지 못한 현수가 반문한 것이다.
“영어 말이네. 오면서 보니 웬 영어 학원이 이렇게도 많은지. 다른 나라 말을 잘한다 해서 나라가 발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일세.”
“제가 이런 말씀드리면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겐 문화 사대주의가 계승되어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문화 사대주의?”
“네, 조선시대 때는 명나라나 청나라 문물을 못 받아들여 안달을 했잖습니까? 그러다가 왜정시대를 겪었고, 곧이어 6.25전쟁이 있었지요.”
“그렇지.”
“이후의 정치판을 봐도 다른 나라의 문물에 대한 숭상이 너무 심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미국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커요.”
“흐음, 그런가? 그럼 자네는 미국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미국은 전 세계 200여 국가 중 하나지요. 현재로선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이구요.”
홍 교수는 현수의 나머지 견해를 알아야겠다는 듯 대꾸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나라가 전쟁을 할 때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 하여 우리의 것을 포기해 가면서 그들을 도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있어야 남이 있는 것이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럼, 미국과의 관계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냥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를 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무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니, 우리나라 정치인들이요.”
“흐음, 그래? 어떤 면에서?”
“군사적인 부문을 보면 시스템 자체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양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 손해 보는 일도 있는 것 같더군요.”
현수는 미국 이외의 국가에서 무기를 도입할 경우 이후의 거래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알 것이라 여긴 것이다.
“……!”
홍 교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무기의 도입뿐만 아니라 수출에서도 불이익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은 T―50 고등훈련기를 인도네시아와 수출 계약을 맺었고, 다른 국가로의 수출도 타진 중이다.
또한, 우리 손으로 개발한 백상어와 홍상어는 미국 어뢰와 대잠수함 로켓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더 뛰어난 성능을 지녀 수출이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