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분명 농담이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 속의 절박함이 보인다.
박근홍은 회사를 나가면 갈 곳이 없다. 집도 없고, 직장도 없다.
식사비조차 아껴야 하는 상황이라면 예금도 없다는 뜻이다.
친지들에게 얼마간 빌붙어 살 수는 있지만 그리 오랜 세월은 되지 못할 것이다. 제 가족도 버거워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그리고 얼마 후부터는 막노동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어려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극빈층이 될 것이고,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도 있다.
앞길이 막막하겠지만 어쩌겠는가!
현수는 궁금한 바를 물었다.
“박 사장님은 선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영업부 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백화점이나 마트 등을 공략했지요. 회사가 기울기 전까지는 제법 괜찮았습니다.”
“……!”
현수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말을 이었다.
“선친이 설립했다 도산한 건설회사 때문에 자금 사정이 나빠지면서 상품을 제대로 생산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박근홍의 속은 쓰릴 대로 쓰릴 것이다. 선친이 세우고 본인이 공을 들였던 회사가 망해가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현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홍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현수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인원으로 신상품을 런칭할 수 있겠습니까?”
“신상품이라니요?”
“제가 신개념 의복을 구상했습니다. 늘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켜 주는 우주복 같은 겁니다.”
“우주복이요? 그걸 상품으로 내놓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하긴 우주복을 누가 사서 입겠는가!
“아! 제 말을 잘못 이해하신 겁니다. 우주복이 아니라 우주복처럼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진 옷을 말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군복 같은 것이 있겠지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군복이요?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이야길 하기에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한겨울에 GOP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의 체온이 늘 36.5℃가 되도록 유지시켜 주는 옷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
박근홍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여름엔 에어컨이 없어도 시원한 하복을, 그리고 겨울엔 늘 따뜻함을 유지하는 동복을 만들어 팔면 어떻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한 겁니까?”
“흐음, 백문이 불여일견이겠네요.”
현수는 준비했던 가방 속에서 옷 한 벌을 꺼냈다. 평범한 여름 재킷이다. 마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옷을 한번 입어보시겠습니까?”
“……! 그러죠.”
박근홍은 입고 있던 반팔 와이셔츠 위에 현수가 건넨 재킷을 걸쳤다. 이때 현수가 말한다.
“흐음, 여긴 에어컨을 켜놓았으니 밖으로 나가보지요.”
“그럽시다.”
밖으로 나가자 박근홍의 부인이 어딜 가느냐는 표정이다.
“응! 옥상에 잠깐 갔다가 올게.”
둘은 곧장 옥상으로 올랐다. 문을 열자 이글거리는 태양 빛으로 달궈진 후끈한 공기가 쇄도해 온다.
“어라……!”
박근홍의 입에서 이상하다는 소리가 난 것은 밖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땡볕인지라 3분만 서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더운 날씨이다.
그래서 얼굴에선 뜨거운 햇살이 느껴진다. 그런데 몸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시원한 에어컨이라도 켜놓은 듯 쾌적하다.
“어떠십니까?”
“이, 이거 대체 뭘로 어떻게 만들어서 이런 겁니까?”
기대하던 반응이기에 현수는 웃음 지었다.
“후후, 그건 비밀입니다.”
“이건… 제가 장담합니다. 이건 분명 대박입니다.”
박근홍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옥상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렇게 움직이는데도 계속 시원한지 보자는 의도이다. 5분쯤 지났을 때 현수는 예상했던 표정을 보고 즐거워했다.
“세상에……! 김 사장님, 이거 대체 어떤 소재이기에 이런 겁니까? 제가 보기엔 평범한 마 같은데……. 무슨 특수 처리라도 한 겁니까?”
“후후,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비밀이라고…….”
“……! 까사가 다시 살아나겠군요. 나중에 돈을 벌면 다시 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렇겐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만든 회사인지라 언제고 재기를 하면 회사를 찾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박근홍은 낙심한 표정을 짓는다. 경영권을 내주겠다는 말을 할 때에도 짓지 않던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까사가 살아날 것이라고……?”
“안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지요. 이런 옷으로 성공 못하면 그건 바보지요. 이건 정말……! 정말 좋습니다. 이런 옷은 어떤 디자인으로 내놔도 무조건 팔립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옷이……!”
박근홍은 계속해서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펄펄 끓는 대낮에, 그것도 복사열이 상당한 건물 옥상에서 운동하듯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땀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덥다는 느낌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쾌적한 기분이다.
“일단 내려가시지요.”
“아! 네에.”
박근홍은 다소 흥분한 듯하다. 회사에서 만든 옷을 팔러 다니던 영업부서의 장이기에 그런 것이다.
장담하건대 이런 옷은 없어서 못 팔 상품이 된다.
지금이라도 상품을 만들어 내놓으면 2013년 여름 최고의 상품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애만 태우게 하던 백화점과 마트의 바이어들이 줄을 서서 면담 신청을 할 초대박 아이템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흥분된 것이다.
계단을 디디며 내려오던 현수가 말문을 열었다.
“우선은 군대부터 납품하는 걸로 했으면 해요. 이 더운 여름에 훈련받느라 고생하는 군인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
“동복 역시 군대가 우선입니다. 추운 겨울에 벌벌 떨면서 보초 서보셨지요?”
“그럼요. 3사단에 있었지요. GOP 근무도 했습니다.”
“박 사장님이 잘 알아서 해주십시오. 믿어도 되죠?”
“네……?”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직원으로 근무하게 해달라고요.”
“네에. 그건…….”
박근홍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옷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떻게 팔리는 건지 하나도 모릅니다. 그러니 박 사장님이 까사의 운영을 맡아주십시오.”
“……!”
박근홍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격동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직책은 대표이사 사장입니다. 저는 지분만 많은 대주주로 남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기, 김 사장님……!”
“그리고 신상품의 비밀은 단추에 있습니다. 옷이 아니구요. 단추에서 특수한 기능이 발현되도록 하는 겁니다. 이건 사장님과 저만 아는 비밀이 되어야 합니다. 아시겠죠?”
“네에.”
“단추는 제가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양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우선은 국방부부터 방문하십시오.”
“네에.”
대화를 하는 동안 사장실에 당도하게 되었다.
둘이 다정스레 들어서자 박근홍의 부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회사를 빼앗기게 생겼는데 남편의 얼굴에 생기가 돈 때문이다.
“여보! 김현수 사장님이셔.”
“네에.”
“나더러 이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아 달라시네.”
“네……? 그게 무슨……?”
“그리고 이건 신상품이야. 이걸 입고 옥상에 한번 가봐.”
“이건 남자 옷이잖아요. 그리고 옥상엔 왜요?”
“아이구, 그냥 가보라면 가봐. 이걸 입고 옥상에 올라가서 쨍쨍 내리쬐는 햇볕을 느끼고 오라고. 한 10분쯤 있다 내려와. 알았지?”
“아이, 햇볕 쬐면 기미 생긴단 말이에요.”
“그래? 그럼 모자는 써. 하여간 10분쯤 옥상에서 뛰어다녀.”
“뭐라고요? 이 더운 여름에 펄펄 끓는 옥상에 올라가는 것도 모자라서 뛰기까지 하라고요? 누구 죽일 일 있어요?”
부인이 펄쩍 뛰거나 말거나 박근홍 사장은 단호했다.
“안 죽으니까 한번 해봐. 알았지?”
“나 쓰러지면 당신이 책임질 거예요?”
“그래, 그래! 당신 쓰러지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가봐.”
“치잇! 알았어요.”
박근홍의 부인 김주미 여사가 재킷을 걸치며 밖으로 나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박근홍의 입가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조금 이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도 확연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사장실로 들어선 둘은 향후의 일에 대한 의논을 했다.
당분간 국방부에만 납품할 생각이라 직원은 더 뽑을 필요가 없다. 남아 있는 인원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복은 군납 이외엔 콩고민주공화국으로의 수출만 하기로 했다.
이실리프 농산과 이실리프 농장, 그리고 이실리프 축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지급할 작업복이다.
이밖에 천지건설 현장 직원들에게 공급할 생각이다.
워낙 더운 곳이 아니던가!
그러다 점차 여유가 생기면 그때부터 일반 상품을 만든다.
동복의 경우엔 군납 이외에 러시아 수출용이 우선이다.
회사에 자금의 여유가 생기면 나머지 주식을 모두 사들이고 상장을 폐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회사 이름은 이실리프 어페럴로 바꾸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김주미 여사가 들어온다.
“여보……! 아니, 사장님! 이거 대체 무슨 옷이에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현수와 박근홍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환히 웃었다.
“설명해 줄 테니 여기 앉아봐.”
박근홍의 말에 김주미 여사가 소파에 앉자 지금껏 했던 이야기들을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근홍의 말이 끝나자 김주미 여사가 현수를 바라본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이다.
말은 안 했지만 살고 있던 아파트를 처분하여 직원들에게 밀린 급여의 일부를 지급하고 거래처에 나머지 전부를 나눠주었다.
살던 집을 팔아 이제 우린 어떻게 사느냐는 말을 했을 때 근홍은 산 입에 거미줄 치겠냐는 말로 위로했다.
그러면서 조만간 재기하여 다시 사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김주미 여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살을 생각한 것이다.
돈 한 푼 없고, 40살이 넘은 남편이 재기한다는 것은 현 사회 여건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둘은 며칠 전부터 회사에 와서 숙식을 했다. 직원들이 떠난 빈 사무실에 시아버지가 쓰던 야전침대를 가져다 놓고 거기서 잤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화장실에서 씻었고, 다 퇴근하면 그때야 샤워를 했다. 모든 끼니는 라면으로 때웠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지갑에 남은 돈이라곤 달랑 5천 원뿐이다.
그 돈이 떨어지면 남편과 함께 세상을 뜰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 부담 주기 싫었다. 힘든 일이라곤 평생 해본 적 없는 남편이 막노동 비슷한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오빠에게 부탁하려 했다.
아들은 현재 미국 유학 중이다. 공부를 잘해 장학금을 받는지라 학비를 부쳐 주지 않아도 된다. 또 오빠네 집에서 숙식을 하기에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다.
자식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험하고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기엔 너무 여린 김 여사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근홍의 청혼을 받아 살림만 하면서 살아왔다.
시아버지가 한참 잘 나갈 때에도 사치와 낭비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다. 사업이 번창하는 것이 흐뭇했고, 남편이 즐거워하는 모습은 기뻤다. 그리고 공부 잘하는 아들을 지켜보는 것은 행복했다.
그러다가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야 할 상황이 도래했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기에 해보기도 전에 포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구세주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망해가는 회사를 단박에 살리는 것은 물론이고, 회사도 빼앗지 않겠다고 한다.
남편에겐 사장 자리를 보장해 준다고 한다. 살림을 할 집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이제 그런 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이때 현수가 입을 열었다.
“역삼역 근처에 이실리프 빌딩이 있습니다. 그 건물 12층에 두 분이 살 만한 공간이 있습니다. 실면적이 약 20평짜리입니다. 말을 해놓을 테니 집을 구할 때까진 그곳을 쓰십시오.”
“네에……?”
김주미 여사의 눈이 커진다. 은인이 이젠 집까지 해결해 주려 한다 생각한 때문이다.
“제가 쓰려던 곳인데 저는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빈 곳이니 부담 갖지 말고 쓰십시오.”
“사장님……!”
박근홍의 눈도 습기 차 있었다.
“선량하고 책임감있는 분들이 잘사는 세상을 보았으면 해서요. 두 분은 그럴 자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사장님! 흐흑! 흐흐흑!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흐흐흑!”
김주미 여사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쏟아진다. 그냥 놔두면 박근홍 사장도 눈물을 흘릴 판이다. 하여 현수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참, 사장님!”
“네. 말씀하십시오.”
“직원들 밀린 급여가 얼마나 됩니까? 그리고 거래처에 미지급한 돈은 얼마나 되고요? 퇴직한 직원들의 퇴직금도 미지급 상태지요?”
“네, 근데 그건 계산을 해봐야…….”
“그렇겠죠. 모두 계산해서 제게 이메일로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회사 계좌번호도 알려주시고요.”
“……!”
“줄 건 주고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