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드워프 영감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반박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젠장! 그럼 내 귀가 먹었단 말인데……. 제기랄!”
영감은 투덜대며 자신의 귀를 후벼팠다. 하나 내기는 이미 졌다.
“좋아, 검을 만들어주지. 대신 조건이 있다.”
“조금 전에는 아무런 조건 없었는데요?”
“여기선 검을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한 때문이다.”
“그래요? 좋아요, 한번 들어보죠.”
“검은 만들어주되 저기 저 산맥 안의 우리 일족의 작업장에서 만들어주겠다. 그러니 원하는 검을 이야기해라.”
현수는 말로만 듣던 드워프제 검을 얻게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또한 호기심이 돋았다.
“잠시만요.”
밖으로 나온 현수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 아공간을 뒤졌다.
잠시 후, 원하던 놈을 꺼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체이탁으로 천지건설 직원과 군인들을 공격하던 지나 놈들에게서 회수한 것이다.
“영감님, 이런 모양의 검을 만들어주십시오. 크기는 평범한 롱 소드 정도면 됩니다.”
“좋아, 그거 이리 내놔 봐.”
현수가 건넨 것은 미국 해병대에서 제식용으로 사용 중인 OKC―3S 대검이다. 이것을 만든 제조업체에서는 다이아몬드 탄소강으로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매우 단단하다는 뜻이다.
“흐음……!”
드워프 영감은 칼날을 쓰다듬어 보며 대체 이게 무엇으로 만들어진 건지를 가늠했다. 인산염 비반사 처리로 블레이드를 검게 태웠으니 쉽게 구별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본 현수는 나직이 웃었다.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이라 짐작했던 때문이다.
“설마 못 만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다, 당연하지……! 하지만 시간은 좀 줘야겠다. 내가 하던 일이 있으니 그걸 마저 하고 난 뒤에 만들어주지.”
“좋습니다. 근데 못 만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못 만들어? 내가……? 좋아, 내가 못 만든다면 네가 원하는 어떤 거라도 들어주지. 되었냐?”
“좋습니다. 영감님을 믿죠.”
현수는 자신감없는 표정이 된 드워프 영감을 뒤로하고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아마 못 만들 것이다. 아르센 대륙에 와서 본 여러 병장기 가운데 스테인리스는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다이아몬드 탄소강이라 표현할 정도로 단단한 금속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쳇, 티타늄 합금강으로 만든 게 있었으면 더 확실했을 텐데.’
현수는 자신이 빌모아 일족 드워프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는 행위를 했다는 것도 모른 채 영지를 돌아다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율리안 영지는 든든한 석벽으로 에워싸여 있다.
높이는 7m 정도이고, 네 개의 성문이 있다. 성문의 두께는 60㎝ 정도 된다. 성벽의 바깥엔 폭 15m, 깊이 5m짜리 해자가 있다.
하지만 물로 채워져 있지는 않다. 해자가 절반 정도만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성벽 위에는 경계 근무 중인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활 또는 쇠뇌가 들려 있었다.
한편, 영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내성은 약간 높은 지대에 세워져 있다. 10m 높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두 개의 든든한 문이 있다. 해자는 파여 있지 않다.
가히 난공불락의 성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다.
“흐음, 성벽을 만들면서 치(雉)들을 조성했다면 더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텐데.”
치란 고구려가 쌓은 성벽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궁수로 하여금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어시설이다.
“이왕이면 여장(女墻)도 쌓으면 더 나을 텐데.”
여장이란 성벽 위에 설치하는 낮은 담장이다. 성벽 위의 병사들을 보호하는 한편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를 여담 또는 여첩(女堞), 타(?), 성가퀴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하인스님!”
“아! 아델.”
숙소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현수가 구해준 아델이었다.
“아가씨께서 전에 드셨던 음식을 먹고 싶으시대요. 주방으로 가셔서 요리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요? 그럼 그럽시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판이니 요리 연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따라 나섰다.
내성의 주방은 다른 곳과 달리 환해서 좋았다.
“네가 하인스냐?”
“……?”
다짜고짜 인상 쓰며 묻는 이는 나이 50쯤 된 뚱뚱한 사내였다. 기분이 상해 현수가 대꾸를 하지 않자 아델이 나선다.
“내성의 주방장이신 루갈 아저씨에요.”
“그래요? 제가 하인스 맞습니다.”
“……! 어떤 음식으로 아가씨를 꼬여냈는지 모르지만 주방 사용을 허락한다.”
말을 마친 루갈이 몸을 돌려 나간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 당했다 여기는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이다!
현수가 시선을 돌리자 주방에 배속된 하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주방에 있으면서도 잘 먹지 못해 그러는지 초췌하다.
방금 전에 나간 뚱뚱보 루갈과 너무 비교된다.
“새로 오신 주방장님이신가요?”
버짐 핀 얼굴로 조심스럽게 묻는 하녀는 현수의 표정을 살폈다. 루갈 같은 독재자가 아니길 기원하는 눈빛이다.
현수는 대답 대신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 내가 주방장이 된 거야?”
“글쎄요? 그건 모르겠고, 아가씨께서 하인스님이 만든 음식을 먹고 싶다고 주방에서 요리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만 있었어요. 그래서 신임 주방장님이 되신 건지는 알 수 없어요.”
“흐음, 그래? 일단 오늘 저녁에 먹을 요리를 나더러 하라는 거지?”
“네, 영주님과 가족 분들이 드실 요리를 부탁하셨어요.”
“인원은?”
“먼저 영주님과 대부인 마님, 그리고 작은 부인 두 분이 계세요. 그리고 아드님이 여섯, 따님이 다섯 분 계세요.”
“그럼 전부해서 15인분인가?”
“거기에 몇몇 귀족 분들과 그분들의 가족들이 초대되었어요. 그래서 전체 인원은 70명분 정도 될 거예요.”
“좋아, 70인분! 식재료는 어디에 있지?”
“주방장님, 식재료는 저쪽 창고에 있습니다.”
조금 전 현수에게 주방장이냐고 물었던 하녀이다.
“아가씨 이름은 뭐지?”
“저, 저는 루시아라고 해요.”
눈빛만 받아도 몹시 두렵다는 표정이다.
“좋아, 루시아. 식재료 창고로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
“네에, 따라오세요.”
현수가 루시아의 뒤를 따라 나가자 지금껏 숨죽이고 있던 주방 하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새로운 권력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루갈보다는 훨씬 나긋나긋하다. 하여 ‘이제는 안심이다!’라는 표정들이다.
그러는 한편 기대에 찬 표정이기도 하다.
루갈은 50대 뚱뚱보, 하인스는 20대 중반의 잘생긴 미남이다.
루갈의 강요에 의해 그의 욕정을 풀어주는 것보다는 젊은 청년과 함께하는 편이 낫다. 그렇기에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흐으음……!”
예상했던 대로이다.
명색이 영주성인지라 보존 마법이 걸린 식재료 창고가 있다.
그런데 마법사의 써클이 낮아서 그런지, 수확한 지 오래되어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채소들이 싱싱하지 못하다. 다만 고기들은 싱싱한 편이다. 필요할 때마다 새로 도축해서 보관하기 때문일 것이다.
“루시아! 가서 하녀들을 불러오겠소?”
“네, 주방장님.”
이유는 없다. 위에서 시키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
사실 루시아는 현수를 안내하면서 식재료 창고에서 몸을 줘야 할 상황을 상상했다. 실제로 루갈 주방장은 대낮에도 하녀들을 식재료 창고로 데리고 가곤 했다.
그렇기에 루시아의 이런 상상은 전혀 발칙하지 않다. 그게 율리안 영지 주방의 관행이며, 법도이기 때문이다.
“흐음, 내가 만드는 요리를 이런 재료로 만들 수는 없지.”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채소들을 꺼냈다. 그리곤 적당히 섞어두었다.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잠시 후, 현수가 꺼냈던 식재료는 모두 주방으로 옮겨졌다.
“깨끗하게 세척해.”
“네, 주방장님!”
현수의 말 한마디에 일곱 명의 주방 하녀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자칫 눈 밖에 나면 큰일이라는 듯 정말 열심이다.
모든 재료가 준비되는 동안 현수는 조리기구들을 살펴보았다. 현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문제는 화력이다.
주방 밖으로 나가 화력이 좋은 숯을 꺼냈다.
다음엔 주방의 화덕을 약간 개조했다. 모든 준비를 갖추곤 흐뭇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요리할 마음이 생긴 것이다.
8장 주방장이 되어 주게
“흐음, 이제 되었군. 슬슬 시작해 볼까?”
요리할 음식들은 이미 구상되었다. 양념 불고기, 잡채, 샤실릭, 삘메니, 샤우르마, 블린, 보르쉬, 솔랸카 등이다.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만드는 요리는 즐거웠다.
‘이걸 저어’ 그러면 젓고, ‘이걸 살살 뒤집어’라고 하면 마음에 꼭 들게 뒤집었다.
한편, 하녀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요리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깜짝 놀랐다.
냄새가 상상을 초월했던 때문이다.
하여 시중드는 동안 수없이 많은 침을 삼켰다. 하지만 자신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없을 것이라 체념했다.
지금껏 루갈은 하녀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다.
남아서 버릴 때에도 그랬다. 하늘같은 영주님과 하녀가 같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윽고 현란한 솜씨의 결과 모든 요리가 만들어졌다.
그야말로 지지고, 볶고, 끓이고, 데치고, 삶고, 조리고 등등 거의 모든 조리 행위가 있었던 것이다.
하녀들은 그런 움직임을 보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너무도 현란한 움직임이기에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마음이 든 때문이다.
아무튼 내어 가는 순서에 따라 음식들을 담기 시작했다.
“루시아! 이걸 식탁으로……. 조금 전에 말했던 그 순서대로 서빙해야 하는 거 알지?”
“네, 주방장님.”
루갈은 하녀들이 조금만 실수해도 욕을 하거나 걷어찼다. 그런데 신임 주방장은 실수를 많이 해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생긋 미소까지 짓는다. 무섭지 않다는 것을 파악했다는 뜻이다.
서빙을 하고도 음식은 많이 남는다. 족히 50인분은 된다.
현수는 하녀들이 분주히 주방을 떠나자 중앙의 조리 탁자 위의 물건들을 모두 치웠다. 그리곤 아공간에서 홑이붙을 꺼내 펼쳤다.
레이스 달린 식탁보도 있지만 크기가 너무 작아서이다.
어쨌거나 화사한 꽃무늬가 그려진 홑이불은 식탁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다음엔 보기 좋은 접시에 나머지 음식들을 세팅했다. 하녀들이 앉을 만한 의자 역할을 할 것들도 끌어다 놓았다.
아공간에서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숟가락도 꺼내 놓았다. 이계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 리 없기 때문이다.
“어머나, 세상에……! 주방장님……!”
서빙을 마치고 돌아온 루시아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나후엘 자작의 식탁보다 훨씬 나은 상차림이 차려져 있었던 때문이다. 하긴 그릇 자체가 다르다.
한국도자기에서 만든 도자기이니 아르센 대륙의 투박한 질그릇은 명함도 못 내밀 상황이다.
게다가 자작의 식탁에도 깔지 않는 화사한 식탁보는 또 뭐란 말인가! 여기에 반짝이는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숟가락도 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진귀한 물건들이다.
“자자, 여기 앉아요.”
“네? 저요……?”
루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녀 따위가 저 대단한 식탁에 어찌 앉는단 말인가!
공주님이나 앉아야 할 호화찬란한 식탁이다. 거기에 음식들은……!
루시아는 제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너무 세게 꼬집어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이런 모습을 본 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자, 레이디 루시아! 여기 앉아요.”
현수가 의자까지 빼준다.
‘신임 주방장님은 내가 마음에 든 건가?’
루시아는 현수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저러다 변태처럼 돌변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이 든다.
“루시아, 음식 식어! 어서 앉아서 먹자. 나도 시장하거든.”
“저, 정말이세요?”
“그래, 음식 많이 남았잖아. 자, 어서 앉아.”
“……! 네에.”
왠지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지만 루시아는 의자에 앉았다. 냄새만으로도 침을 삼키게 했던 음식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머, 루시아!”
서빙을 마치고 온 또 다른 시녀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주방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가씨도 여기 앉아요.”
“네? 방금 뭐라 하셨어요?”
“우리도 먹어야 하지 않나요? 어서 앉아요.”
“저, 정말이세요?”
하녀는 정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조금 전의 루시아처럼 제 허벅지라도 꼬집었는지 아픈 표정을 짓는다.
현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루시아도 앉아 있는데. 보면 몰라요?”
“아! 네에.”
나머지 하녀들도 모두 돌아왔다. 서빙은 주방 하녀들의 몫이고 식사하는 동안의 시중은 시종들이 맡는다고 한다.
음식이 모자라면 시종들이 가지러 올 것이다.
어쨌거나 하녀들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지만 정말 맛있게들 먹는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시종 가운데 하나가 왔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란 모양이다.
“세상에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음식이 더 필요한가요?”
“아! 네에, 하인스님이시죠? 아가씨께서 이 음식을 더 달라고 하십니다.”
예상대로 양념 불고기이다. 현수는 두말 않고 새 접시에 수북하게 담아주었다.
“또 음식이 필요하면 와도 좋아요. 배가 고프면 여기서 조금 먹어도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