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
이바노비치가 잠시 말을 끊었지만 현수는 가로채지 않았다. 지금 말하는 재미를 느끼는 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네를 위해 한국의 교보문고로부터 책도 수입하고 있지. 장서 10만 권이면 제법 괜찮은 도서관이 될 것이라 믿네.”
“……!”
현수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자신의 배려에 감격한 것이라 여긴 이바노비치가 한마디 더 한다.
“대신 언제든 내가 방문하면 위스키 한잔은 주어야하네. 그럴 수 있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공짜로 뭘 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일행은 저택의 입구에 당도하였다. 생각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
일단 각층의 층고가 한국과는 다르다. 거실과 연회장이 있는 일층은 층고만 10m 정도이다.
2층과 3층 역시 여유로운 층고이다. 그렇기에 불과 3층짜리 건물이 밖에서 볼 때엔 최소 7층으로 보인다.
이바노비치가 안내하는 뒤를 따르는 현수와 이리냐의 눈빛은 상반되어 있다.
현수는 상당히 부담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같은 저택이라곤 상상치 못했던 때문이다.
이야길 들어보니 제정러시아 시절 공작이 머물던 곳이다. 혁명 당시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망가져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드모비치 상사에서 이걸 사들여 복원시켰다. 그 과정에서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냉난방 설비까지 완벽하다.
돈으로 따지자면 아무리 못해도 수십억은 족히 갈 듯한 예술품이다. 물론 한국보다 집값이 싼 러시아 기준이다.
이런 상황이라 부담스러운데 이리냐는 아닌 듯하다. 무슨 이야길 들었는지 유난히도 침실에 신경 쓰고 있다.
마스터 침실은 방 하나의 규모가 30여 평이다.
이 방의 중앙부엔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다. 킹사이즈 정도 되는 최고급 베드이다.
반투명 휘장이 쳐져 있고, 안에는 최상품 침구가 마련되어 있다. 물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신품이다.
누가 봐도 귀족의 침실이다.
현수는 언제 이런 집에서 자보겠냐는 생각에 구경만 하고 지나쳤다. 좋기는 하지만 갖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본인이 돈 주고 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리냐는 아니다. 현수가 저택을 모두 구경하고 나올 때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침실의 요모조모를 따지고 있었다. 자신이 안주인이 될 집이라 생각한 듯하다.
“어때, 마음에 드나?”
“보스의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현수는 정중히 고개 숙여 사의를 표했다.
“러시아에 오거든 이제 호텔에 머물지 말고 이곳을 쓰게. 이젠 자네 집이니.”
“네에, 감사합니다.”
이바노비치는 자신의 선물을 선선히 받아주는 현수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흡족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도저히 레드 마피아의 보스라곤 생각할 수 없는 인자한 표정이다.
잠시 후 변호사가 와서 서류를 건넨다. 저택의 소유권이 현수에게 이전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이바노비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게 사람 된 도리라 생각한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무사히 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리냐가 하루만 더 머물라고 애원을 했지만 프랑스 에어라인 노조가 파업을 결의한 상황이다.
다시 말해 내일 예정된 비행기가 뜰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예정된 날에 킨샤사 지부에 도착하지 않으면 직장을 잃을 수 있다는 말에 이리냐는 눈물을 머금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나가던 그 순간 이리냐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 하지만 현수는 전혀 모른다.
드골 공항에 도착한 현수는 지도를 보고 곧장 프랑스의 북서부에 위치한 브르타뉴(Bretagne) 주의 주도 렌(Rennes)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탔다.
아더왕이 엑스칼리버를 뽑았다는 브흐실리온드(Broc liande) 숲이 있는 주이다.
물어물어 멀린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곤 실망했다. 대마법사의 묘라고 하기에 너무도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멀린의 유해는 아공간에 소중히 모셔져 있다.
그것도 미스릴로 만든 관 속에 담겨 있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무덤은 분명 시신이 없는 가묘이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은 이유는 혹시라도 스승인 멀린의 유품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마나 디텍션 마법으로 무덤의 내부를 살펴본 바에 의하면 안에는 자그마한 목걸이 하나만 있다.
아티팩트인가 싶어 확인해 보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곁에 세워둔 안내 간판을 읽어보고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써놓은 때문이다.
‘하긴 스승님이 아르센 대륙의 인물이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현수는 실소를 머금은 채 쓸쓸히 발걸음을 옮겼다.
파리로 되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현수는 킨샤사에서의 할 일을 점검했다. 레드 마피아의 컨테이너들을 무사히 통관시켜 주는 게 가장 급선무이다.
다음에 할 일은 이실리프 농장을 본격적으로 조성하는 일이다.
‘흐음, 도착 즉시 정글 개간부터 해야 하는군.’
5천만 평에 달하는 땅에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있겠는가!
무분별한 벌목보다는 효용의 극대화를 생각해 봐야 한다.
“잘만 하면 건축 자재를 절약할 수 있겠지?”
어찌할 것인가를 고심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선다.
“……?”
“저어, 혹시 한국인이신가요?”
현수에게 말을 건 사람은 삼십대 중반으로 보인다. 아까부터 맥주를 홀짝이던 몇 자리 건너에 앉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네에,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현수의 한국어가 반갑다는 듯 환히 웃는다.
“역시,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그쪽 덕분에 200유로 벌었습니다.”
술 냄새가 확 끼쳐 왔지만 웃는 낯에 어찌 침을 뱉으랴!
“절 두고 내기를 하신 모양이군요.”
“네, 나는 그쪽이 한국인이라 했고, 저쪽의 제 동료들 가운데 하나는 일본인, 그리고 나머지는 지나인이라고 했거든요.”
“확실한 한국인이라고 전해주십시오.”
별일 아니기에 씩 한번 웃어주었다.
“네에, 아무튼 감사합니다.”
사내가 가자 현수는 다시 상념에 잠겼다. 하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저어, 괜찮으시다면 저희 자리로 한번 와주시죠.”
“네? 제가 왜요?”
“동료들이 계속해서 우겨서요. 오시면 제가 맥주 대접하겠습니다.”
보아하니 100유로씩 돈을 내려니 배가 아픈 모양이다.
“그러죠.”
현수는 흔쾌히 일어섰다. 술 마신 사람 상대로 실랑이 벌이기 싫어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난 우정훈이라 합니다.”
“네, 김현수라 합니다.”
“아! 진짜 한국인이시군요. 쩌업―!”
100유로 날아갔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박창민입니다.”
“네, 김현숩니다. 반갑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참,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강전호라 합니다. 그리고 이거…….”
강전호가 약속대로 맥주를 내놓는다.
“네, 감사합니다.”
“안주는 이거 드시면 됩니다.”
좌석과 좌석 사이 탁자엔 프랑스 산 과자가 놓여 있었다.
“김현수 씨 덕에 100유로 날렸습니다.”
“그러게 왜 그런 내기를 하셨습니까?”
현수가 웃는 낯을 하자 우정훈이 지갑에서 100유로를 꺼내 강전호에게 건넸다. 박창민 역시 돈을 내놨다.
“하핫! 오늘 김현수 씨 덕에 수입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네에.”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한 모금 들이켰다. 맥주 맛이 그저 그렇다. 상표를 보니 크로넨버그 1664란 놈이다.
“맥주 맛 별로지요?”
“네, 그냥 평범하네요.”
“그나저나 김현수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요? 올해 스물아홉입니다.”
“네에? 설마요.”
“제가 조금 동안이지요?”
현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스물아홉입니다.”
강전호의 말에 현수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인 때문이다.
“저는 김현수 씨와 반대로 노안이죠?”
“솔직히 저보다는 몇 살 위로 알았습니다.”
“에휴!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자식 때문입니다.”
“네에?”
무슨 영문인지 모르기에 저도 모르게 반문한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맥주를 마시고 있던 셋은 같은 회사 동료들이다.
대한민국의 재벌사 가운데 하나인 태백그룹의 직원들로 프랑스 현지 법인 소속이다.
이들 셋은 현재 귀국하는 중이다. 그간 벌여왔던 일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문책 받으러 간다고 했다.
돌아가면 보나마나 대기발령 내지는 해고라 했다.
혈기 왕성한 강전호와 우정훈은 그 꼴만은 당하지 않으려 사표를 쓸 생각이다. 박창민은 여길 그만두면 마땅히 갈 속이 없어 어찌할 것인지 고심 중이다.
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를 물어본 현수는 분노를 느꼈다.
이들이 공들여 거래를 트려던 회사는 프랑스 선주사 가운데 하나인 ‘CMA 오머런’이란 곳이다.
지난해 초에 처음 접촉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온갖 공을 다 들였다. 8만 톤급 석유제품 운반선 세 척과 2만 TEU급 컨테이너선 네 척을 수주하기 위함이다.
엄청난 액수의 수주가 될 것이기에 태백그룹은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접촉이 계속되는 동안 친분 관계는 점점 깊어졌다.
여기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이 회사의 부회장이자 사주의 장남인 세바스티앙 오머런이 한류의 팬이다. 세바스티앙은 한국의 5인조 걸그룹 다이안의 리더를 특히 좋아한다.
하여 이사로 승진되어 본국으로 되돌아간 전임 지사장은 한국으로부터 그녀의 브로마이드, 팜플렛, 사진 등을 공수했다.
작년엔 여름휴가를 한국으로 간다하여 공연 맨 앞자리 입장권까지 구해서 줬다.
그 결과 수주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하여 법률적인 문제가 언급되어 있는 최종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이를 위하여 지사장은 이들 셋에게 소소한 부분들에 대한 이견을 좁히라는 명령을 내리고 귀국했다.
그리고 고대하던 계약서가 당도했다. 그걸 들고 세비스티앙에게 가져가기만 하면 회장이 사인할 것이다.
형식적인 절차이다. 너무 늙어서 일선에서 물러서기 일보직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CMA 오머런사의 실세가 세바스티앙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되었다.
세바스티앙이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 다이안의 리더 서연과 하룻밤 즐겼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서연은 현재 태백그룹 계열사 중의 하나인 식음료사의 메인 CF모델로 활동 중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데려오라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의 조선사와 계약하겠다고 한다.
일본의 오시마조선소에서는 일본의 걸그룹인 AKB48의 멤버 가운데 마츠바라 나츠미와 미야자키 미호 등 어떤 멤버든지 지목만 하면 즉시 데려오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태백조선소와 계약을 하려는 이유는 서연이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바스티앙은 55세, 다이안의 리더 서연은 21세이다.
강전호와 우정훈, 그리고 박창민은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삭이며 무리한 요구라는 말을 했다.
이에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강전호는 거절이 아니라 들어줄 수 없는 요구라고 답변을 했다.
세바스티앙이 알았다고 하여 셋은 그가 자신의 요청을 철회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사무실로 들어가니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서가 당도해 있었다.
세바스티앙이 본사에 전화를 걸어 모든 일들이 무효가 되었으며 최종 계약은 오시마조선소와 할 것이라는 통보를 한 결과이다.
“잘려도 좋고, 계약 안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자식 너무 치졸한 거 아닙니까?”
불콰하게 술이 오른 강전호가 열변을 토하자 비슷하게 취한 우정훈이 한마디 거든다.
“그럼, 우리가 무슨 채홍사3)야? 개자식! 대머리가 훌렁 벗겨진 자식이 감히 누굴 넘봐? 안 그러냐?”
“맞아. 이런 계약은 안 하는 게 맞는 거야. 서연은 내 로망이기도 하다고. 근데 감히 그녀를……! 시러배 잡놈 같은 녀석이……! 에이, 근데 우리 잘리면 어디로 가지?”
“휴우… 그러게!”
“끄으응! 설마 자르기야 하겠냐?”
“아마 잘릴걸. 대기발령이 곧 자른다는 소리니까.”
셋의 표정은 금방 우울 모드로 바뀌었다. 현수는 분위기를 바꿀 겸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근데 세 분은 어딜 갔다 오는 겁니까?”
지사가 파리에 있는데 왜 이 기차를 탔냐는 뜻이다.
“그동안 일만 하느라 파리에만 있었습니다. 끌려가기 전에 여기저기 둘러나 보자 하여 브르타뉴 공작성을 구경하고 왔죠.”
“아! 그렇군요.”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일제히 술을 마신다. 분함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으으음!”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낮은 침음만 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괜스레 화가 난다.
거래를 빌미로 남의 나라 연예인을 하룻밤 상대로 내놓으라고 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 그러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냥 귀국할 겁니까?”
“아뇨, 먹지도 못할 감 찔러나 볼 생각입니다.”
“네에?”
강전호의 대꾸에 현수의 눈이 커진다. 순간 흉기가 생각난 때문이다. 이런 반응이 웃기다는 듯 강전호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