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정말이죠? 농담 아니죠? 나중에 딴 말 하기 없기예요.”
현우는 눈빛을 빛냈다. 마치 중요한 전투를 앞에 둔 병사의 눈빛과 같았다.
“그래, 난 지금부터 잘 테니까 알아서 해.”
현수는 시트를 뒤로 제치고는 눈을 감았다.
진짜로 잠을 잘 생각인 것이다. 출국하기에 앞서 할 일이 너무 많아 어제는 밤을 꼴딱 샜다.
바디 체인지가 되었으므로 피곤하지는 않지만 육체를 쉬게 해주어서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현수가 잠든 사이에 이수정이 몇 번이나 왔다. 그런데 잠든 사람과 무엇을 하겠는가!
그럴 때마다 현우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급속도로 친해진 모양이다. 내릴 때쯤 되니 뒤쪽의 빈 좌석으로 자리를 옮겨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현수는 의도대로 된 것이 만족스러워 고개를 끄덕였다.
“형! 진짜 혼자 갈 거야?”
현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러시아로 같이 오자고 하더니 도착하자마자 헤어져야 한다는 말 때문이다.
“그래, 넌 놀러 온 거지만 난 출장이야. 내가 왜 널 불렀는지 아직도 눈치 못 챘어? 그러니 데이트나 잘 해. 알았지?”
“형……! 진짜 고마워.”
“짜식! 나중에 좋은 일 생기면 양복 한 벌이다.”
“물론이야, 형!”
현우는 이제야 확실한 의도를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가 간다는데도 수정은 크게 까탈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현우와의 데이트가 더 신경 쓰인다는 듯 맵시를 가다듬었을 뿐이다. 그래 봐야 스튜어디스 제복이지만!
현수는 둘을 남겨놓고 노보로시스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후후, 이제 둘은 해결된 셈인가? 아니, 셋이구나.”
이수정이 현우와 사귀게 되면 이수연은 자연스럽게 조경빈과 어울리게 될 것이다.
톱 탤런트와 재벌3세의 만남이 이루어지면 말들이 많겠지만 뭐 어떤가!
이수연도 조경빈도 인간성이 괜찮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확실한 처녀 총각이다. 백년가약을 맺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은정 실장은 민주영이 알아서 낚아챌 것이다.
주영이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확실히 하라면서 지원금까지 보태줬다.
없는 동안 잘 꼬셔서 완전한 애인으로 만들라는 뜻이다.
이제 주변에 남은 여자는 강연희와 권지현, 그리고 비서실의 조인경 대리와 이리냐뿐이다.
“흐음, 조 대리는 어쩐다?”
마냥 대시해 들어오는 조 대리의 마음을 잡아줄 남자를 물색했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 그나저나 이리냐가 마중을 나오면 어쩌지? 휴우……! 약속을 하긴 했는데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노보로시스크 공항에 도착한 현수는 이리냐가 보이지 않기를 기도하며 대합실로 빠져나왔다.
누가 나왔나 싶어 둘러보니 지르코프가 서 있다.
나름대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다.
레드 마피아 노보로시스크 책임자가 아니라 여행사 가이드 같은 모습이라 피식 실소를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김 사장님!”
“네에, 또 뵙는군요. 미스터 지르코프!”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나눴다. 그리곤 방탄 벤츠를 타고 곧장 호텔로 이동했다.
출발하고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지르코프가 입을 연다.
“김 사장님, 아쉽게도 이리냐 양은 올 수 없습니다.”
“그래요……?”
“네, 이리냐 양은 현재 학회 세미나에 참석 중입니다.”
지르코프는 이리냐를 대동하지 못한 것이 큰 죄라도 된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현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뜬 때문이다.
“세미나 때문에 어쩌면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그래요? 학생이니 공부가 우선이지요.”
“다음에 오실 땐 꼭 동반하도록 하겠습니다.”
“네에. 알겠습니다.”
현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론 좋았다. 이곳에 방문하기 전에 마음을 묵직하게 했던 부담이 사라진 때문이다.
노보로시스크에서의 업무는 전과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리냐 대신 지르코프와 함께했다는 것뿐이다.
둘은 보드카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현수가 묻고 지르코프가 대꾸하는 것이다.
현수는 레드 마피아가 취급하고 있는 품목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지불할 능력만 되면 핵잠수함이나 핵배낭도 판다는데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지르코프는 언제든 필요한 물목만 알려주면 최저 가격으로 준비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거래는 노보로시스크 지부와의 거래이다. 다시 말해 모스크바의 보스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와는 별개의 거래이다.
현수는 좋은 제안이었다며 조만간 주문하겠다고 했다.
콩고민주공화국에 세워질 이실리프 농장을 지키기 위한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르코프와 헤어져선 모스크바로 향했다. 노보로시스크엔 프랑스로 가는 직항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수는 레드 마피아가 잡아준 호텔로 향하지 않았다. 혹시 이리냐가 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내로서 한번 한 약속을 어길 순 없다. 그러면 책임지지도 못할 인연이 만들어지는데 그건 절대 사양이다.
그렇기에 일전에 갔었던 노보데비치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리곤 사람들의 발걸음이 적은 곳을 찾았다.
“앱솔루트 배리어! 타임 딜레이!”
마나 집적진을 꺼내든 현수는 그곳에서 차원 이동에 필요한 마나를 모았다. 당연히 서울보다 마나가 풍부했다.
이튿날 이른 새벽, 현수는 아르센 대륙으로 여행을 떠났다. 복잡하고 치열한 일상사를 떠나 바캉스 가는 기분이었다.
“마나여, 나를 아르센 대륙으로……!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6장 디오나니아와 쏘러리스
“흐음, 여전히 서늘하군.”
모스크바는 더운 여름이다. 하지만 현수가 나타난 호숫가는 서늘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아직 봄이라 그렇고, 이른 새벽이라 더 그럴 것이다.
서둘러서 이전에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는 사이에 벌써 소름이 돋아 있었다.
용병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보니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졸리지도 않고, 다시 자기에도 그런 시각인지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을 감지하기 위한 와이드 센스 마법을 구현시켰다.
다행히 스콜론 몇 마리가 움직이는 것 외엔 없었다.
현수는 이것들을 잡아 독액을 채취했다.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 작용한 것이다.
이것들 이외엔 별다른 위험은 없어 보였다.
현수는 천천히 걸어 더 먼 곳까지 가보았다. 한국엔 없는 이국적인 풍광을 즐기기 위함이다.
시간이 흘러 한국시각으로 새벽 5시 30분쯤 되었을 때였다.
“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악……!”
“헉, 뭐야?”
난데없는 비명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 현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폈다.
분명 와이드 센스 마법엔 몬스터가 없었다. 그런데 공격받았다 생각한 것이다.
누군가 작은 호수 부근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비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용병들이 무기를 들고 우르르 달려간다. 몬스터의 출현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런데 딱 둘밖에 없다. 자작가의 시종과 시녀이다.
둘 다 발가벗은 상태인데 사내는 스물여섯 살쯤 되었고, 여자는 스무 살쯤 되었다.
“야! 왜 아무것도 없는데 비명을 지르고 난리야?”
랄프의 물음에도 대답 대신 비명만 지른다.
“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악……!”
“아니, 대체 왜 그러느냐고?”
“미친 거 아냐? 왜 홀딱 벗고 발광이야?”
둘은 아예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뒹구는데 조금 이상하다.
그 와중에도 발가벗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서 그러는 것인지 둘 다 사타구니를 감싸고 있다.
사내야 그렇다 쳐도 여자들은 이럴 경우 가슴과 사타구니 두 군데를 동시에 가리려 하는 것이 본능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는다. 오로지 사타구니만 움켜쥔 채 비명을 지른다.
“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악……!”
“이런 제길! 자다 일어나서 대체 왜 이러는지 말이라도 해야 알지. 이봐, 가만히 있어봐.”
랄프가 사내의 손을 강제로 잡아떼었다. 그런데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하다.
그럼에도 사내는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며 발광을 한다. 대체 왜 이러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누군가 한마디 한다.
“대장! 아무래도 얀디루에 당한 것 같습니다.”
“뭐어? 얀디루……!”
“네, 여긴 미판테 왕국입니다. 호수마다 얀디루와 라니야가 있다고 봐야 하지요.”
“얀디루……!”
얀디루는 가늘고 긴 물고기로 남녀 구분 없이 사람의 생식기를 파고들어가는 놈이다. 미꾸라지 비슷하게 생긴 놈이다.
평상시엔 별 문제가 없는데 물속에 들어가 소변을 보면 이놈이 달려든다. 암모니아 냄새에 환장하는 것이다.
그리곤 삽시간에 요도를 타고 몸속으로 파고들어간다. 다음엔 갈고리를 펼쳐 자리를 잡는다.
그때부터 야들야들한 속살을 끊임없이 뜯어먹는다. 그 고통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당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결코 나오지 않는 이놈을 제거할 방법은 외과적 수술 이외엔 없다.
그런데 아르센 대륙엔 외과의사라곤 단 하나도 없다.
“로렌스, 자작가 사람들에게 가서 전해라. 시종과 시녀가 얀디루에 당해서 고통을 덜어주었다고…….”
“네, 대장……!”
로렌스가 달려가자 랄프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지체하지 않고 둘의 목을 베었다.
퍽! 퍼억―!
“으윽! 케엑!”
“……!”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갈 사람 둘을 편안하게 해준 것이다. 그럼에도 용병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어쨌든 생목숨 둘이 끊긴 것이기 때문이다.
랄프도 마뜩치 않다는 듯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잘 묻어줘라.”
“네, 대장!”
랄프가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돌아섰다. 자다가 일어나서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 둘의 목을 베었다.
표정이 밝을 리 있겠는가!
“무슨 일 있었습니까?”
터벅터벅 걸어오던 현수가 랄프에게 물었다.
랄프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현수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판단하였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후, 현수는 얀디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시종과 시녀는 곧 결혼할 사이였다. 이들 둘은 새벽에 일어나 어제 용병들이 목욕했던 호수에서 몸을 씻었다.
어제 용병들이 들어갔을 때엔 아무도 물속에 소변을 보지 않았다. 얀디루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며칠 동안 물이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방광이 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종과 시비는 어제 물을 잔뜩 마셨다. 그렇기에 방광에 소변이 고여 있었다.
사람이 체온보다 차가운 물속에 몸을 담그면 자율신
경(Autonomic Nerve)이 작용하게 된다.
체온 유지를 위해 비열이 큰물을 배출하게 하려는 것이다.
비열(specific heat, 比熱)이란 어떤 물질의 온도를 1℃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을 뜻한다.
그런데 물은 다른 액체에 비해 비열이 높은 편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웃하는 물 분자끼리 수소결합(Hydrogen bonds)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수소결합이 형성되거나 끊어질 때 약간의 열에너지가 저장 또는 방출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물은 따뜻하게 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식히는 것도 어려운 물질이다.
그리고 자율신경이 배출시키려는 물은 당연히 소변이다. 차가운 물속에서 땀을 흘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둘은 목욕을 하면서 슬쩍 소변을 보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 순간 주위를 맴돌던 얀디루가 요도를 타고 들어간 모양이다.
그 결과 목숨을 잃은 것이다.
로렌스 팀장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현수는 호숫가로 가보았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얀디루라는 놈들이 보인다.
하지만 보호색을 띠고 있어 눈에 잘 뜨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모르고 들어갔다 당하는 것이다.
얀디루라는 물고기도 먹고 살자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용서가 되지 않는다.
현수는 땅을 파고 그곳에 소변을 보았다.
호수 바로 바깥쪽이다. 그리곤 그것이 호수와 연결되도록 작은 도랑을 팠다.
물과 소변이 접촉하는 순간, 바닥의 자갈 사이에 있던 얀디루들이 몰려든다.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오랜만에 보는 소변이라 암모니아 양이 많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반원 5m 정도의 물이 시커멓게 보일 정도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무언가 하느라 여념이 없다. 현수는 물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곤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나의 힘이여, 뇌전의 강렬함을 보여라! 기가 라이트
닝(Giga Lightning)!”
파직! 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초강력 6써클 마법이 신새벽의 호수에 퍼부어졌다.
물속에 손을 담근 상태이기에 뇌전의 기운은 아주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잠시 후, 호수의 수면 위로 허연 것들이 둥둥 떠다닌다. 얀디루를 비롯한 각종 물고기들이 기절한 것이다.
오우거도 5분이면 완전 분해한다는 라니야도 많다.
“마나여, 모든 것을 끌어당겨라. 인헤일(Inhale)!”
2써클 흡입 마법으로 모조리 끌어당겼다. 그냥 놔두면 부패하여 물까지 썩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