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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217화 (217/1,307)

# 217

“……!”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하인스를 바라본 줄리앙이 고양이처럼 눈빛을 빛낸다.

“지금껏 날 속인 거예요? 내 알량한 실력을 속으로 비웃은 거예요? 그런 거예요? 흥!”

“아니, 네 나이에…… 그것도 여자가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면 대단한 거잖아. 근데 내가 왜 널 비웃어?”

“……!”

줄리앙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행은 아무런 말도 없이 불길을 쬐었다. 그러는 동안 현수는 골고루 타도록 뒤적뒤적거렸다.

불빛에 비친 현수의 모습을 바라보는 세 여인의 심사는 모두 복잡했다. 각자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수는 활활 타오르는 장작들을 넓게 펼쳤다.

“자, 잠깐만 일어나요.”

여인들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순순히 일어났다.

현수는 잠시 기다렸다가 부지런히 흙으로 덮었다.

“왜……?”

엘리시아가 연유를 물으려 하자 현수가 먼저 입을 연다.

“아까 와이번이 우릴 공격한 이유는 불길 때문입니다. 이걸 밤새 켜놓으면 어떤 몬스터가 공격할지 몰라요.”

“그렇다고 불을 끄면 추워서 어떻게 해요?”

어느덧 엘리시아의 말끝에는 ‘요’자가 붙기 시작했다. 하나 둔감한 현수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여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두고 보면 압니다.”

평탄하게 자리를 정리했을 때엔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희미한 별빛만이 있기에 제 손가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진한 어둠이다.

“자, 이제 잡시다. 여기 누워요.”

먼저 눕자 엘리시아가 더듬거리더니 현수의 앞쪽에 자리를 잡는다. 줄리앙은 등 뒤에, 그리고 아델은 엘리시아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약간 추운지 엘리시아가 몸을 웅크린다.

“조금만 기다려 보면 왜 여기서 자라는지 알 겁니다.”

“아……!”

현수의 말처럼 땅속에서 온기가 올라온다. 엘리시아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이를 본 사람은 현수뿐이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오올 아이 마법을 시전 중이기 때문이다.

잠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런데 약간 추운 듯 조금씩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다 결국 엘리시아는 현수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줄리앙은 옆으로 누운 현수의 등에 바싹 달라붙었다.

아델은 엘리시아의 뒤쪽이다.

천하절색이라 할 만한 미녀들 셋이다. 하지만 현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인들의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이다.

하나 어쩌겠는가! 땅속에서 온기가 올라오지만 위에서 내려오는 냉기가 장난이 아니다.

자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추워서 그런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보듬어주었다. 그런데 점점 추워진다. 그런 가운데 여인들 셋 모두 잠이 들었다.

아마 오늘 겪었던 일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쏘러리스의 암컷으로 전락할 뻔했던 날이 아니던가!

게다가 와이번의 공격도 받은 날이다.

너무 많은 심력을 쓴 날이기에 지쳐서 곯아떨어진 것이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현수는 팔목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앱솔루드 배리어!”

샤르르르릉―!

눈에 보이지 않을 결계가 쳐지자 냉기가 훨씬 덜하다. 그럼에도 아델이 달달 떤다.

“컴퍼터블 템퍼러처!”

공기가 따뜻해지자 비로소 여인들의 호흡이 고르게 변했다. 덜덜 떨던 아델 역시 웅크렸던 몸을 편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결계의 가장 바깥쪽으로 갔다. 여인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이다. 그리고 잠을 자지 않아도 되기에 마나를 모을 생각인 것이다.

짹, 짹, 째짹……!

이른 새벽, 풀잎마다 이슬이 맺혔으나 엘리시아 등은 여전히 곯아떨어져 있다. 자는 동안 뒤척여서 그런지 발가벗은 몸이 모두 드러났다.

하나 현수의 시선은 무심했다. 셋 중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함……!”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아델이다.

“에그머니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아델은 걸치고 있던 넝마들이 뭉쳐 발가벗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조치를 취한다.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다음엔 줄리앙이 깼다. 그녀 역시 화들짝 놀라며 얼른 옷깃을 여몄다. 엘리시아도 그랬다.

셋은 절벽 가장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현수를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근육이 장난이 아니다.

조각 같은 상체를 드러낸 채 검무를 추고 있는 현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어제 와이번을 상대하면서 문득 얻은 깨달음이 있어 신새벽부터 검무를 추고 있는 현수의 상체는 땀이 맺혀 번들거린다.

햇볕이 비추자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여인들이 멍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 다 일어났어요?”

“네, 덕분에 잘 잤어요. 고마워요.”

“저도요.”

“나도 잘 잤네요. 어젠 고마웠어요.”

모두 존댓말을 쓰고 있다. 하지만 현수는 둔감하다.

“자, 그럼 이제 슬슬 가볼까요? 참, 엘리시아 아가씨! 발은 좀 어때요?”

“아직 아파요. 그치만 참아볼게요.”

“많이 아프면 말해요. 어제처럼 업어줄 테니.”

“네, 고마워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다소곳해진 엘리시아를 바라본 현수는 싱긋 미소 지었다.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잠시 후, 일행은 절벽 아래로 무사히 내려섰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숲속 길로 접어들었다.

이때 현수의 등에는 엘리시아가 업혀 있다. 잘못 디디는 바람에 발바닥에 새로운 상처가 난 때문이다.

어제의 엘리시아는 현수의 등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자신을 제대로 업기 위해 허벅지를 잡은 손도 신경 쓰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든든한 등에 엎드려 행복한 상상을 하느라 히죽히죽 웃고만 있다.

뒤따르는 줄리앙은 이런 모습에 화가 났다. 하지만 줄리앙 본인은 왜 화가 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는 귀족 아가씨이다. 하여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약 3시간 후, 일행은 어제의 장소에 당도했다.

“줄리앙! 여기서 기다려 줘. 내가 가서 옷을 가져올게.”

“네!”

현수가 건넨 검을 받아 쥔 줄리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턴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수는 즉각 어제의 장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이런 제길……! 우릴 포기한 건가? 하긴…….”

나직이 투덜거렸지만 용병들의 마음이 이해된다. 남아 있으면 쏘러리스의 공격을 받아 모두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빈손으로 되돌아오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요? 옷이 없대요?”

“아뇨. 모두 떠난 모양이에요.”

“네에……?”

“어쩜 그럴 수가……! 아가씨가 쏘러리스에게 잡혀갔는데 그냥 다 떠난 거예요?”

아델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거기 있으면 쏘러리스의 공격을 받아 모두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그랬을 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아델은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근데 마냥 대꾸만 해주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자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얼른 떠납시다.”

“네에.”

엘리시아가 가장 먼저 다소곳한 대답을 한다. 그리고 현수가 등을 내밀자 선선히 업히기까지 한다.

“자아, 이제 갑시다.”

현수가 앞장서고 두 여인이 좌우를 따랐다.

현수는 혹시 있을지 모를 쏘러리스의 공격을 대비하여 와이드 센스 마법을 구현시킨 상태로 전진했다. 새벽에 마나를 충분히 모았기에 하루 종일 그러고 가도 상관없을 것이다.

쏘러리스들은 자신의 영역을 통과하는 현수 일행을 멀찌감치서 바라만 보았다. 감히 덤벼들 수 없는 존재로 여긴 것이다. 하여 무사히 놈들의 영역을 통과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샤벨타어거의 습격이 세 번, 멘티코어의 공격 두 번 등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현수의 검이 춤을 췄다.

밤에는 가고일이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원수진 일도 없기에 겁먹고 도망갈 길을 열어준 것이다.

현수는 와이드 센스 마법으로 몬스터가 있는 곳을 피해 다녔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혈로를 뚫어야 했을 것이다.

숲을 완전히 벗어나는 데 걸린 시간은 엿새이다.

울창하던 숲이 드문드문해지는가 싶더니 탁 트인 벌판이 드러나자 줄리앙 등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

현수가 있었지만 그간 과도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여 근육이 뭉쳐진 상황이다. 그러다 이제 마음 놓아도 될 곳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것이다.

나후엘 자작가를 향해 두어 시간쯤 걸었을 때이다.

“왜 멈췄어요? 혹시 몬스터예요? 여긴 벌판인데?”

엘리시아가 고개를 쫑긋거린다.

“아니요. 누가 오네요.”

“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곁에 있던 줄리앙까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엘리시아의 말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리앙! 여기서 기다려.”

“왜요?”

“아무래도 엘리시아 아가씨를 찾으러 오는 행렬 같아. 가서 옷을 얻어 와야 하잖아.”

“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줄리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시아를 내려놓고 달리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실종된 자작가에서 파견한 행렬이다.

“멈추십시오.”

“아니……? 너는 하인스? 하인스! 어떻게 된 거야?”

행렬에 끼어 있던 랄프가 반색하며 튀어 나온다. 하인스가 쏘러리스에게 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 랄프 대장님.”

“그래, 몸은 괜찮아?”

“물론입니다.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아직 쌩쌩합니다.”

“자네, 혹시 엘리시아 아가씨 못 봤나?”

“엘리시아 아가씨요? 당연히 봤죠,”

“휴우∼! 다행이군. 그래, 안전하신가?”

랄프가 눈에 뜨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네! 엘리시아 아가씨는 안전합니다. 줄리앙도 괜찮고요. 아델이라는 시녀 또한 괜찮습니다.”

“줄리앙도……?”

줄리앙 역시 희생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현수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근데 왜 안 모시고 왔나?”

현수에게 말을 건 이는 전형적인 기사 복장을 한 40대 남자였다. 현수가 누구냐는 눈빛을 하자 랄프의 입이 열린다.

“아! 인사드리게. 나후엘 자작가의 검은 철퇴 기사단을 이끄는 라임하르트 남작님이시네.”

“C급 용병 하인스라 합니다. 엘리시아 아가씨를 모셔올 수 없었던 것을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 이유는 뭐지?”

“그게… 여기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 좋아, 날 따라오게.”

현수와 라임하르트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자아, 이젠 말할 수 있겠지?”

“네, 아가씨를 모셔올 수 없었던 것은 의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복을 준비해 주시면 가서 모시고 오겠습니다.”

“뭐라? 의복이……?”

돈 몇 푼을 요구했다면 단칼에 베어버릴 요량이었던 라임하르트 남작의 얼굴엔 예상 밖이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네, 이야기 들으셨겠지만 쏘러리스들에게 납치당하여 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때 의복이 모두 찢어져서 보다시피 제 윗도리를 빌려 드렸습니다.”

현수의 발달된 상체를 바라본 라임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쏘러리스들이 여자를 납치하여 미노타우르스를 낳도록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으음, 알았네. 여기서 잠시 기다리게.”

“세 벌이 필요합니다.”

“알겠네.”

현수가 라임하르트로부터 받은 의복을 가지고 가서 엘리시아 등을 데리고 온 것은 30분쯤 지난 뒤였다.

“엘리시아 아가씨!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근데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자작가의 시종장이 눈물까지 흘리며 달려왔다.

“할아범, 질질 짜지 마. 난 괜찮아.”

의젓하게 대답한 엘리시아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작가로 귀환했다.

그러는 동안 라임하르트가 현수에게 다가와 주의를 주었다.

지난 며칠간 발가벗은 엘리시아를 업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혼삿길에 지장이 있을 것이란 뜻이다.

줄리앙과 아델도 함구를 명령 받았다.

10장 안 가면 안 돼?

“하인스! 정말 고마웠어요. 그날 날 구해준 걸 평생 잊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마쳐진 후 숙소로 돌아가려던 현수를 부른 엘리시아가 한 첫마디였다.

그리곤 귀족가의 여식답게 치마의 양쪽을 잡고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펴는 우아한 예절을 갖췄다.

“제가 아가씨를 구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오는 동안 배려해 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내일, 아버지께서 용병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를 만든다고 해요. 그러니 빠지지 말고 참석해 주세요.”

“네, 별일 없는 한 참석하겠습니다.”

엘리시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돌아갔다. 그런 그녀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 있었다.

옷을 다 입고 만나니 새삼 부끄러웠던 때문이다.

율리안 영지에 도착한 직후 엘리시아는 목욕을 하고 지난 며칠간 꿈에도 그리던 옷을 입었다.

이곳에 당도하기 직전까지 걸치고 있던 의복은 본인의 것이 아니라 시종들이 여벌로 준비했던 남자의 옷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엘리시아는 곧바로 자작에게 경과 보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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