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하인스! 저기…….”
줄리앙이 가리킨 곳은 절벽 가운데 툭 튀어 나온 부분이다.
사람은 기어오를 수 있지만 쏘러리스나 미노타우르스가 오르기엔 무리가 있다. 높이는 30m 정도 된다.
위에는 나무 몇 그루가 있고, 초지인 듯하다.
“하인스, 저기밖에 없어요.”
“그래. 가지.”
줄리앙은 어느새 현수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하나 현수는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절벽 아래에 당도한 현수는 엘리시아를 내려놓았다.
천하장사라 할지라도 직벽에 가까운 절벽을 사람 업은 채 오르기엔 힘들기 때문이다.
여자들 모두 벗은 거나 마찬가지이기에 현수가 앞장섰다. 하지만 이내 자리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줄리앙은 괜찮지만 상대적으로 근력이 약한 아델과 엘리시아가 좀처럼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9장 달라진 여인들의 시선
“줄리앙! 앞장 서! 내가 맨 뒤에서 갈게.”
“아, 안 돼!”
엘리시아가 얼른 손사래를 친다.
상의만 걸친 상태이다. 그런데 현수가 뒤따르게 되면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찌 이런 걸 모르겠는가!
“어두워져서 제대로 보이는 것도 없어요. 그리고 여기서 우물쭈물하다가 저기에 올라가지 못하면 쏘러리스들에게 다시 잡혀갈 수도 있어요. 그래도 좋아요?”
“아, 아니!”
엘리시아와 아델은 아무 말도 못했다.
현수에게 치부는 보이는 편이 쏘러리스들에게 능욕당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럼 올라가요. 아델! 아델은 줄리앙이 지난 곳을 그대로 따라서 올라가. 그럴 수 있지?”
“네, 그럴게요.”
“엘리시아 아가씨는 아델이 지난 곳을 눈여겨 보면서 올라가요. 힘에 부치면 내가 뒤에서 밀어줄 테니까요.”
“그, 그래! 알았어.”
엘리시아는 다른 방법이 없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든 걸 포기했다는 어투였다.
셋은 현수가 마법으로 쏘러리스들을 처치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기 전에 뒤통수를 맞아 기절한 때문이다.
깨어나서 그 많던 쏘러리스들이 어디로 갔느냐는 말에 현수는 자신이 그들을 먼 곳으로 꾀어냈다고 했다.
그렇기에 쏘러리스들이 여전히 우글거린다 생각한 것이다.
용병 일을 한 줄리앙은 어렵지 않게 절벽을 기어올랐다. 자작가에서 시녀 생활을 한 아델도 곧잘 뒤따랐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아니다. 밥 먹고 하루 종일 어슬렁거리거나 앉아만 있었기에 근력이 형편없다.
결국 현수는 수시로 엘리시아의 엉덩이를 밀어 올려야 했다.
어둠 속이지만 평민인 하인스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치욕스럽지만 몬스터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렇기에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위로 올라갔다.
절벽 위는 예상대로 평지였다. 그리고 몇 발짝을 떼면 새로운 절벽이 시작된다. 절벽의 턱진 부분에 오른 것이다.
둘러보니 바싹 바른 덤불과 죽은 나무가 있었다. 현수는 부지런히 나무를 분질러 땔감을 만들었다.
그리곤 바람이 덜 불 만한 자리를 찾아 땅을 파냈다.
밤이 되면 몹시 추워진다. 그런데 옷을 제대로 입은 사람이 없다. 현수는 상의를 완전히 벗은 상태이고, 줄리앙과 엘리시아는 후줄근한 겉옷을, 아델은 누더기를 걸쳤을 뿐이다.
이불과 요가 없으니 밤새 추위에 떨다 저체온증으로 고생할 것이다. 하여 약 50㎝ 깊이로 땅을 팠다.
면적은 대략 2평 정도이다. 덤불 위에 장작을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보는 눈이 있기에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을 썼다.
손 사이에 막대를 끼워 넣고 수없이 비비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래도 불은 잘 안 붙었다.
결국 여인들의 시선을 피해 마법으로 불을 피웠다.
잠시 후, 불길이 올라오자 모두 불가에 다가앉았다. 점점 기온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면도 신분도 모두 잊었는지 나란히 앉아 불을 쬔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여자들 뱃속에서 나는 음식 넣어달라는 소리이다.
피식 웃은 현수는 아공간에 있던 빵과 물을 꺼냈다. 지난번에 만들고 여분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자아, 이걸 먹어.”
줄리앙이 얼른 받아 입에 쑤셔 넣는다. 엘리시아에겐 말없이 내밀었다. 잠시 현수를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받아 먹는다. 아델 역시 고맙다는 뜻을 표하고 허겁지겁 먹었다.
“줄리앙! 그렇게 먹다간 체하니까 천천히 먹어.”
말은 줄리앙에게 한 것이지만 사실은 엘리시아에게 한 말이다.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거의 구겨 넣고 있었던 것이다.
“물도 마셔가면서 먹고……!”
배가 부르자 이제 살만하다는 듯 조금씩 웃는 표정을 보인다. 이때였다. 귀청이 울릴 만큼 큰 괴성이 들린다.
꿰에에엑! 꿰에에에에엑―!
고개를 들어 허공을 살피니 엄청난 덩치를 가진 놈이 쇄도하고 있었다.
공포의 몬스터 와이번이다. 드래곤 이외엔 당해낼 자 없는 놈이 일행을 먹이로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현수가 피워놓은 모닥불 때문이다.
서식지를 향해 날아가던 중 불빛을 보게 되었고, 그 앞에서 꾸물거리는 먹이 넷을 본 것이다.
문제는 와이번이 쇄도해 오는데 마땅히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울창한 수림이나 견고한 바위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뛰어내려 도망가자니 높이가 30m이다.
올라왔을 때와 반대로 내려가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내려가는 동안 와이번의 강력한 발톱에 채일 것이 뻔하다.
“아아악! 어떻게 해…….”
“와, 와이번이다. 아아악!”
“……! 꿀꺽!”
엘리시아와 아델은 이제 죽었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반면 줄리앙은 말없이 침만 삼켰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상황을 판단해 보니 꼼짝없이 와이번의 먹이가 될 것이라 생각되기에 저항을 포기한 것이다.
웬만한 도검으로는 흠집조차 내기 힘들 만큼 단단한 피부를 가진 놈이다. 그런데 도검은커녕 비수조차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와이번을 당해내겠는가!
줄리앙의 눈에는 절망의 빛이 흘렀다.
하지만 현수는 아니다. 와이번이 쇄도해 오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기억을 더듬었다.
언젠가 읽었던 몬스터 도감의 내용이다.
와이번은 드래곤과 달리 브레스를 뿜어낼 수 없다. 놈이 가진 무기는 단단한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이다.
그리고 긴 꼬리가 무기이다.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멀린이 드래곤 레어에서 꺼내온 보검 가운데 하나이다.
“스트렝스! 샤프니스!”
검에 마법을 인챈트하고는 스스로에게 버프를 걸었다.
“아이언 스킨! 헤이스트! 헤비 웨이트!”
단단한 피부와 민첩, 그리고 중량화 마법이다. 놈의 날갯짓에 의한 바람에 날려가지 않기 위함이다.
“다들 절벽에 바짝 달라붙어 있어.”
“네!”
현수가 검을 꺼내 들며 한마디 하자 일제히 절벽에 바싹 달라붙는다.
꿰에에에에엑―!
먹이들이 피하거나 저항하려는 몸짓을 하자 괘씸하다는 듯 괴성을 터뜨린 와이번이 현수에게 쏘아져 온다.
“와랏! 누가 센지 어디 한번 해보자.”
이때 절벽에 붙어 있던 줄리앙이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는 C급, 자신은 B급 용병이다.
자신은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고, 현수는 소드 유저 정도이다. 그런데 자신은 겁을 먹고 벌벌 떠는데 현수는 용감하게 와이번과 일대일을 하겠다고 나서 있다.
남자로서 여자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하인스! 그 검을 내게 넘겨. 내가 놈을 상대할게.”
“아냐! 나한테 맡겨!”
“네 실력으론 어림도 없어. 개죽음만 당할 뿐이야.”
“그럼 발가벗은 채 칼 들고 춤추고 싶어? 내가 뒤에서 구경만 할까?”
“……!”
절대로 안 될 말이다. 같은 여자인 아델이나 엘리시아는 상관없지만 현수 앞에서 다 벗은 채 검무를 출 수는 없다.
이건 목숨과도 상관없다. 여자로서의 수치심 때문이다.
그렇기에 잠시 대꾸하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와이번의 날카로운 발톱이 현수를 잡아채려 한다.
“어림도 없다. 이놈―!”
쐐에에엑―! 까깡―!
분명 살과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금속성이 난다. 발톱 주위를 둘러싼 단단한 비늘 때문이다.
꿰에엑―!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통증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허공으로 치솟았던 와이번이 괴성을 지르는가 싶더니 다시 내려온다.
“좋아, 그냥은 안 된단 말이지?”
그런데 움직임이 조금 전과는 다르다. 이번엔 내려서면서 날카로운 이빨로 현수를 잡아챌 모양이다.
“흥! 어림도 없지.”
현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놈이 냄새나는 아가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꿰에에엑―!
위협용 괴성을 지르는데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코가 깨질 것만 같은 악취에 아찔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목숨이 걸렸는데 어찌 냄새 때문에 피하겠는가!
“야아아압―!”
별 볼일 없는 상대라 생각하고 달려들었던 와이번은 현수의 검끝으로부터 쭉 뻗어나오는 검기를 느낌과 동시에 몸을 빼려 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퍼어억―!
꿰에에에에에엑―! 꿰에에에에엑―!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튐과 동시에 길고 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곧바로 다시 치솟은 와이번은 흉흉한 기세로 다시 쇄도했다. 감히 제 몸에 상처를 낸 적을 짓이기려는 것이다.
그렇게 이십여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와이번은 먹이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공격을 가했다.
한편 현수는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놈이 다가서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와 동시에 마법 하나를 준비했다.
웬만해선 물러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때문이다.
쐐에에에에엑―!
꿰에에엑―!
퍼억―!
검기가 와이번의 살 속을 파고드는 순간 현수가 입술을 달싹인다.
“멀티 윈드 커터!”
알베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샤벨타이거의 사체를 보관하기 위한 구조물을 만들 때 사용했던 마법이다.
아름드리나무조차 맥없이 자빠지게 만들었던 멀티 윈드 커터는 거침없이 와이번의 가죽을 파고들었다.
이때 현수의 위치는 줄리앙 등이 볼 수 없는 곳이다.
아무튼 마법이 구현됨과 동시에 와이번의 등가죽 곳곳에서 선혈이 튀어 올랐다.
꿰에에에엑―! 꿰에에에에엑―!
와이번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가 싶더니 현수를 째려본다. 이에 올 테면 와보라는 듯 검을 휘둘렀다.
이때 와이번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적이라 판단했다. 폴리모프한 드래곤에게 잘못 달려들었다 느낀 것이다.
꿰에에에에엑―!
와이번 따위가 어찌 드래곤에게 덤비겠는가!
그렇기에 길고 긴 괴성을 지르고는 쏜살처럼 달아났다.
한편, 절벽에 바싹 달라붙은 채 현수와 와이번의 대결을 지켜보던 줄리앙의 뇌는 하얗게 비어버렸다.
B급 용병인 자신은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고, A급 용병 랄프도 소드 익스퍼트 중급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방금 전 현수의 검끝에서 뿜어진 선명한 검기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소드 유저인 C급 용병으로 알고 하찮게 보곤 했다. 그런데 아니다.
하인스는 자신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고수인 것이다.
줄리앙이 멍한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볼 때 엘리시아는 몽롱한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후엘 자작가는 늘 몬스터들의 침공을 당하며 산다.
그렇기에 다른 영지에 비해 기사들도 많고 병사들의 조련 상태도 지극히 양호하다.
문화 시설이라곤 하나도 없는 산골 영지에서 할 일이 무어 있겠는가! 그렇기에 늘상 연병장에서 기사와 병사들이 훈련받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다.
그것 외에는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후엘 자작가의 자랑인 ‘검은 철퇴 기사단’의 단장인 라임하르트 남작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다.
본시 평민이었으나 실력을 인정받아 귀족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와 비교하였을 때 현수가 훨씬 더 강하다는 느낌이다. 물론 사실도 그렇다.
만일 자신의 판단이 맞다면 현수는 어느 영지에서든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될 수 있다.
지금껏 요리나 잘하는 하찮은 평민으로만 알았다. 그렇기에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싹 사라진다.
대신 흠모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돋기 시작했다. 아울러 하인스를 자신의 남자로 만들어볼 생각을 품었다.
이건 아델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보다는 한 계급 위인 평민으로만 알았던 C급 용병 하인스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 것이다.
아직은 평민이다. 따라서 저 남자를 내 남자로 만들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와이번이 사라진 후 현수가 피워놓은 모닥불 위에 장작을 더 얹자 불길이 다시 올라온다. 그 순간 줄리앙이 다가왔다.
“하, 하인스……!”
“어! 왜?”
“너, 너……! 어떻게 된 거예요? 검기라니요?”
줄리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아아! 그거……? 열심히 수련한 결과야.”
“근데 왜 C급이에요? 그 실력이면 특A 내지는 S급도 충분하잖아요.”
“B급 이상이면 국경 넘는 게 힘들다며? 그래서 일부러 C급으로 신청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