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하지만 이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현은 현수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이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죠.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어 왜곡된 판결을 내리게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검사가 범죄자들에게서 돈을 받고 비호하는 건 잘못된 거죠?”
“……! 현수 씨, 뭔가 있죠? 말씀해 주세요.”
지현이 정색하며 묻는다.
“그러죠. 검찰도 사람이니 돈의 유혹 앞에서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직 검사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눈치 빠른 지현은 현수가 특정인에 관한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누군데요? 그 검사……!”
현수는 지현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곤 들고 있던 가방 속의 서류뭉치를 꺼내서 건넸다.
“세정파라는 폭력조직의 뒤를 봐주는 검사가 있어요. 중앙지검의 이경천 검사입니다.”
“……!”
“이건 우연한 기회에 제가 입수한 세정파의 장부 사본입니다. 이걸 정문부 검사장에게 우편으로 보냈지요. 사건을 배당받은 담당 검사가 이경천라고 합니다.”
“네에.”
“폭력조직은 사라져야 하기에 어찌 되어가나 싶어 전화를 걸었더니 세정파 조직원들이 들이닥치더군요.”
“어머, 위험하지 않으셨어요?”
지현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네, 다행히 눈치채고 일찍 빠져나와 별탈 없었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아까 검찰청을 구경시켜 달라고 한 것은 이 검사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어섭니다.”
“네에.”
“그런데 이 사건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솔직히 말씀드려요?”
“네에.”
지현은 잠시 아랫입술을 깨문다. 그리곤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연다.
“검찰 내부는 서로를 봐주는 문화가 팽배해요. 그래서 일반인이 범법행위를 저지를 경우 처벌하지만 서로는 대충 봐주고 그래요.”
“압니다. 그냥 ‘아! 그건 제 실수입니다. 미안합니다’ 이러면 정말 큰 사건이 아니면 그냥 넘어간다는 것을요.”
“네, 부끄러운 일이지요.”
“……!”
“하지만 간혹 외부로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규명위원회가 만들어져요. 정치적인 사건은 특검을 통해 조사가 되죠.”
“그 특검이나 규명위는 믿을 만한가요?”
“아빠가 위원장을 맡으면 웬만해선 못 빠져나갈 거예요.”
현수는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권철현 서울 고검장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만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럼 일단 외부에서 이 사실을 인지하도록 해야겠군요.”
“네에.”
“신문기사는 어떤가요?”
“언론에 먼저 보도된다면 검찰에서도 방법이 없죠. 그럼 규명위 또는 특검을 구성해서라도 검찰의 위신을 살려야 한다는 내부 의견이 나올 거니까요.”
“흐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근데 이 서류는 어떻게 입수하신 거예요?”
“얼마 전에 역삼역 근처의 세정빌딩이라는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어머! 빌딩을 사셨어요?”
지현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그리곤 현수는 다시 살핀다. 대체 어느 집안의 자제이기에 건물까지 사는가 싶었던 것이다.
“아! 대형 건물은 아니고 그냥 12층짜리예요.”
“우와! 12층이요? 그 정도면 엄청 비싸겠는데요?”
눈이 더 커졌다. 강남에 12층짜리 빌딩이라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100억 원을 훌쩍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 건물 내부를 정리하다 발견한 겁니다.”
“아! 그러셨구나. 근데 어쩌시려구요?”
“제가 아는 신문사 기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이걸 넘기려구요. 지현 씨 아버님에게도 이걸 보내도 되는지요?”
“네, 그러세요. 아빠는 늘 검찰의 이런 문화를 청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어쨌든 신문에 기사가 나가기 전에 보내주세요. 그래야 미리 방법을 구상하실 테니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지현 씨는 사건이 어찌 되어가나 살펴봐 주세요. 제가 제보하는 것이니 어찌 되는지 궁금하거든요.”
“네, 진척 사항이 생기면 팩스로 보내 드릴게요.”
“참! 저번에 팩스 보내주셨는데 고맙다는 말도 못 드렸네요. 글씨 참 예쁘게 쓰시더군요.”
“어머, 아니에요.”
지현은 대놓고 칭찬 받으니 부끄럽다는 듯 두 볼을 감싼다.
참 여성스럽다. 아껴주고 싶고 사랑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듯 솟는다. 그리고 저절로 보호 본능이 일어난다.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 많이 보내셔도 됩니까?”
“아뇨, 이젠 들어가야지요. 조금 전엔 검사장님께 허락받고 나온 거거든요.”
“네에. 그럼 검찰청 구경 한번 해볼까요?”
“네, 가요! 우리…….”
지현은 서울 중앙지검에 오기 전부터 총각 검사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중이다. 하긴 영화배우나 탤런트 뺨칠 정도로 예쁘고 늘씬하니 어찌 안 그러겠는가!
현수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반색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불편한 관심을 차단할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현은 현수와 나란히 걸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서울로 이사 온 집에 관한 이야기이다.
입구를 지나 지현의 업무 공간으로 가는 동안 상당히 많은 사내들이 기웃거렸다. 대부분 장가 안 간 검사들일 것이다.
지현은 부러 다정스레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는 모습을 보였고,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다 주었다. 현수는 이에 장단 맞춰 환한 웃음을 보여주며 아주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가 이경천 검사 방이에요.”
지현의 손짓에 시선을 돌리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온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이다.
둘의 앞을 지나치는 순간 그가 이경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패용한 신분증에 검사 이경천이란 글씨가 보인 것이다.
“덕분에 구경 잘 했네요.”
현수는 로비까지 지현의 배웅을 받았다. 몇몇 사내들이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부러 모르는 척했다.
현수가 떠난 후 자리에 돌아오자 사무실의 미스 최가 지현에게 묻는다.
“권 사무관님! 아까 그분 누구세요?”
“아! 우리 현수 씨요? 제 애인이에요.”
“에이,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어머!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단박에 자신의 말이 부인당하자 지현의 눈이 커져 있다. 대체 무슨 근거로 믿지 못하느냐는 표정이다.
“아까 그분 잘 해야 스물다섯으로 보이던데요?”
“그러니까 내 나이가 우리 현수 씨보다 많아 보여서 애인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네, 솔직히 그래요.”
미스 최는 아주 직선적인 성격인 듯하다.
“근데 어쩌죠. 우리 애인은 나보다 나이 많은 스물아홉 살인데.”
“네에……? 스물아홉이요? 정말이에요?”
“호호, 동안이죠?”
“네. 근데 그분 뭐하시는 분이에요?”
“그냥 조그만 무역회사 운영해요.”
미스 최는 지현이 순순히 대꾸해 주자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계속해서 진도를 나간다.
“두 분 결혼하기로 한 사이에요?”
“난 그러고 싶은데 현수 씬 어떤지 아직 몰라요. 우리 부모님은 마음에 들어하시는데 아직 그쪽 부모님을 못 뵈었거든요.”
“네에……?”
미스 최의 눈이 커진다.
지현의 부친은 이번에 서울 고검장이 된 권철현이다.
게다가 지현 본인은 명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5급 공무원 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재원이다.
뿐만 아니라 빼어난 미모와 끝내주는 몸매의 소유자이다.
그렇기에 대구지검에서 서울 중앙지검으로 전근 신청을 하던 그 순간부터 서울의 총각 검사들 전부 지현을 기다렸다.
올라오기만 하면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을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런 미녀가 상대가 마뜩치 않아 해서 속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모든 총각 검사들이 탐내는 절세미녀를 마다하는 사내는 대체 어떤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또 물었다.
“그분이 운영하는 무역회가가 큰가 봐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잘 운영되기는 하나 봐요.”
“두 분 자주 만나세요?”
“에고, 최유정 씨. 이젠 일을 해요, 우리!”
지현의 말에 미스 최가 알았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간다. 엄연한 업무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던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메신저에 잠깐 사이에 취득한 정보를 입력했다.
곧이어 중앙지검 전체에 지현에게 결혼하고 싶어 하는 애인이 있음이 소문났다. 지현의 고단수가 통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잔머리는 통하지 않는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아니라면서 총각 검사들의 끊임없는 구애가 대기 중이기 때문이다.
사무실로 들어갔던 현수는 계룡산으로 텔레포트했다. 그리곤 전능의 팔찌에 마나를 모았다.
문득 도술을 가르쳐 달라던 정승준이 떠올라 웃음 지었다.
마나석이 까만색이 되자 지체하지 않고 차원이동했다. 지구 시간으로 8월 22일은 한참 덥다.
그래서 또 한 번의 바캉스를 떠난 것이다.
“마나여, 나를 아르센 대륙으로……!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스러졌다.
* * *
“흐으음! 역시……!”
아르센 대륙은 여전히 봄이다.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면 오늘은 6월 12일이다.
라수스 협곡 인근 영지인지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심신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다.
현수는 얼른 의복을 갈아입었다. 이제부턴 평범한 C급 용병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걸어 용병들이 머무는 여관으로 향했다. 풀잎마다 이슬이 맺히는 걸 보면 이른 새벽이다.
현수는 지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흡입했다.
청량한 기운이 차고도 넘치는 듯하다.
“어라! 저건……!”
여관 뒤쪽 공터에서 줄리앙이 몸을 풀고 있다. 샌드 웜에게 다리를 물린 이후 스콜론에게 쏘였다.
중독된 몸인지라 제대로 운신하지 못한 날들이 많았다.
조금 괜찮아졌다 싶었을 때엔 쏘러리스에게 납치되어 그야말로 신세를 망칠 뻔했다.
이런 날들이 연이었기에 예전의 실력이 녹슬었을까 싶어 이른 새벽이지만 몸을 풀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명색이 B급인지라 C급 용병들이 볼 수 없는 시각을 택한 것이다.
현수가 보기에 줄리앙의 검술은 단순 명료하다. 가로로 그은 다음 회수하던 검을 뒤집어 하체 공격을 한다. 다음엔 검을 회수하는 대신 몸을 돌려 상대의 중단을 공격하는 것이 전부이다.
다만 상당히 몸놀림이 빠르다는 것, 그리고 제법 힘을 실을 줄 안다는 것이다.
“흐음! 마나를 어떤 요령으로 싣는 건지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검에 실린 오러가 때로는 두껍고, 때로는 얇다. 제대로 된 요체를 깨우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휘이이익―!
“으읏!”
챙그랑―!
“제기랄……! 게리 녀석, 지랄하겠군.”
몸을 계속해서 회전시키며 검을 휘두르던 줄리앙은 실수로 바위를 쳤다. 그런데 그 순간엔 오러가 풀려 있었다.
그 결과 검이 반 토막 난 것이다.
그것은 함께했던 B급 용병 게리의 검이다. 줄리앙 본인은 모르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녀석이다.
그렇기에 줄리앙이 스콜론에게 쏘였을 때 현수에게 와서 도와달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어젯밤 줄리앙은 게리에게서 검을 빌렸다. 그런데 그걸 부러뜨렸다. 물어줄 생각을 하니 속이 쓰리다.
용병에게 있어 돈이란 목숨을 걸어야 버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써야 할 생각을 하니 짜증난 것이다.
“그나저나 반 토막 난 걸로 뭘 하지?”
모처럼 몸을 풀려던 계획이 어그러지자 난감한 듯하다. 다시 잠자리에 들기엔 애매한 시각이기 때문이다.
“어이! 줄리앙.”
“응……? 아, 하인스. 일찍 일어났네요.”
줄리앙은 현수가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 존댓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수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지구에서 온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찍은 무슨……. 근데 검이 부러졌네.”
“네, 며칠 쉬었더니 몸이 말을 안 들어서…….”
“쏘러리스에게 잡혀갈 때 검을 잃어버렸지?”
“네.”
“이거 받아. 내가 줄리앙에게 주려고 산 거야.”
“어머! 이건…….”
현수가 건넨 검을 받아 든 줄리앙은 눈빛을 빛냈다. 이곳 율리안 영지에서만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에 쓰던 것과 비슷한 것이다. 몇 번 휘둘러보니 마음에 쏙 든다.
“고마워요.”
“고맙긴! 잃어버린 검보다 더 마음에 들었으면 해.”
“네,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나저나 나 몇 번 구해줄 거 남았지?”
“세 번이요, 아니, 다섯 번으로 해요.”
“세 번이 맞는데?”
“아니에요. 쏘러리스에게서 구해준 게 한 번, 와이번으로부터 지켜준 게 한 번, 그리고 이 검을 주셨으니 한 번 더예요.”
“하하! 알았어. 잊지 마. 언제고 내가 꼭 연락할 테니”
“네, 같이 돌아갔으면 하는데 여기 있어야 한다면서요?”
“그래, 자작가에서 내게 의뢰할 일이 있나 봐.”
“나도 남을까요?”
“아냐. 아빠 보러 가야잖아. 안 그래?”
“네에.”
줄리앙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아빠인 하시쿤만 아니라면 이곳에 남고 싶다. 이곳에 남을 경우 돌아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
비록 가장자리이지만 마수의 숲을 지나야 하고, 캐러나데 사막도 거쳐야 한다. B급이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렇기에 용병들이 돌아갈 때 같이 가야 한다.
“이따 연회에 갈 때엔 어떤 복장으로 갈 거야?”
“갈아입어야죠. 명색이 연회이니.”
“후후, 알았어. 줄리앙의 변신을 기대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