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느닷없는 등 뒤로부터의 공격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던 셋은 굉렬한 고통에 비명을 토했다.
이 순간 흩어지던 쏘러리스들 역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각자 한 자루 창에 박혀 비틀거리는 승자들을 보았다.
쏘러리스는 창과 같은 병기를 쓰지 않는다. 더 좋은 뿔이라는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꿰에에에! 꿰에에! 꿰이이익! 꿰이이익……!
어떤 녀석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남과 동시에 쏘러리스들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일제히 사라진다.
적의 침입이라 판단하여 제각기 전속력으로 흩어진 것이다.
현수는 신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마법을 준비했다. 기가 라이트닝이나 화염계 마법은 쓸 수 없다.
아이스 스피어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있는 위치만 알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하여 다른 마법을 준비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동굴 속이다. 또한 마땅히 은신할 만한 바위도 없다. 그야말로 눈에 뜨이는 순간 죽기 살기로 쇄도하는 쏘러리스들에게 들이받힐 판이다.
현수는 천천히 자리를 이동했다. 물론 줄리앙 등이 있는 쪽으로의 이동이다.
두두두두두……! 쐐에에엑! 쑤아앙! 쉬이이익―!
섬전의 속도이기에 파공음이 난다. 그렇기에 아주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며 조금씩 전진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두두두두두……! 쐐에에에에엑―!
쏘러리스 한 마리가 정면에서 쇄도해 들어온다. 옆으로 피하려는데 그쪽 역시 다가오는 놈이 있다.
반대쪽 역시 마찬가지이다.
“플라이!”
황급히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 순간 현수가 서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좌우 10m 정도로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보인다.
놈들의 조직적인 공격이었던 것이다. 만일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지 않았다면 반드시 충돌했을 상황이다.
그러고 보니 발자국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쏘러리스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새로 발생되는 흔적을 보고 공격한 것이다.
‘지능이 있다 이거지? 좋아, 포그!’
마법을 구현시키자 안개가 발생되었다. 그 순간 안개를 꿰뚫는 개체들이 있다. 최소 서른 마리이다.
삽시간에 안개가 흩어진다. 워낙 속도가 빨라 공기의 흐름이 격렬했던 때문이다.
‘그래? 그럼 한 번 더. 포그!’
또 다시 안개가 발생되었고, 그것은 이내 흩어졌다.
“좋아, 이번엔 포이즌 포그!”
이실리프 마법서에 기록되어 있는 흑마법 중 하나가 시전되자 이전과는 약간 다른 안개가 생겼다. 약한 비린내가 난다.
두두두두두……! 쒜에에에엑! 쑤아아앙―!
안개가 흩어질 때마다 포이즌 포그 마법이 구현되었다. 놈들은 지치치도 않는지 계속해서 안개 속을 뚫고 다녔다.
신기한 게 가시거리가 3m도 안 될 안개 속을 휘저으면서도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쪽 방향에서 일제히 달려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십여 번 마법이 구현되자 놈들의 움직임이 눈에 뜨이게 둔화되었다. 전에는 달려드는 놈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어떤 놈인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좋아, 이제 상대할 만하군.”
놈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한 마법도 소용이 없다. 물론 헬 파이어 같은 범위 마법이라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8써클 대마법사나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다.
마법사들은 대체적으로 용병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수입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움직이는 걸 극단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1써클이나 2써클 마법사들 이외엔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기가 힘들다.
3써클만 되어도 소속된 마탑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연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쏘러리스 사냥에 마법사들을 고용하지 않은 것이다.
현수는 속도가 느려진 놈들에게 사용할 대상 마법을 골라냈다. 윈드 커터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 또 다른 쇄도가 시작되었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
삼십여 마리가 전속력으로 달려들고 있다.
“좋아, 포그! 그리고 디그!”
안개가 생겨났다. 그 순간 놈들이 안개 속을 꿰뚫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던 때문이다.
와당탕탕! 꿰에에에엑―!
운동에너지가 컸던 만큼 고통도 심한지 비명을 지른다.
“윈드 커터! 윈드 커터!”
파팍! 파파파파파팍―!
꿰에에에에엑―! 뀨에에에엑―!
두 마리 쏘러리스가 삽시간에 피투성이로 변했다. 현수는 얼른 아공간에 놈들의 사체를 집어 넣었다.
그리곤 다시 허공으로 치솟았다. 새로운 질주가 시작된 때문이다. 같은 장소에 또 다시 안개가 만들어지고, 놈들이 지나칠 때쯤이면 2써클 마법 윈드 커터가 시전되었다.
그때마다 쏘러리스 한두 마리씩 아공간에 담겼다. 그렇게 착실하게 놈들의 숫자를 줄여갔다.
두 시간쯤 지날 무렵, 이제 남은 것은 쏘러리스 세 마리와 미노타우르스 네 마리뿐이다. 64마리가 사라진 것이다.
현수는 또 다시 안개를 만들었다.
그런데 다가오지 않는다. 지능이 높은 놈이기에 달려들면 죽는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투명 은신 마법도 해제했다. 달려드는 순간 플라이 마법으로 솟아오를 생각인 것이다.
그럼에도 달려들지 않는다.
현수가 바라보자 슬금슬금 물러선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순간 쏘러리스와 미노타우르스의 뇌리에는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는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심심해서 쏘러리스 사냥을 하는 중이라 판단하고 나니 겁이 나서 물러선 것이다. 그런 놈들의 하체는 축축하게 젖어 있다. 겁에 질려 오줌을 싼 것이다.
“뭐, 안 오면 나야 좋지.”
현수는 내놓고 걸었다. 두 발짝을 내디디면 네 발짝을 물러선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일제히 사라졌다.
동족들을 데리러 가는 것 아니면 도망간 것일 것이다.
“이런……! 힐! 힐! 힐!”
아델과 엘리시아, 그리고 줄리앙은 기절해 있었다.
현수가 승자들을 아이스 스피어로 죽였을 때 곁을 지키던 미노타우르스들이 뒤통수를 내리친 때문이다.
미노타우르스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암컷들이 도망갈 수 있다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자신들도 전투에 끼어들 생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끄응! 끄으응! 끄응―!”
뒤통수의 상처가 아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여인 모두 깨어났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자신들이 처했던 상황을 떠올렸는지 겁먹은 표정으로 물러난다.
이때 현수가 한마디 했다.
“줄리앙! 괜찮아?”
“하, 하인스? 어머나……!”
“꺄악! 꺄아아아악―!”
시선을 돌렸던 여인들은 현수는 보는 순간 몸을 웅크렸다. 발가벗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때문이다.
엘리시아는 아델의 뒤쪽으로 가 잔뜩 웅크리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벽한 나신을 감추기 위함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런 제기랄! 옷을 찾아봤는데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하지?”
“네, 네 옷을 벗어줘.”
“내 거? 그래, 그렇게 하지.”
현수가 상의를 벗어던지자 엘리시아가 얼른 채간다. 줄리앙은 뭐라고 하려다가 말을 만다.
현수는 남은 옷마저 벗었다. 줄리앙이 허겁지겁 걸친다. 문제는 아델이다. 더 이상 벗어줄 옷이 없다.
아델은 가슴과 사타구니를 가린 채 어쩔 줄 몰라 한다.
“잠시 기다려 봐. 조금 더 찾아볼게.”
시선을 둘 데가 없기에 현수는 부러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얼마 후 세 여인들이 입었던 옷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완전한 넝마가 되어 있었다. 이미 의복의 형체를 잃었고, 걸레로 쓰기에도 어려울 만큼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옷이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지?”
현수가 내민 넝마는 아델의 몸 위에 걸쳐졌다. 글자 그대로 걸쳐진 것이다.
“절대 뒤돌아 보지 마! 알았지?”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엘리시아가 한 말이다.
현수 입장에선 이미 볼 거 못 볼 거 전부 다 본 상태이다.
게다가 브레인 리프레쉬 마법 덕에 지능이 매우 높아 한 번 본 것은 잊지도 않는다. 따라서 다시 보나 안 보나 똑같다.
그럼에도 앙칼지게 굴자 웃음이 나온다.
“왜요? 뒤돌아보면 어떻게 돼요?”
“꺄아악!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잖아.”
현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엘리시아가 새삼스레 새침을 떤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고 싶으면 뒤돌아봤다.
언제 어디서 쏘러리스가 달려들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인들도 그것을 알기에 현수가 뒤를 돌아다보면 옷깃 여미기에 바쁠 뿐이다.
일행이 있는 곳까지는 매우 먼 거리이다.
게다가 여자들은 모두 맨발이다. 엘리시아는 귀족가의 딸로 태어나 늘 부드러운 신발을 신고 살았다. 그러다 거친 맨땅을 디디게 되자 발이 아파 눈물까지 찔끔거린다.
특히 암석지대로 접어들자 발이 아프다면서 계속해서 투덜거린다.
“아야! 아파라! 아야야야! 아야! 아악! 이런 제길……! 흐흑! 아파, 아파 죽겠어,”
“……!”
아무도 엘리시아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혼자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이럴 때 대꾸를 하면 보나마나 신경질을 낸다.
괜히 기분 상하고 싶겠는가!
“아야! 아야야! 치이, 여긴 대체 왜 이런 거야? 아야! 아야야! 흐흑! 너무 아파! 흐흐흑!”
현수가 보기엔 그렇게 아픈 곳이 아니다.
울퉁불퉁하긴 하지만 잘 골라서 디디면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 대체 왜 이러나 싶다. 하여 고개를 돌렸다.
“아야! 아야! 하인스,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지? 아야야!”
두 팔을 내두르며 조심스럽게 따라오던 엘리시아가 얼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녀가 입기엔 너무 풍성한 옷인지라 속살이 거의 다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반면 줄리앙은 엘리시아보다는 나은 편이다. 한국으로 치면 105짜리 와이셔츠를 입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용병 일을 하면서 많이 걸어 그러는지 쭉 뻗은 각선미만 드러날 뿐이다. 아델의 경우는 잠시만 손을 떼어내면 옷을 안 입은 거나 진배없는 상황이다.
현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느낌을 받은 때문이다.
다행히 이쪽으로 오는 것은 아니기에 신경을 끊었다.
이때 엘리시아가 충격적인 한마디를 한다.
“아야야! 도저히 안 되겠어. 아델! 나 좀 업어. 아야야!”
철없는 엘리시아의 말에 모두의 발걸음이 멈췄다. 현수와 줄리앙은 어이가 없어서이고, 아델은 난감해서이다.
맨발이긴 마찬가지이고, 통증을 느끼는 것도 같다. 그런데 업으라는 그 말을 따르려니 고통이 짐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델은 시녀이다.
태어나 지금껏 천민으로 살았다. 귀족이 시키는 일이라면 그게 부당하다 하더라고 해야 한다고 배우면서 살았다.
그렇기에 얼른 엘리시아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네, 아가씨! 업히세요.”
엘리시아가 업히려던 바로 그 순간 현수가 입을 열었다.
“엘리시아 아가씨! 아델도 맨발이에요. 근데 아델에게 업히면 아델은 고통을 느끼지 못할까요?”
“……! 그, 그럼 어떡해? 발이 아파 죽겠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엘리시아의 발이 뻘겋고 부어 있다. 상처라도 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발이……!”
“아앙! 아까부터 아프다고 했잖아. 아아아앙!”
엘리시아가 어린애처럼 울어버리자 셋의 표정이 변했다.
아델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고, 줄리앙은 어이없다는 얼굴이다. 현수는 다 큰 아가씨가 어떻게 저런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여 엘리시아의 발바닥을 살펴보았다. 절대 종아리 위쪽은 보지 말라는 소리를 했지만 이미 볼 건 다 본 상태였다.
엘리시아의 발바닥엔 굵은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래서 디딜 때마다 고통을 호소한 듯하다.
가시를 뽑자 피가 나온다. 워낙 굵었던 탓이다. 선혈 몇 방울이 떨어지자 잔뜩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린다.
오냐 오냐 하면서 곱게 키운 딸인 모양이다.
현수는 나중에 애를 낳게 되면 절대 오냐 오냐 하면서 키우지 않을 결심을 했다.
이런 걸 한자 성어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한다.
“아야! 아야야! 나 어떻게 해? 엉엉! 아프단 말이야.”
몇 발짝을 떼기도 전에 또 울음을 터뜨린다. 고통스럽긴 해도 참지 못한 정도는 아니건만 어리광이다.
“아가씨! 제 등에 업히세요.”
아델이 엘리시아에게 등을 내밀자 업히려 한다. 근데 어찌 그 꼴을 두고 보겠는가!
“아델! 아델도 맨발이야. 비켜, 차라리 내가 업을게.”
현수가 밀어내자 아델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켜선다. 맨발로 엘리시아를 업고 갈 생각을 하면 끔찍했던 때문이다.
“아! 뭐해요? 업히지 않고……! 그냥 걸어갈래요?”
현수가 당장에라도 일어서려고 하자 엘리시아가 털썩 업힌다. 당연히 뭉클한 느낌이 든다.
아르센 대륙에서 여자 나이 열아홉이면 다 큰 거다. 당연히 발달될 부분은 다 발달되어 있다.
“끄응차―!”
두 손을 뒤로하여 엘리시아의 허벅지를 쥐고 일어났다. 그 순간 움찔하는 느낌이다. 하나 현수는 이를 무시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출발했지만 얼마 못가 멈췄다. 날이 저물기 시작한 때문이다.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은 것은 밤을 지샐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