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찔러서 죽인다는 건 아니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볼 생각입니다. 그 자리에서 ‘당신의 요구는 정말 잘못된 겁니다. 그런 요구를 하는 당신을 위해 우리 회사는 배를 만들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려구요.”
“아……! 근데 술이 제법 취한 듯한데 괜찮겠습니까?”
“당연히 안 괜찮죠. 거래가 깨어지긴 했어도 상대에 대한 예의는 갖춰야죠.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네에. 술 다 깨면 갈 거니까 걱정 마십쇼.”
우정훈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 네에.”
셋은 남아 있던 캔맥주 하나를 더 마시고는 끝을 냈다. 그러는 내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간 있었던 거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웬만한 무용담 못지않게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일행은 역에서 내려 곧장 하맘(Hamam)으로 향했다. 하맘은 이슬람식 전통 증기식 목욕탕이다. 현수 역시 동행했다.
남의 나라 문화를 즐겨보기 위함이다.
그곳에서 서너 시간을 머물렀다. 그리곤 인근 식당에 들러 뱃속을 채웠다. 취기가 거의 가신 듯하다.
“김 형! 김 형은 곧장 공항으로 갈 겁니까?”
어느새 친해진 강전호의 물음에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가능하다면 나도 같이 가서 세바스티앙이란 사람을 볼 수 있겠습니까?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나 보죠.”
하맘 안에서도 세바스티앙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기에 셋은 현수의 반응에 동지애를 느끼는 듯하다.
“물론입니다. 어차피 이제 쫑내는 상황이니 누구랑 같이 가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갑시다. 가요.”
일행이 CMA 오머런사의 사옥에 당도한 것은 오후 6시 무렵이다. 가는 동안 통화하여 접견 신청을 했다.
웬일인지 순순히 OK를 했다. 혹시 서연과의 극적인 하룻밤이 성사될까 싶어 오라고 한 것이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에 올랐다. 파리 시가지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건물이다.
똑, 똑, 똑!
“네에, 들어오세요.”
비서 아가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들어섰다. 한꺼번에 네 명이나 올 줄은 몰랐다는 듯 금발 미녀가 눈을 크게 뜬다.
“봉쥬르 마드모아젤!”
“봉쥬르 무슈 강! 무슈 안! 그리고 무슈 박! 그런데 저분은……?”
“김현수라 합니다.”
“네에, 무슈 킴! 부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드모아젤 베아트리체, 고마워요!”
강전호가 꼭 꼬시고야 말겠다는 야심을 품게 만들었던 예쁜 여비서가 배시시 웃음 짓는다.
현수가 흘깃 바라보니 미녀는 미녀이다. 물론 러시아에 두고 온 이리냐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현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베아트리체에게 있어 강전호는 동양의 어느 이름도 생소한 회사에 속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반면 베아트리체 본인은 프랑스 선주사에서도 손꼽히는 CMA 오머런사 부회장의 비서이다.
급여로 비교해도 강전호는 베아트리체를 결코 능가할 수 없다. 강전호가 1년에 버는 걸 베아트리체는 불과 두 달이면 번다.
다시 말해 연봉이 무려 여섯 배나 된다.
학벌로 따져도 강전호는 베아트리체를 이길 수 없다.
프랑스에는 HEC라는 공립 경영대학원이 있다.
1881년에 개교하여 전문적인 상업 종사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리상업회의소에 의하여 설립된 상업학교이다.
HEC(Hautes Etudes Commerciales)는 영국의 권위있는 경제일간지가 매긴 대학 순위 평가 결과 2012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지난 6년간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은 명문 중의 명문이다.
베아트리체는 이 대학에서 제공하는 5년 과정의 그랑제
꼴(Grands Ecoles) 프로그램을 이수한 재원이다.
그렇기에 CMA 오머런의 실세를 보좌하는 비서가 될 수 있었다.
한국의 자그마한 회사에서 손님이 왔을 때 차를 대접하는 그런 비서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비서이다.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비전을 만들어가는 기획실 직원과 유사하다.
아무튼 강전호는 베아트리체에게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건넸다.
“마드모아젤! 어제는 브르타뉴 공작성엘 다녀왔습니다. 근처를 지나다 당신에게 어울릴 만한 반지가 있어서 산 겁니다.”
“어머, 정말요?”
베아트리체는 그간 여러 번 작은 선물들을 받았는지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상자를 열었다.
“어머, 어머! 이건…….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무슈 강!”
작은 상자 속에 담긴 것은 이곳에 오기 전 백화점에서 구입한 것이다. 가격도 그리 비싼 것이 아니다.
평범한 자수정이 박힌 반지이다. 그럼에도 몹시 마음에 들어하는 까닭은 현수가 마법을 인챈트시켰기 때문이다.
어펜시브 참보다는 저써클 마법이지만 상대로 하여금 호감을 느끼게 하는 참(Charm) 마법이다.
현수가 이 마법을 선택한 이유는 CMA 오머런사 내부에 강전호를 도와줄 우군을 만들어주기 위함이다.
어쨌거나 일행은 베아트리체와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부회장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오오! 어서 오시오.”
본사에 전화를 걸어 강전호와 우정훈, 그리고 박창민 때문에 이번 거래를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말을 했던 사람치고는 환대이다. 모르긴 몰라도 서연과의 하룻밤이 예정된 것이라 생각해서일 것이다.
부인도 있고, 베아트리체 같은 미녀가 주변에 있음에도 세바스티앙이 이러는 이유는 동양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좌석에 앉자 처음 보는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서울에서 일을 성사시키고 온 장본인인 것으로 여긴 것이다.
“아! 여긴 김현수 씨라고 합니다. 저희 회사 어시스턴트입니다.”
“아! 어시스턴트……! 만나서 반갑소. 세바스티앙 오머런이라 하오.”
“네, 김현수라 합니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세바스티앙은 어서 본론을 털어놓으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연과의 일이 성사되면 한 시간쯤 뒤에 오기로 한 오시마조선소 직원들은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
강전호가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 직후 세바스티앙은 AKB48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 보았다.
오시마조선소 직원이 말한 마츠바라 나츠미와 미야자키 미호 등의 사진을 보았다. 그런데 전혀 흥미가 돋지 않았다.
섹시하지도 않고, 신비해 보이지도 않는다.
반면 꿈에도 그리는 서연은 섹시할 뿐만 아니라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몽롱한 기분이 든다.
집에서 같이 늙어가는 아내와는 전혀 다르다. 그렇기에 강전호가 전화를 걸었을 때 금방 OK를 해준 것이다.
어쨌거나 세바스티앙은 현수의 입만 바라본다. 서연을 언제 어떻게 데려올 것인지에 모든 관심이 쏠린 것이다.
같은 순간, 현수는 자신만 바라보는 세바스티앙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매부리코에 대머리 주제에 누굴 노려? 나이도 많은 자식이……! 하여간 늙은 말이 콩을 좋아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군.’
속으론 쯧쯧하며 혀를 찼지만 현수의 표정을 바뀌지 않았다.
‘어쨌든 나하고 시선을 맞춰주니 고맙군. 마나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한 호감을 느끼게 하라. 어펜시브 참!’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의 파동이 현수의 손끝을 떠나 세바스티앙에게 향했다.
잠시 후, 세바스티앙의 눈빛이 달라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감 어서 내놓으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마법이 구현되자 한결 부드러워진다.
그리곤 점점 더 우호적인 눈빛이 되어갔다.
“세바스티앙 부회장님! 여기 있는 강전호 씨와 우정훈 씨, 그리고 박창민 씨는 이번 거래 때문에 회사를 그만둘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현수에겐 호감이 있지만 강전호 등에겐 그렇지 않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 친구들이 그렇게 되는 걸 원하지 않으시죠? 난 그런데.”
“네? 아, 네에.”
세바스티앙이 마뜩치 않다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그래서 말인데 그냥 이 친구들과 계약을 진행하는 건 어떨까요?”
“그게 김현수 씨가 원하는 겁니까?”
“네! 그간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하더군요. 안 그렇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제게 많은 걸 제공했지요.”
“그러니 그냥 계약을 진행을 합시다. 그렇게 해주실 거죠?”
“……! 네, 김현수 씨가 그러라 하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국 속담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나온 김에 지금 하는 건 어떨까요?”
세바스티앙은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마음에 드는 현수가 원하기에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이다.
한편 곁에서 현수와 세바스티앙을 보고 있던 강전호와 우정훈, 그리고 박창민은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낯을 가리는 것은 물론이고,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세바스티앙이 마치 길들인 양처럼 너무 고분고분했기 때문이다.
‘헐……! 이 사람 뭐여? 마법사라도 되는 거야?’
강전호의 뇌리를 스친 상념이다. 같은 순간 우정훈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말도 안 돼! 천하의 세바스티앙이……! 깐깐하기로 이름난 이 자식이 어떻게 김현수 씨 말 한마디에…….’
‘세상에,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잔뜩 긴장하고 왔는데 현수 씨 말 몇 마디에……. 끄으응!’
박창민 역시 놀라고 있었다.
어쨌거나 강전호는 현수가 마법사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사람이 되었다.
“전호 씨! 뭐해요? 계약서 어서 꺼내야죠.”
“아! 무, 물론입니다.”
화들짝 놀란 강전호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이미 여러 번 숙의를 하여 문장은 물론이고, 자구까지 일일이 손을 본 계약서이다.
이 계약서는 CMA 오머런사의 이사회에서도 이미 승인이 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세바스티앙은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렸던 것이다.
강전호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얼른 세바스티앙에게 사인할 부분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계약서 작성이 끝나면 파티라도 해야지요?”
“하하, 물론입니다.”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세바스티앙이 만년필을 꺼낸다.
몽블랑이다. ‘솔리테어 순은 발리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을 가진 이 만년필을 구입하면 고급 케이스는 물론이고 보증서까지 따라온다.
이것 한 자루의 가격은 무려 222만 원이나 된다. 학창시절 많이 썼던 모나미 153볼펜 14,800자루 값이다.
세바스티앙의 잔뜩 겉멋 든 사인이 끝나자 강전호는 조심스럽게 계약서 한 부를 건넸다.
만만치 않은 두께의 계약서를 받은 세바스티앙은 ‘나 잘했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현수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흐뭇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세바스티앙이 인터컴으로 계약했음을 알리자 베아트리체를 비롯한 비서실 직원들이 와인을 들고 들어왔다.
CMA 오머런사에서도 그간 상당한 심력을 소모해 가며 이번 계약에 매달렸었다. 엄청난 액수가 오가는 거래이기 때문이다.
한국과의 거래는 없었던 일이 되었으며 일본의 조선소와 계약을 진행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엔 죽었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또 수없이 많은 서류와의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태백그룹과 계약을 마쳤다 하니 환호성을 지르고 파티를 하러 들어온 것이다.
12장 내 이름은 덤블도어
“자자! 지금까지 계약을 위해 애써준 여러분들을 위해 건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순조롭게 선박이 건조되기를 바라면서 한잔합시다.”
“저희는 세바스티앙 부회장님의 결단에 감사드리는 뜻에서 한잔하겠습니다.”
강전호가 한마디 거들자 기다렸다는 듯 베아트리체가 빈 잔에 와인들을 채워주었다.
“아! 김현수 씨도 한마디 하시지요.”
“제가요? 아이고, 아닙니다. 그간 애써 오신 분들도 많은데.”
“아닙니다. 한 말씀해 주십시오. 김현수 씨 덕에 아주 쉽게 일이 마무리 지어졌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끄응……!”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강전호와 우정훈, 그리고 박창민을 보곤 환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CMA 오머런과 태백그룹의 무한한 발전을 위해 건배하겠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건배―!”
탱탱, 팅팅, 챙챙!
강전호 등은 서로의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는 일제히 잔을 비웠다. 반면 세바스티앙과 베아트리체 등 프랑스인들은 향을 즐기고, 입안에 머금어 맛을 본 뒤에야 그것을 목으로 넘겼다.
과연 와인의 본고장 사람들답다.
그러거나 말거나 절망의 나락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강전호와 우정훈, 그리고 박창민은 연신 잔을 비우며 시선을 교환했다.
이제 대기발령 또는 해고와는 아듀(Adieu)4)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전혀 고려되지 않던 특별 보너스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본사에선 이번 계약이 완전히 깨진 것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수가 받았던 특별휴가와 진급이라는 상이 별도로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현수는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트리오를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했어야 할 계약이기에 양심의 가책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 일본의 조선소에 빼앗길 뻔했던 계약이기에 오히려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