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242화 (242/1,307)

# 242

“네에.”

현수가 고개를 끄덕일 때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엘리시아가 입술을 연다.

“거봐요. 제가 검술도 대단하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와이번에게 잡아먹힐 뻔했을 때 하인스님이 우릴 구했단 말이에요.”

“그, 그래!”

나후엘 자작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현수가 요리만 기막히게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라임하르트 남작이 고개를 숙일 정도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 사람 어떻게든 붙잡아야 해요.”

“그래! 그렇구나. 널 주고라도 붙잡고 싶다.”

“네……?”

나후엘 자작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대꾸한 것이다.

하긴 일 검에 오크 이십여 마리가 반쪽으로 갈라지는 장면을 목도하였다. 꿈에도 그리던 경지이다. 그렇기에 현재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멀쩡한 정신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주고라도 하인스를 붙잡는다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저, 정말이세요? 저, 하인스님에게 시집가도 돼요?”

“뭐라고?”

문득 정신을 차린 나후엘 자작이 물었다.

“저 시집가고 싶다고요.”

“너는 이 상황에 결혼 얘기를 꼭 해야 하느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엥? 무슨 소리에요? 저를 하인스님에게 시집보내서라도 잡고 싶다고 하신 건 아버지잖아요.”

“내, 내가……?”

“쳇……! 그럼 제가 말을 지어내요? 아버지! 저, 저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어요. 보내주실 거죠?”

엘리시아는 품고 있던 마음을 드러내 버렸다. 귀족이 평민과 결혼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라 생각하던 아버지이다.

따라서 허락받지 못하면 하인스에게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한 것은 정말로 시집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와! 아버지, 사랑해요. 헤헷! 저 정말 좋아요. 하인스님이……!”

딸이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하지만 정작 나후엘 자작은 아직도 멍한 상태이다. 검끝에서 쭉 뻗어나오는 검기를 본 게 얼마만인가!

본인도 검사이기에 늘 높은 수준을 동경했다.

하여 지금도 매일 검술 연마를 한다. 하지만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서 멈춘 게 벌써 이십 년째이다. 그런데 중급, 고급을 넘어 아예 최상급에 이른 검사를 보니 얼떨떨한 것이다.

“와와와와! 오크들이 물러간다. 와아아아……!”

병사들의 함성에 정신을 차려보니 진짜로 물러가고 있다.

마법사들이 총동원되어 함께 공격한 결과이다. 현수가 살펴보니 3써클 마법사 세 명에 2써클이 열한 명, 1써클은 스무 명이다.

아무튼 올 때는 일만 마리 이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많아야 3,000마리가 후퇴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상당수는 부상을 당한 듯 절뚝이고 있다.

병사들의 환호성에 영지민들까지 성벽에 올라 밖을 살폈다.

수많은 오크들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다.

“와와와와! 만세! 만세! 만세! 와아아아아!”

병사들은 죽어 있는 7,000여 마리 중 최소 3,000여 마리가 현수의 검에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혈로를 뚫은 것이다.

이 사실은 삽시간에 입소문으로 번졌다.

“와와아아! 하인스님! 만세! 만세! 만세! 와아아아아……!”

환호성은 끝없이 이어졌다.

상황이 끝난 뒤 나후엘 자작이 불렀다.

“수고했네.”

“네에.”

“실력이 대단하더군. 왜 숨겼나?”

“숨긴 게 아니라 발휘할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나후엘 자작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 자네에게 묻겠네. 엘리시아를 준다면 이곳에 남겠는가?”

현수는 잠깐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엘리시아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 대답은 해야 한다. 그렇기에 지극히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 죄송합니다.”

“으으음……!”

예상대로인지라 나후엘 자작은 놀라는 표정 대신 침음만 냈다.

나후엘 자작이 본 하인스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지금껏 읽었던 수많은 영웅전기에 등장했던 그런 인물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나중에 왕이 되거나 황제가 되었다. 그렇기에 훗날을 생각하여 보다 정중히 말했다.

“어찌 되었든 오늘 본성을 위기로부터 구해주어 고맙네.”

“이곳에 머무는 동안엔 저도 이곳 사람입니다. 따라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작님!”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엘리시아는 자작과 면담을 마치고 나온 현수를 납치하듯 제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보는 눈이 있기에 뿌리칠 수도 없어 따라 들어갔다.

아델이 다과를 내오곤 스르르 물러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엘리시아가 묻는다.

“아버지는 만나본 거예요?”

“네.”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현수가 말끝을 흐리자 엘리시아가 눈빛을 빛낸다.

“하인스님!”

“네?”

“설마 거절하신 건 아니죠? 그쵸? 어서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

“설마……. 흐흑! 흐흐흐흑!”

“죄송합니다.”

현수는 눈물짓는 엘리시아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으음, 여길 떠날 때가 되었군.’

며칠 더 머물면서 라수스 협곡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던 계획은 접어야 했다.

현수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떠날 땐 떠나더라도 먹을 음식은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게 자신을 조건 없이 좋아해 주는 엘리시아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 생각한 것이다.

부드러운 식빵을 구워냈다. 그리곤 각종 재료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아울러 초콜릿 음료도 만들었다.

영주와 귀족, 그리고 고생한 기사와 병사들을 위한 것이다.

다음엔 내성에 피신해 있는 영지민들을 위한 빵을 구웠다. 모카크림빵과 소보로빵이다.

물론 안에는 달콤함 슈크림 내지는 버터크림을 넣었다. 평생 다시는 못 볼 별미를 만들어준 것이다.

일련의 작업을 마치고는 산책에 나섰다. 모두가 분주하게 복구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을 하다 말고 구토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던 것이다.

“흐음 이게 대체 뭐 때문이지?”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사람들의 안색 등을 살폈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르는 상념이 있었다.

“혹시 그건가?”

현수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머리카락을 뽑아달라고 청했다. 오늘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두말 않고 뽑아준다.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는 묻지도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던 현수는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인 외성의 성벽 위로 올라갔다.

“아! 하인스님, 어서 오십시오.”

라임하르트 남작이 반색한다.

“복구 작업이 잘 진행되고 있네요.”

“네, 이번이 가장 많은 숫자가 내려온 건데 희생자는 가장 적었습니다. 부상자도 적었구요. 그래서 작업 진척이 빠른 겁니다.”

“그거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언제 한번 가르침을 주십시오.”

“에구, 남작님이 그러시니 쑥스럽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껏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하인스님은 지금껏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강한 분입니다. 그러니 꼭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진심 어린 표정이다. 현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네에. 시간을 한번 내보지요.”

“감사합니다.”

잠시 현수 곁에 있던 라임하르트 남작은 작업 지시를 내리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갔다.

“흐음! 놈들이 다시 몰려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와이드 센스 마법으로 살피기엔 숲이 너무 멀다. 그러던 중 오크들의 사체를 치우는 병사들을 보았다.

그냥 놔두면 악취가 나기에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디그 마법으로 땅을 파면 사체를 굴려놓고 흙으로 덮는 작업이다.

성벽에서 내려온 현수는 성문을 지나 바깥으로 나갔다.

정말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오크의 사체들이 널려 있다.

벌써부터 악취가 나기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가장 멀리서 작업하는 곳까지 다가갔다.

“마나의 힘이여, 눈앞의 땅을 깊숙이 퍼 올려라. 디그!”

퍼퍽―!

마법사가 영창을 하니 오크 하나를 묻을 정도로 땅이 파인다.

“흐음, 그냥 저렇게 묻으면 나중에 수질오염의 문제가 생기는데……. 사체에서 나온 침출수에 오염되면……. 끄응! 일손이 딸려 지금은 방법이 없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사체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불에 태우는 것이다. 그러려면 엄청난 장작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금 먼 곳까지 나가보았다.

“와이드 센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가 싶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뭔가의 움직임이 발견되었다.

개체수가 그리 많지는 않다. 따라서 고블린이나 오크는 아니다.

놈들은 늘 떼로 공격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뭐지?”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피니 모두 작업하느라 여념이 없다.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플라이!”

순식간에 현수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늘로 오른 현수는 조금 전 기척을 느꼈던 곳으로 날아갔다.

“이런……!”

무엇인지를 확인한 현수는 즉시 작업자들 인근으로 되돌아왔다.

“매직 캔슬!”

신형을 드러낸 현수는 모든 작업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여러분! 트롤이 나타났습니다. 모두 피하세요. 트롤입니다. 모두 피해야 합니다. 빨리 성으로 돌아가십시오!”

현수의 고함에 시선을 돌렸던 사람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고 있는 무리들을 보곤 대경실색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많아야 세 마리 정도씩 몰려다니는 트롤이 무려 삼십여 마리나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면서 뛰어가는 모습을 본 현수는 싱긋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놈들이 필요했는데 잘 되었군.”

현수는 칼을 뽑아 들고 트롤 쪽으로 움직였다. 먼 곳으로부터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라임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하인스가 트롤의 전진을 막으려는 것으로 오인한 것이다.

“야아압!”

현수가 일부러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자 트롤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그와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다가왔다.

크릉! 크르르르릉! 꽈르르! 키케쿠쿠! 크르릉!

트롤들은 다가오는 현수를 단숨에 잡아먹겠다는 듯 쿵쾅거리면서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에 잡힐 현수가 아니다.

잽싸게 방향을 바꿔 숲 쪽으로 달렸다. 그러자 트롤들이 일제히 현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일단 작전 성공!”

라임하르트 등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먼 곳까지 가야 마법을 쓸 수 있다. 아무리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 되었다지만 트롤 삼십여 마리의 합공을 당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흐음, 이놈들의 피가 필요하니 빙계 마법을 써야 해.”

어느덧 숲속 깊숙한 곳까지 당도한 현수는 미친 듯이 다가오는 트롤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선두에 있던 놈이 몇 발짝 앞까지 다가왔을 때이다.

“아이스 스피어!”

쒜에에엑―!

퍼억―!

“오토믹 붐!”

꽤에엑―! 꽈당―!

머리에 박힌 창이 작은 폭발을 일으키자 운동중추가 얼어버린 트롤이 그대로 쓰러진다.

다음 순간 또 다른 아이스 스피어가 목표에 명중하고 있었다. 그 녀석 역시 육중한 동체를 뉘였다.

“매스 아이스 스피어!”

쒜에에엑―! 쑤아앙! 쐐에에엑! 쉬이익―!

퍼억―! 퍽―! 퍼퍽―!

“오토믹 붐! 오토믹 붐! 오토믹 붐! 오토믹 붐!”

꽤에엑―! 케엑! 끄악! 크억!

꽈당―! 와당탕! 꽈당탕! 쿠웅―!

삽시간에 네 마리가 이승을 떠난다.

이쯤 되면 겁을 먹고 도주해야 한다. 하지만 눈앞의 먹이에 눈이 멀어버린 트롤들은 현수를 잡아먹겠다고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7써클 마스터가 이에 잡히겠는가!

아무튼 세 마리가 또 달려든다. 이때 번뜩이는 상념이 있다.

“참, 일부는 보존해야지? 홀드! 블리자드!”

쐐에에에엑―!

주변의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되는가 싶더니 달려들다 멈춘 채 어리둥절해하는 트롤들을 덮친다. 그와 동시에 고요해졌다.

전신이 얼어붙은 때문이다.

“좋아, 효과가 있어! 아공간 오픈!”

세 놈을 아공간에 넣고는 달려드는 트롤들을 바라보았다.

검만 가지고 상대해야 했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수는 7써클 마스터인 대 마법사이다.

마법으로 상대한다면 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트롤들이 달려들고 있다.

“좋아, 이놈들아! 한번 해보자고, 누가 이기는지……! 홀드, 홀드, 홀드! 블리자드!”

쒜에에엥―!

“아공간 오픈!”

이번에도 단번에 세 마리를 잡아넣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여 반드시 죽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아공간에 든 이상 생명 유지가 곤란하다.

공기도 중력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다가오는 놈들을 모두 마법으로 처리했다.

결국 서른두 마리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놈들 중에서 아이스 스피어에 목숨을 잃은 놈들의 선혈을 받아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선한 피이다.

이 작업은 꽤 시간이 걸렸다. 정제만 하면 귀한 약이 되기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뽑아내느라 그런 것이다.

아무튼 회복 포션을 만들 재료가 충분해지자 현수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고맙군! 적시에 나타나줘서. 게다가 떼로 몰려와서 더 좋았다. 참! 이것들도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