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현수 씨, 어머닌……!”
말을 하던 지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웬일인가 싶어 바라보는 가운데 지현이 큰절을 한다.
“지, 지현 씨!”
현수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현은 정성스럽게 절을 했다.
“고마워요. 현수 씨 덕에 어머닐 찾았어요.”
“……!”
“너무 고마워서… 그래서 큰절 올리려고 왔어요.”
“지현 씨……!”
고개를 든 지현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득하다. 물론 기쁨과 감사의 뜻이다.
“흐흑! 정말 고마워요. 할아버지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현수 씨는 제게 너무도 큰일을 해주신 은인이에요.”
“지현 씨……!”
“현수 씨……!”
현수도 지현도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심전심, 염화시중의 미소, 심심상인(心心相印)이었다.
“다행입니다. 어머니께서 쾌차하셔서.”
“네에, 모든 게 현수 씨 덕이에요. 아버지께서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계셔요. 아버지 대신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 하셨어요.”
“아닙니다. 내 능력으로 그만한 결과가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그래도요. 제가 늙어서 죽는 그날까지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정말 감사해요.”
“……!”
현수는 마땅한 대답이 없어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제가 사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시죠?”
“저녁이요……?”
현수는 말끝을 흐렸다.
직원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곧 러시아로 출국해야 한다. 하여 오늘 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현의 눈빛을 보니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제가 아는 데로 모셔도 되죠?”
“물론입니다.”
퇴근 무렵이었기에 현수는 두말 않고 지현을 따라 나섰다.
지현이 안내한 곳은 삼청각이다.
예약된 방문을 열자 의외의 인물들이 보인다.
“어서 오게.”
“아……! 안녕하십니까?”
예약된 룸에 들어가니 지현의 부모님인 권철현 서울고검장과 안숙희 여사, 그리고 지현의 외조부인 안준환 옹이 있었다.
현수는 얼른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시게.”
“네에. 안녕하셨지요?”
“자네 덕으로 이렇게 잘 있네, 자아, 자리에 앉지.”
자리에 앉자 안준환 옹이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라준다.
얼른 아니라고 하고 주전자들 받아 들려고 하는데 안준환 옹이 먼저 한마디 한다.
“자네에게 덕을 입어 죽었어야 할 이 늙은이가 회춘을 했네. 그간 고마운 마음뿐이었네. 그러니 먼저 받으시게.”
“네? 아, 네에.”
현수는 안준환 옹의 표정을 보고 얼른 잔을 들었다. 어른이 주시려는 것을 억지로 거부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쪼르르륵―!
현수는 술잔을 받아 내려놓고는 주전자를 받아 들어 공손히 한 잔 따라 올렸다.
쪼르르륵―!
“크으으……!”
술은 정종이다. 하나 안 옹은 오랜만의 음주인지 통쾌한 소리를 낸다. 얼른 고개를 돌려 잔을 비운 다음 이번엔 권 고검장에게 술을 올리려 했다.
한데 이번에도 아니다.
“장인어른을 쾌유케 한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내자까지 좋아졌네. 내가 어찌 자네에게 어른 대접만 받겠는가?”
눈빛을 보니 잔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이번에도 먼저 잔을 받고 따라 올렸다.
장인이 계시는 자리인지라 권 고검장도 고개를 돌리고는 잔을 비운다. 현수라 하여 어찌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잔을 내려놓자 곁에 있던 안숙희 여사가 한마디 한다.
“김현수 씨라고 했죠?”
“네.”
“속 버리겠어요. 안주부터 들어요.”
“네에. 고맙습니다.”
한사랑 요양원에서 보았던 안 여사와 현재의 안 여사는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그때는 철부지 어린 아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도 현숙한 부인의 모습이다.
현수는 얼른 참기름에 볶아낸 전복 하나를 집어 먹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안 여사가 주전자를 들고 있다.
“지현이에게 이야길 들었어요. 내가 정상인이 되도록 애써주었다고……. 감사의 뜻으로 술 한 잔 권하고 싶네요.”
“네? 아, 네에. 감사합니다.”
현수는 이번에도 먼저 술을 받았다. 그리곤 술을 올리려 하니 잔을 든다. 그런데 권 고검장이 고개를 흔든다.
“여보, 아직은 염려가 되니 술을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안해요. 이이가 내 건강을 너무 걱정하네요. 다음에 한잔 주세요.”
“네에,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고개를 돌려 잔을 비웠다. 다시 원래의 위치로 고개를 돌리니 지현이 젓가락 사이에 꽃등심 구이 하나를 들고 있다.
입장이 난처했지만 얼른 받아서 먹었다.
“저도 한 잔 드릴게요. 할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제게 너무 소중한 분들이에요. 현수 씨 덕에 다시 건강을 찾으셔서 너무 고마워요.”
현수는 할 수 없이 또 한 잔을 받았다. 그리곤 지현에게도 한 잔을 따라주었다.
어른들이 보는 자리이기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어쩌겠는가! 현수는 네 잔째를 단숨에 비웠다.
잔을 내려놓으려는데 권 고검장이 주전자를 또 든다.
“내가 자네와 지현이에게 한 잔씩 주겠네.”
이러다가 애들만 술 마시는 자리라는 소리가 나올 판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둘의 잔이 채워지자 권 고검장이 안 옹을 바라본다.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잔을 비우게.”
“네에.”
현수와 지현은 거의 동시에 잔을 비웠다. 술잔을 내려놓으려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한다.
“방금 마신 것은 합환주(合歡酒)였네. 그게 무언지는 알지? 장인어른과 나, 그리고 우리 집 사람 모두 자네를 인정했네. 우리 지현이를 행복하게 해주리라 믿어도 되지?”
“네……?”
현수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 말꼬리만 올렸다.
“남 주기 아까워 여태껏 선 한 번 안 보인 아이네. 그간 공부하느라 연애 한 번 못해봤고……. 자네가 마음에 든다고 하더군.”
“……!”
“너무도 소중한 딸이지만 자네에게 주겠네. 미리 말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반품은 불가하네. 그러니 잘 보듬어주게.”
“……!”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절대 반품 사절이네. 알았지?”
“……!”
권 고검장 등은 웃고 있었지만 현수는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와 예상 못한 이야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지현이 아닌 연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들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너무도 흐뭇한 눈으로 자신과 지현을 바라보는 안준환 옹과 안숙희 여사의 시선 때문이다.
권 고검장 역시 몹시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다.
‘끄으응……!’
현수가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만 숙이자 이를 부끄럽다 여긴 걸로 착각한 권 고검장이 한마디 더한다.
“김군 어르신들과도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 주게. 기왕에 결정된 거면 빠를수록 좋지 않겠는가?”
“네……? 아, 네에. 근데 제가 조만간 출장을 가야 해서…….”
“아! 그렇다 해서 당장 낼모레 뵙자는 건 아니네. 출장을 가야 한다면 갔다 와야겠지. 그 다음에 뵈어도 좋으네. 그러니 어르신들께 시간을 여쭤보고 알려주게.”
“네에.”
현수는 어쩔 수 없는 대답을 했다. 어찌 그렇게 못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시간 이후 넷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만찬을 즐겼다.
하나 현수는 아니다. 최고급 꽃등심이 퍽퍽한 닭가슴살처럼 씹혔고, 꿩만두는 서비스로 나오는 군만두 같은 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권 고검장 부부는 장인어른인 안준환 옹을 모시고 먼저 사라졌다.
안숙희 여사는 가기 전에 현수를 불러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우리 지현이 공부만 하느라 맛있는 것도 못 먹어봤을 거예요. 그러니 데리고 다니면서 맛있는 것 좀 사서 먹여요.”
“네? 아, 아닙니다. 저도 돈 있습니다.”
“이건 내가 고마워서 주는 거예요. 이걸로 보약도 한 채 지어 먹어요. 그리고 우리 지현이 든든하게 지켜주구요.”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했던가!
씨암탉을 고아줄 수 없으니 보약을 먹으라는 것이다. 현수는 고맙다 하고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분위기였던 것이다.
술을 마시게 될 것이라 여겨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던 현수는 삼청각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현수 씨!”
“네에.”
곁에서 걷던 지현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지현이 팔짱을 낀다. 그리곤 살며시 고개를 기댄다. 향긋한 냄새가 난다.
하여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이때 지현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밑도 끝도 없다. 대체 무엇이 고맙다는 건지 알 수 없다.
‘끄으응……!’
어른들이 있는 자리에서 아무런 소리도 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칠 즈음에 권 고검장이 한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앞으로 매주 한 번은 나하고 한잔하세. 지현이 저것이 어릴 적부터 했던 실수담을 하나씩 알려주겠네.”
“어머, 아빠!”
지현이 하얗게 눈을 흘겼지만 권 고검장은 무시했다.
“지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이던가? 여보, 그때가 크리스마스 때였지?”
“네, 산타할아버지 오는 거 보고 잔다고 그랬던 날 맞아요.”
“하하, 그래! 그날 우리 지현이가 글쎄 바지에…….”
“우아악! 아빠……!”
갑자기 지현이 소리를 질러 현수는 깜짝 놀랐다.
“하하! 하하하! 이 얘긴 나중에 하세.”
“아빠! 현수 씨한테 그 얘기하면 알죠?”
“왜……? 왜 안 되는데?”
“그럼 앞으론 국물도 없어요.”
“이그, 앞으론 네 국물 없어도 된다. 여기 있는 네 엄마가 더 맛있는 국물을 끓여줄 테니.”
“치이, 치사한 아빠! 어디 두고 봐요.”
부녀지간의 화목한 다툼을 보고 있던 현수는 빙그레 미소 지었었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건 웃을 일이 아니다.
권 고검장 부부와 지현의 외조부는 오늘 현수를 지현의 배필로 인정한다는 것을 알려준 날이기 때문이다.
‘어휴……! 어쩌지?’
행복하다는 듯 고개를 기댄 지현을 힐끔 바라본 현수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어찌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던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수연, 수정 자매가 떠올랐다. 수정은 아예 내놓고 대시 중이고 수연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듯하다.
가끔 의도를 알 수 없는 문자를 보내곤 하기 때문이다.
이때 문득 떠오르는 상념이 있었다. 하여 현수는 황급히 문자를 보냈다. 대상은 조경빈이다.
특별히 할 일 있는 거 아니면 나 내일 러시아로 출장 가는데 같이 갈래?
죄송합니다. 형님! 내일 임원회의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나오신답니다. 그래서 빠질 수 없습니다. 다음에 가요.
현수는 군대 후임인 이현우에게도 같은 문자를 보냈다.
정말요? 좋습니다. 같이 가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날아온 문자를 보곤 웃음 지었다. 흉중의 음모 하나가 성사된 결과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 * *
“어머! 또 출장이세요?”
이수정이 생글거리며 다가온다.
현수는 이럴 줄 알았다는 썩소를 지었다. 보나마나 이 우연은 어제 이수연에게 보냈던 문자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우연은 분명 의도된 우연이다.
현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수정의 끝없는 대시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흉중에 의도된 음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게요. 자주 만나네요.”
“그쵸? 어머, 이분은…….”
“잘 아는 동생이에요. 현우야, 인사해, 이쪽은 이수정 씨야.”
“아, 안녕하세요? 이현우라 합니다.”
“네, 이수정이에요. 잠시만요.”
스튜어디스로서 해야 할 업무가 있기에 수정은 양해를 구하곤 잠시 뒤쪽으로 갔다.
“현우야……!”
또각거리며 뒤쪽으로 가는 수정의 뒤태에 눈을 두고 있던 현우가 얼른 자세를 바로잡는다.
너무도 예뻐서 저도 모르게 눈이 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어쩌면 형수가 될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형! 미안해요.”
“미안해? 왜?”
“그냥요. 근데 저분 어떻게 아는 분이에요?”
현수는 현우의 말을 씹었다. 그리곤 싱긋 웃었다.
“수정 씨, 이쁘지?”
“네……? 아, 그럼요. 정말 예쁘네요.”
“네 눈엔 얼마나 예뻐 보이냐?”
“웬만한 탤런트들은 명함도 못 내밀겠는데요?”
“그래? 한자성어로 표현하면?”
현수가 짐짓 장난식으로 묻자 현우가 얼른 말을 받는다.
“절세가인, 경국지색, 화용월태, 해어화! 이 정도면 됩니까?”
장래에 형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는 건 다 대는 현우였다.
“하하! 녀석,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군. 잘 해봐라.”
“네에……?”
이현우가 현수의 의도를 알아낸 것은 10초 정도 지난 후였다.
“저, 정말이요?”
“그래! 저만한 미인 드물잖아. 안 그래?”
“그, 그야 그렇지요. 근데 진짜요? 농담 아니죠?”
현우는 얼른 고개를 돌려 수정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탤런트 이수연의 언니이다.
“아! 그러고 보니…….”
현수가 이수정의 남자친구라는 건 신문에도 난 사실이다. 그렇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형, 형 여자 친구 아니었어요?”
“아냐. 그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거야. 그러니까 맘 놓고 대시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