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샤르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스러졌다.
* * *
“흐음! 역시…….”
현수는 공기가 텁텁하다 느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모스크바는 서울보다 오염도가 훨씬 덜하다. 그럼에도 아르센 대륙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 거기서의 생활은 일종의 바캉스라고 생각하자.”
이른 아침이지만 공기가 뜨뜻미지근하다. 낮이 되면 얼마나 더워질지 충분히 짐작된다.
수도원은 나선 현수는 천천히 걸으며 풍광을 구경했다.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했던 모스크바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호텔에 당도하여 객실로 올라갔다.
철컥―!
“미스트르 킴, 나빠요!”
“헉……! 이, 이리냐. 이리냐가 어떻게 여길……!”
소파에 앉아 있던 이리냐가 벌떡 일어나는가 싶더니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째려본다.
그런 이리냐의 두 눈이 습기로 그득하다.
이리냐의 등장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현수는 깜짝 놀라는 표정만 지었을 뿐이다.
“흥! 밤새 어디에 있었어요? 설마 나 말고 다른 여자와……. 설마 그런 거예요? 미스트르 킴!”
“이, 이리냐!”
현수는 느닷없는 등장에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리냐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수가 부인하지 못한 것은 밤새 다른 여자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흐흑! 미워요! 정말 미워요. 오면 온다고 전갈이나 해주지. 핸드폰은 뒀다 뭐해요? 이리냐는 밤새 여기서 기다렸어요.”
“……!”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이 간 날부터 지금까지 매일 울었어요. 봐요. 내 눈이 얼마나 퉁퉁 부었는지.”
눈을 보여주는데 현수의 눈엔 그저 예쁘기만 하다. 하여 뭐라 말하려는데 이리냐가 먼저 입을 연다.
“나는 오로지 미스트르 킴만 생각하는데……. 그래서 한국말도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근데 미스트르 킴은 다른 여자와……. 흐흐흑! 이리냐 너무 슬퍼요. 흐흐흑……!”
“끄으응……!”
뭐라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이리냐가 털썩 주저앉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사내에게 있어 가장 저항하기 어려운 무기가 바로 여자의 눈물이다. 현수 역시 다를 바 없어 우물쭈물하고만 있었다.
“흐흑!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을 정말 사랑한단 말이에요. 흐흑! 그런데 미스트르 킴은……. 흐흐흑!”
이리냐는 고개 숙인 채 울었다.
한편, 현수는 겨우 이틀간의 만남을 이토록 확장 해석하는 이리냐의 순정을 어찌하나 싶은 생각이다.
강연희와 권지현, 그리고 이수정과 이수연, 게다가 이은정과 조인경까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수정과 수연은 이현우와 조경빈이 알아서 잘 가로채 줄 것이다. 은정 역시 민주영의 적극적인 대시에 마음이 변할 것이다.
남은 것은 연희와 지현, 그리고 인경이다.
이중 조 대리는 천지건설의 내로라하는 직원들이 수시로 대시하니 마음의 부담이 적다.
결국 연희와 지현 중 누굴 선택하느냐로 좁혀진다. 그런데 그 선택이 매우 어렵다.
지현을 선택하자니 연희가 마음에 걸리고, 연희를 선택하면 지현의 마음이 어떨까 싶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차라리 한국이 아닌 아랍 국가였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의 사회관습은 일부일처제이다.
여기에 이리냐까지 이렇듯 과감하게 달려드니 난감했던 것이다.
“이리냐! 울지 마!”
현수가 일으키자 기다렸다는 듯 이리냐의 교구가 품속으로 무너져 내린다.
“흐흑! 미스트르 킴, 정말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당신만 사랑할게요. 흐흐흑!”
이리냐를 품에 안았던 현수는 흠칫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부터는 완전한 한국어였던 때문이다.
“이, 이리냐……!”
“나하고 결혼 안 해줘도 돼요. 버리지만 말아요.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이리냐는 그간 배운 한국어를 다 써먹었다. 제법 많이 배운 듯하다. 결국 현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리냐의 한국어가 꼬이기 시작한 때문이다.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의 애예요. 낳아줄게 사랑해 줘요.”
“뭐어……? 하하하! 하하하하!”
“미스트르 킴! 왜……?”
“하하! 하하하하!”
현수가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리자 이리냐의 표정이 샐쭉해진다. 자신은 진심을 담아 사랑을 고백했는데 개그 프로그램을 본 듯 웃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현수를 째려보았다.
“이잇!”
“하하! 으읍……!”
생각만으로도 너무 웃겨 또 웃으려던 현수의 입술이 말랑말랑한 무엇엔가 덮였다. 그리곤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다행히 뒤엔 푹신한 침대가 있어 뒤통수가 깨지진 않았다.
이리냐와의 달콤한 키스가 끝난 것은 3분이 지나서였다.
드디어 목적하던 바를 달성했다는 듯 이리냐는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이제 도장 찍었으니까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의 여자예요.”
“뭐어?”
누군가 뭘 잘못 가르쳐 준 모양이다.
키스 한 번에 임자가 결정된다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탤런트들은 남편과 아내가 여럿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끝난 거라구요. 난 니 거야.”
이리냐는 윙크를 하며 손으로 권총을 날린다.
“크큭……! 크크크큭!”
현수는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냐의 표정과 한국어, 그리고 몸짓이 너무 웃겼던 때문이다.
이런 건 대체 누가 가르쳐 줬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왜 자꾸 웃기만 해요? 난 심각하기만 한데.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을 사랑해요. 이제 난 당신 거예요.”
“이리냐! 여기 앉아봐.”
살살 달래는 수밖에 없다 생각한 현수의 다정스런 말에 이리냐의 표정이 스르르 풀린다.
그러자 그러난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네, 이젠 이리냐를 먹어도 돼요. 달콤하게 먹어요.”
현수는 대체 누가 이리냐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리냐! 그동안 한국말 배우느라고 애썼어.”
“그쵸? 한국말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배우느라 힘들어요.”
진심이라는 듯 힘들어 지쳤다는 표정을 짓는다.
“근데 조금 엉터리야. 개인 교습했지?”
“네, 어떻게 알았어요?”
“보면 알아! 그러니까 제대로 된 어학원에 가서 배워.”
“근데 노보로시스크엔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데가 없어요.”
이리냐가 말은 듣고 싶은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으음……!”
듣고 보니 과한 요구를 한 듯하다.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아직 영향력 큰 나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그건 알았어. 어쨌든 나중에라도 제대로 된 곳에서 배워. 알았지?”
“네, 그럴게요. 사랑해요. 날 가져요. 애 낳을게요. 우리 행복해요. 뽀뽀해 줘요. 아잉! 난 좋아요.”
기억나는 말은 한 번씩 다해보는 모양이다. 웃겼지만 현수는 애써 참았다. 이리냐의 진심 어린 표정 때문이다.
둘은 룸서비스를 이용하여 아침 식사를 했다. 음식이 맛은 있었지만 현수는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이리냐의 마음을 돌릴 것인가를 생각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쳤을 때 초인종이 울린다.
띵똥―!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문을 열자 덩치 큰 녀석 둘이 보인다.
“누구……?”
말을 마치기도 전에 중후한 50대 초반 신사가 모습을 나타낸다. 모스크바의 밤을 관장하는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이다.
“하하! 반갑네.”
“아! 미스터 이바노비치!”
“그냥 알렉세이라 부르게.”
“네, 안으로 드시지요.”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거칠 것 없다는 몸짓으로 들어선다. 하긴 모스크바의 지배자이다.
그런 그의 눈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이리냐가 뜨였다.
몸에 착 달라붙는 원피스 차림이다. 몸매는 물론이고 각선미까지 확연히 드러난다.
“오오! 이런……! 내가 즐거운 시간을 깬 건가?”
“아닙니다. 방금 아침식사를 마쳤습니다.”
“그래, 음식은 맛이 있었는가? 하긴, 저런 미인과 함께 있었으니 맛이 있었겠군.”
이리냐는 고개를 조아린 채 감히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름만 듣고도 모스크바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 지르코프는 이리냐에게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줬다. 자신이 천거하여 현수의 여자가 되었으니 자신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에게 자신에 대한 말을 할 때 최대한 잘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리냐 파블로비치 체홉이라고 했나?”
“네, 보스! 이리냐라 불러주세요.”
“예쁘군. 행복한가?”
“네……? 아, 네에.”
부끄럽다는 듯 들었던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뇌쇄적이다.
“들어서 알겠지만 김 사장은 내게 귀빈이네. 잘 모시게.”
“물론입니다. 보스!”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활짝 웃은 이바노비치가 현수에게 시선을 돌린다.
“김 사장, 출국하기 전에 시간 좀 있지?”
“물론입니다.”
“그럼 나와 같이 모스크바 구경이나 하세.”
“네, 그러지요.”
현수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야 이리냐와의 곤혹스런 시간이 끝나기 때문이다.
모두 여섯 대의 차가 움직였다. 그중 네 번째 차 뒷좌석에 현수와 이바노비치가 앉았다.
“먼저 우리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들어갈 건가? 30일까지면 아직 휴가가 남았는데…….”
역시 정보가 빠르다.
“프랑스를 들러서 갈 생각입니다. 거기 가볼 데가 있거든요.”
“그런가? 그건 그렇고 드모비치로 보내는 품목이 조금 다양화했으면 하네.”
매달 5천만 달러어치를 대한약품에서 생산하는 각종 의약품과 듀 닥터, 그리고 스피드와 엘딕으로 보내면 소화시키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중입니다.”
“새로운 것이라면 어떤 건가?”
“지난번에 모스크바와 왔을 때 느낀 점이 있었거든요. 아마 공전의 히트를 칠 겁니다.”
“그래? 기대해도 되는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현수가 자신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바노비치는 더 물을 생각조차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웬만한 신뢰가 바탕되지 않았다면 이런 믿음은 없었을 것이다.
같은 순간, 현수는 대학약품의 김지우 박사를 믿어본다는 생각을 했다. 그라면 능히 쉐리엔으로부터 필수 성분들을 뽑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엔 날씬하고 아름답던 여인들이 펑퍼짐한 아줌마로 바뀌는 나라가 러시아이다.
사실 이건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도 그렇고 미국 또한 그러하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브라질 또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인류 전체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11장 국익을 위하여
쉐리엔은 그런 여인들을 처녀 시절에 버금가는 몸매로 바뀌게 하는 신약 중의 신약이 될 것이다.
없어서 못 팔고, 복용하지 못해 날씬해지지 않는 약이나 식품이 될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떤 기구라도 쉐리엔의 성분을 위법하다 판단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행한 것은 김지우 박사가 민 사장의 부친이 여러 번 발걸음하여 스카웃한 인재라는 것이다.
외국에 유학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못한 토종 박사이기는 하지만 실력만은 이 세상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렇기에 이제 더 이상 살이 찌지 않는다거나, 찌어 있던 살이 빠지는 의약품 내지는 건강보조식품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전 세계를 상대로 판매될 것이다. 대한약품의 미래는 밝다 못해 빛나는 수준이 될 것이다.
‘생각난 김에 김 박사와 통화 한번 해야겠구나.’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이바노비치를 바라본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보스가 입을 연다.
“러시아에 기반을 마련함은 어떤가?”
“네? 기반이라니요?”
“한국에서도 가정을 꾸려야겠지만 러시아에도 집 한 채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네.”
“네, 그게 무슨……?”
“이리냐와 살 집을 선물하고 싶네.”
“네?”
현수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자 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짓는다.
“마음에 들기 바라네.”
“보스……!”
“내 집 근처에 상당히 쓸 만한 집이 있네. 마침 매물로 나와 샀네. 둘러보고 마음에 안 드는 곳 있으면 고치게. 비용은 내가 대지.”
“보스……!”
현수를 곁에 두고 싶다는 뜻이다. 부하도 아닌 사업의 거래 상대인 귀빈으로!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어찌 이런 결과를 예상할 수 있겠는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무기를 반입해 주는 대가로 이미 과분한 거래를 약속받았다. 그럼에도 이런 후의를 보내는 저의가 뭘까 싶었다. 하지만 상념은 길지 않았다.
‘하긴, 어펜시브 참 마법이 대단하긴 하지.’
지금 이 순간 이바노비치의 마음엔 현수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본인이 보유한 부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 큰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대지 1만 평, 건평은 이천 평 정도 되네. 침실 열 개와 화장실 열두 개, 그리고 서재 등이 있네. 거기에 작은 수영장과 오디토리움도 있지.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