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주영이 처음 듣는 어휘라는 듯 반문하자 현수가 설명했다.
“제재 과정에서 껍질 등 부산물이 나오지? 그걸 톱밥으로 제조한 후 압축해 만든 청정 목질계 바이오 연료가 펠릿이야.”
“……!”
“그건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무공해, 친환경 에너지원이야. 경유나 등유보다 싸서 연료비 절감 효과도 뛰어나고.”
“넌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냐? 나하고 같은 수학과 출신이잖아.”
주영의 말에 현수가 피식 웃었다.
“인마! 그러니까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해. 남는 시간에 빈둥대지 말고 닥치는 대로 읽어둬. 머릿속의 지식은 아무도 못 빼앗아 가는 거니까. 안 그래?”
“그, 그래! 네 말이 맞다.”
주영은 괜스레 주눅 든 기분이 되었다. 똑같은 출발선에 있던 친구인데 갑자기 저 멀리 앞에서 뛰고 있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아무튼 벌목과 개간에 필요한 장비들을 있는 대로 수배해 놔. 그리고 그걸 운용할 사람들도 뽑아놓고. 알았지?”
“전부?”
“아니, 각 장비를 다룰 줄 아는 사람 한둘씩만 뽑으면 돼. 이쪽에 데려와서 현지인들 교육시키면 되니까.”
“그래! 알았다. 그밖에 다른 내용은 없냐?”
“있지!”
“뭔데?”
주영은 메모를 준비하고 귀를 기울였다.
“다음에 갈 때까지 이은정 실장하고 썸씽이 안 생겨 있으면 너 해고다. 알았지?”
“해고……? 으이그, 알았다. 무서워서라도 데이트 하고야 만다. 됐냐?”
“하하! 그래, 이만 끊자.”
주영이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이은정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일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주영이 데이트 운운했기 때문이다.
“어머, 민 실장님 여자친구 있으셨어요?”
“네……? 아, 아뇨. 없습니다.”
“방금 데이트 한다고 하셨잖아요.”
은정의 말에 주영의 뇌가 순간적으로 활성화된다.
“현수가, 아니, 사장님이 연애 같은 거 안 하고 일만 하고 있으면 우리 둘 다 해고시킨다고 합니다.”
“네에……?”
처음 듣는 소리기에 은정의 눈이 커진다. 분명 농담인 것 같다.
그런데 주영은 심각한 표정이다. 하여 눈만 말똥말똥 뜬 채 바라보았다. 이때 주영이 말을 잇는다.
“이 실장님!”
“네에.”
“저 해고 당하기 싫은데 그건 이 실장님도 그렇죠?”
“그, 그럼요.”
요즘 취직하기 얼마나 어려운가!
스펙을 쌓느라 4년짜리 대학을 5년 또는 6년 만에 졸업하는 세상이다. 너도 나도 스펙을 쌓기에 웬만해서는 눈에 뜨이지도 않는다.
취업하려는 분야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토익 점수는 최소 800∼900점대에 있어야 한다.
학점은 당연히 다 따야 하고, 평점은 3.5 이상이어야 한다. 전공 분야에서의 자격증은 최소 1∼2개는 있어야 한다.
어학연수도 다녀와야 하고, 관련 업종 인턴쉽도 경험해야 한다.
따라서 은정이 이실리프에서 잘리면 취업하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될 수도 있다. 졸업한 것도 아니면서 학교 수업을 거의 듣지 않기에 뒤쳐진 느낌이 들어서이다.
게다가 이실리프 무역상사는 재벌의 계열사 부럽지 않은 급여를 주는 회사이다.
출퇴근 시간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빡빡한 사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맡은 업무만 해결할 능력이 있으면 겸업도 가능하다.
그래서 민주영은 매일 밤 아이들을 가르치러 간다. 물론 돈도 벌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실리프는 은정이 만든 회사나 다름없다. 그런데 느닷없는 해고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하는 생각 때문이다.
주영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면서 은정의 반응을 살폈다.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 둘이 이번 주말에 데이트 합시다.”
“네……?”
“우리 둘 다 회사 일에만 매달려서 자기 인생을 돌보지 않으면 자른다니 어쩌겠습니까? 난 여자친구가 없고, 이 실장님은 남자친구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네, 그건 그래요.”
“그런데 어디 가서 갑자기 애인을 만들겠어요? 그러니 우리 둘이 데이트 합시다. 산에 가서 인증샷도 찍구요. 그럼 현수도, 아니, 사장님도 뭐라 말 못할 거 아닙니까. 안 그래요?”
“……!”
은정이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자 주영은 어제 읽었던 ‘여자의 마음을 흔드는 법’이란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럴 땐 생각할 틈을 주지 말고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라고 되어 있다. 그렇기에 마음속에 품은 이야길 해버렸다.
“솔직히 이 실장님, 아니, 은정 씨에게 관심있습니다. 말 나온 김에 사귀어 보는 게 어떨까요?”
“네? 저를요? 저, 저는 아직…….”
은정의 마음엔 현수가 있다. 그런데 그의 친구로부터 갑작스런 러브콜을 받으니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저, 사귀어보면 아시겠지만 나쁜 놈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별 볼일 없었지만 앞으론 나아질 거구요.”
이 대목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은정이야 학연, 지연, 혈연 어느 것으로라도 현수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주영은 사장님과 동기동창이고 친한 친구이다.
그런데 이실리프 무역상사는 잘 되면 잘 되었지 망하지는 않는다.
소비자들을 상대로 팔 물건을 생산하는 업체도 아니고, 일반 대중을 상대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킨샤사의 천지약품은 현수가 공동 대표이사이다. 그쪽이 먼저 망하지 않으면 여긴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 없다.
아무튼 이실리프 무역상사는 전도가 창창한 회사이고, 현재의 주영은 업무 전반을 컨트롤하는 임시 대표이다.
월급도 자신보다 많다. 자신보다 늦게 입사했지만 처리하는 업무가 달라 그렇다고 했다.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시아버지나 시어머니도 없고, 못된 짓을 할 시누이도 없다. 따라서 사귀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사람도 착해 보이지만 그러겠노라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여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
“그냥 마음 편히 먹으세요. 결혼하자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먼저 데이트를 해봅시다. 그러다 정 아니다 싶으면 그때 거절하셔도 돼요. 그러니 말 나온 김에 이번 주말에 북한산이라도 한번 가봅시다.”
“부, 북한산이요?”
“네, 서울 살면서도 한 번도 못 가봤습니다. 그동안엔 한쪽 팔이 불편해서…….”
“저도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은정 역시 생활고 때문에 마음 편히 산행 한 번 못해 보았다.
“말 나온 김에 등산화 사러 갈까요? 저 앞에 있던데.”
“……!”
“갑시다. 가서 등산화 한 켤레씩 삽시다. 이번 주말이 아니더라도 등산화 한 켤레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주영과 은정은 등산용품점으로 갔다. 두 시간쯤 쇼핑하는 동안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등산복의 옷 색깔도 서로 결정해 주었다.
은정은 자상한 성품인 주영의 배려가 좋았고, 주영은 섬세하고 여린 은정을 보듬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좋았다.
둘은 예정대로 북한산 등반을 했다.
그리곤 수없이 많은 인증샷을 찍었다. 현수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주영은 은정과 같이 사진을 찍고 싶었던 것이다.
업무에만 차질 없으면 되기에 합의만 되면 대낮에도 등산화를 신고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녔다.
둘의 이런 진전을 눈치챈 수진과 지혜가 부러워한다.
“민 실장님!”
“네, 이지혜 씨.”
“우리 회사는 직원 더 안 뽑아요?”
“왜요? 업무량이 늘어나서 그래요?”
“네, 갑자기 일이 많이 늘었잖아요.”
“흐음, 그럼 사장님과 상의한 후 더 뽑도록 하겠습니다.”
“네, 근데 여자는 안 됩니다. 그리고 결혼한 남자도 안 됩니다.”
“네?”
무슨 뜻이냐는 소리였다.
“잘 생긴 총각으로만 뽑아달라는 뜻이에요. 우리도 주말엔 데이트 하고 싶으니까요.”
“……!”
주영은 이제야 무슨 뜻인지 깨닫고 낯을 붉혔다.
늦게 배운 도둑질 밤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성친구가 없었던 주영과 은정은 요즘 깨알 쏟아지는 달콤한 연애가 진행 중이다. 그렇기에 남들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은 닭살 행각을 해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키는 커야 하구요. 기왕이면 잘 생긴 사람으로 뽑아 주세요, 성품도 선해야 하구요. 너무 살찌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직원이 아닌 신랑감을 뽑아달라는 건지 주문 사항도 많았다.
그런 지혜의 얼굴에 웃음이 배어 있다.
사무실에 있다간 놀림감이 될 것이라 생각한 주영은 차를 몰고 나섰다. 오늘은 산림청을 찾아갈 생각이다.
산림자원을 활용하는 각종 자료도 얻고, 각종 벌목 장비를 제조하는 업자들의 연락처를 얻기 위함이다.
주영은 현수의 충고대로 벌목에 관한 제반 지식을 쌓았다. 그리곤 그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을 수배하기 시작했다.
“어휴! 이 많은 걸 어떻게 가져가려고…….”
로그 마스터만 오십여 대를 주문해 놓았다.
현수가 개간하려는 정글에 대비하면 어림도 없을 숫자이다. 그럼에도 너무 많이 주문한 것은 아닌가 싶어 불안해했다. 자칫 낭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 날, 현수로부터 전화를 받은 주영은 업체 순방을 다시 했다.
그리곤 주문량을 열 배씩 늘렸다.
로그 마스터, 불도저, 페어로더, 타이거 캣, 팀버, 포크레인 등이다. 이것들은 콩고민주공화국의 이실리프 농장에서 수입하는 것으로 처리된다. 따라서 부가세 및 특별소비세가 면제된 값으로 구매되었다.
주영이 중고를 사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금이 면제된 새것이 개인이 소유한 중고보다 더 쌌던 것이다.
대량 주문, 현금 결제의 위력이다.
주영이 고개를 갸우뚱한 것은 운송을 책임질 해운사를 알아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대체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하려는지 알 수 없다. 하긴 주영이 어찌 아공간에 대해 알겠는가!
현수는 각종 중장비는 물론이고 현지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들을 아공간에 담아갈 생각을 한 것이다. 시간도 절약되고, 비용도 절약되는 일석이조이니 그렇지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같은 시각, 현수는 콩고민주공화국을 떠나 한국으로 오는 중이다. 그런데 곧장 오는 게 아니라 여러 거점을 거쳐서 오고 있다.
이제 수시로 한국을 드나들 생각이다. 그런데 일일이 비행기를 타고 내리면서 오기엔 시간도 시간이지만 비용도 많이 든다.
장시간에 걸친 비행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다.
따라서 출입국 기록을 따로 남겨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텔레포트 마법을 쓸 생각을 한 것이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에 걸쳐 귀국하게 된다.
킨샤사에서 출발하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귀국한다.
킨샤사→우간다→에티오피아→예멘→오만→이란→파키스탄→인도→미얀마→지나→서울.
거점은 바뀔 수 있고, 갈 때엔 역순이다.
안전한 텔레포트를 하기 위해 내릴 때마다 좌표를 확인하고 텔레포트진을 만들어서 설치하고 있다.
여러 거점을 거치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머뭇거리지만 않으면 한 시간 정도면 킨샤사에서 서울로 이동한다.
현재의 현수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Addisababa) 공항에 내렸다. 그런데 일반인 출입구를 쓰지 않고 외교관 전용 심사대를 통과한다.
가에탄 카구지는 현수에게 콩고민주공화국의 시민권과 영주권을 부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준외교관 신분까지 주었다. 해외에서 불편부당한 일을 당하지 말라는 배려이다.
그렇기에 외교관 여권으로 여행하는 중이다.
어쨌거나 아디스아바바는 일국의 수도 같지 않은 모습이다.
현수는 기왕에 온 곳이니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에 택시를 탔다. 그리곤 힐튼 호텔로 가자고 했다.
여장을 풀고 밖으로 나갔다. 적도에 가까워 한 낮의 찌는 듯한 더위를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다. 아디스아바바는 해발 2,500m이다. 그래서 킨샤사보다 훨씬 나았다.
곳곳에 건축 중인 건물들이 보인다. 그런데 모두 지나 업체들이 짓는 듯하다. 굴절버스가 지나가기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가격이 비싸 한국에도 별로 없는 굴절버스를 가난한 나라 에티오피아에서 보았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아디스아바바의 첫인상은 깨끗함이다. 질서도 잘 지키고 있다.
잠시 시내 구경을 마친 현수는 택시를 잡았다. 그리곤 코리안 빌리지로 가자고 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다큐멘터리가 있어 이곳을 첫 번째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에 셀라시에 황제의 근위대를 주축으로 한 칵뉴부대를 파병한 바 있다.
6,037명의 보병이 파견되어 214전 무패이며,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
아디스아바바 외곽으로 30분 정도 가면 이들이 모여 사는 촌락이 있다. 코리안 빌리지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여기엔 이젠 늙고 병들어 버린 예전의 용사 200여 명이 어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밖에도 에티오피아 곳곳에 2,000여 명의 참전용사가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현수는 이곳에 오기 전 가에탄 카구지 장관을 만났을 때 콩고민주공화국의 의사면허증을 발급 받았다. 물론 달라고 해서 받은 것이다.
이걸 받은 이유는 참전용사들을 돕기 위함이다.
『전능의 팔찌』 제10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