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아이스 스피어에 당한 두 마리의 트롤로부터 얻은 선혈을 정제하여 회복 포션 240병 분량을 제조해 냈다.
지구인에겐 너무 과하기에 이것을 나눠 720개의 병에 담았다.
언제 또 정제 작업을 해야 할지 몰라 지하실에 있던 기구들까지 모두 아공간에 넣어두었다.
일련의 작업이 마쳐진 직후 텔레포트 마법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거점을 거쳐 아디스아바바에 다시 당도하였다. 하지만 곧장 킨샤사로 가지는 않았다.
코리안 빌리지에는 아직도 치료받아야 할 환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머! 오셨어요?”
“네, 할아버지는 좀 어떠세요?”
화들짝 놀라며 반색하는 여자는 리야 아스토우이다. 현수에게 가장 먼저 치료를 받은 바샤 아스토우 할아버지의 손녀이다.
처음엔 약간 까칠하게 굴었다. 하나 현수의 손에 의해 할아버지가 기력을 되찾는 모습을 보곤 사흘을 따라다녔다.
다른 환자들을 살피는 동안 간호사 역할을 해준 것이다.
빈손으로 왔기에 마땅한 약품이 없어 약을 가지러 가겠다는 말에 현수를 붙잡으려는 군중들을 설득해 준 여인이기도 하다.
“많이 좋아지셨어요. 오늘은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도 하셨고요. 정말 고마워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약은 가져오셨나요?”
“네, 필요한 만큼은 가져왔어요. 그리고 요즘 에티오피아에 콜레라와 홍역이 전염되고 있다고 들어서 백신도 조금 가져왔어요.”
“……!”
리야는 눈물을 글썽인다.
현수는 치료를 시작하면 밀려드는 환자를 보느라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했다. 떠나던 날엔 아침에 한 끼, 그것도 인제라8)를 먹은 게 전부였다. 그나마 입에 맞지 않는지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런 현수가 자신들을 생각하여 백신까지 준비해서 다시 왔다니 감격의 눈물을 보인 것이다.
“오늘은 이곳 코리안 빌리지 사람들에게 콜레라 백신부터 주사할게요. 혹시 간호사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가르쳐 주시면 제가 할게요.”
“아닙니다. 그럼, 제가 해야 해요.”
자칫 잘못되면 봉사를 하고도 욕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네에.”
“리야! 사람들을 모아주시겠어요? 현재 아픈 사람들은 빼고 모이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마을 바깥에 약품들을 내려놓았으니 그것 좀 가져다주시고요.”
“네, 그렇게 할게요.”
에티오피아 처녀 리야가 나간 후 현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바샤 아스토우 할아버지! 안에 계십니까?”
“누구……?”
“한국에서 온 의료봉사대원입니다.”
“아, 어서 오시오.”
목소리에 한결 힘이 실린 느낌이다.
“몸은 좀 어떠세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우. 고마우이.”
“에이, 고맙기는요. 예전에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주신 할아버지가 오히려 더 고맙습니다.”
“한국……! 정말 좋은 나라이네. 예전의 일을 잊지도 않고 이렇게……. 정말 도와줄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였어.”
할아버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현수는 오늘 하루 종일 주사만 놔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아스토우 할아버지의 말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보람찬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스터 킴! 약품 다 가져왔어요.”
“리야, 고마워요. 이제 콜레라 예방 접종할 사람들을 모아주세요.”
“네, 그건 걱정 마세요. 벌써 줄 서 있어요.”
한국에서 온 성자가 전염병을 막아줄 약을 가지고 왔다는 소문이 번지자 너도 나도 모여든 것이다.
밖에 나가보니 누군가 천막을 치고 있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해 보죠.”
포장을 풀어 백신을 꺼낸 현수는 한 사람 한 사람 건강 상태를 보아가며 백신을 주사했다.
허약해 보이거나 영양실조로 판별되면 일단 뒤로 미뤘다.
예방 주사를 맞으려는 행렬은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언젠가는 끝나는 법이다.
드디어 맨 마지막 사람까지 주사를 맞았다.
“휴우! 이제 끝이군요.”
“미스터 킴! 식사를 해야지요.”
“네, 배가 조금 고프네요.”
“제가 음식을 준비했어요. 따라오세요.”
리야의 인도를 받아 간 곳은 코리안 빌리지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의 집인 듯하다. 한국에 비교하자면 시골의 자그마한 집일 뿐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흠흠! 이거 무슨 냄새죠? 커피 냄새 같은데…….”
“맞아요, 커피 냄새!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 볶을 때 나는 연기와 향내로 훈증을 하면 병균을 소독한다고 믿어요. 그래서 아픈 사람이 있는 집마다 이런 냄새가 나죠.”
그러고 보니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발원지이다.
하라(Harrar), 이르가체페(Yirgacheffe), 시다모(Sidamo), 짐마(Djimmah) 등의 주요 산지이며 아라비카(Arabica) 커피의 고향이다.
이밖에도 12종이나 되는 커피들을 생산하는 국가이다.
“커피 냄새가 좋군요.”
“식사 하시면 제가 한잔 드릴게요.”
“네에.”
안으로 들어서니 집주인 부부가 반색하며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보니 이 집 주인의 아버지 역시 현수에게 치료를 받은 사람이다.
간경병으로 복수가 차서 임산부처럼 배가 불렀었다. 하지만 현수의 치료를 받은 후 정상인에 가깝게 되었다.
부친을 사지로부터 생환시켜 준 은인이기에 집주인은 여러 음식을 준비했다. 물론 에티오피아의 전통음식들이 대부분이다.
인젤라도 보이고 띱스(Tibes)도 보인다.
먹어보니 우리나라의 양념 없는 불고기와 비슷한 맛이다. 현수는 띱스를 인젤라에 싸서 먹었다. 약간 쌉쌀한 맛이 났다.
이밖에 말카라는 보리와 버터로 만든 죽이 있었다. 먹어보니 죽보다는 찰떡 비슷한 맛이 났고 상당히 맛이 있다.
다른 것들도 있었지만 가장 현수의 입맛을 당긴 것은 역시 치킨과 맥주였다.
리야의 시중을 받으면서 식사를 마친 현수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집주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엎드려 절을 한다.
오히려 내가 더 고맙다는 뜻이라 한다.
리야는 디저트로 커피를 내왔다.
시다마 지방(Sidama Region) 아마로(Amaro) 산 인근에서 생산된 커피라 한다.
맛을 보니 블루베리나 블랙베리류 같은 딸기 맛이 느껴졌다. 책에서만 보던 딸기 향과 맛이 나는 커피였던 것이다.
현수는 리야로부터 커피 수업을 받았다. 알고 보니 리야는 커피 농장에서 일한다고 한다. 평범한 일꾼이 아니라 관리직이라는데 그래서인지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밖에 나와보니 어느새 긴 줄이 형성되어 있다. 한국에서 온 성자의 치료를 받으려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야가 나서서 하루 종일 예방 접종하느라 피곤한 사람을 쉬지도 못하게 하냐면서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가족의 목숨이 오가는데 어찌 이런 소리가 들리겠는가!
현수는 환히 웃으며 불을 밝혀달라고 했다. 그리곤 진료를 시작했다.
대부분 못 먹어서 생긴 병이다. 또한 초기에 진료를 받지 못해 중증이 된 상태였다.
현수는 침술을 시전하는 척하면서 큐어와 힐, 그리고 컴플리트 힐을 적절히 사용했다.
회복 포션은 심한 경우에만 투여했는데 한 병씩 다 먹인 게 아니라 적당량만 복용시켰다.
그것만으로도 눈에 뜨이는 효력을 보였다. 사람들은 가느다란 침 하나로 이곳저곳을 쿡쿡 찌르기만 하는데도 병자들이 좋아지는 모습에 환호성을 터뜨리곤 했다.
진료는 밤 12시가 넘도록 계속되었다. 현수가 줄을 섰던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의 줄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의라도 한 듯 새로운 환자의 줄 서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누군 치료받고 누구는 못 받게 하느냐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너무도 시끄러웠기에 현수는 진료를 하던 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오늘 치료받지 못한 환자들은 내일 진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약속을 했다.
그들에겐 리야가 황급히 만든 번호표를 주었다. 그제야 소란을 멈추고 고개 숙여 사과를 한다.
현수는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기에 환한 웃음만 보여줬을 뿐이다.
결국 이날의 진료는 새벽 3시를 넘기고야 끝났다.
짧은 시간 동안 무려 84명이나 되는 환자를 치료했다.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완치될 것이다. 포션과 마법의 위대한 효력 때문이다.
죽음의 문턱에 있던 가족을 되찾게 된 사람들은 코리아라는 나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60여 년 전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또한 오래 전의 은혜를 갚기 위해 성자를 보내준 나라이다.
처음엔 왜 한 명만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한 명은 평범한 의사 100명에 버금간다.
뿐만 아니라 못 고치는 병이 없다.
내과, 외과, 정형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비뇨기과, 소아과, 심지어는 산부인과까지 망라한다.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치과이다.
썩은 이빨을 뽑아는 주지만 새 이빨을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현수가 잠든 사이에 아디스아바바는 난리가 벌어졌다. 아침 신문에 대서특필된, 한국에서 온 성자에 관한 기사 때문이다.
“끄으응!”
모처럼 숙면을 취한 현수가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움직임을 멈췄다. 리야가 양치와 세수할 물을 떠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일어나셨어요? 피곤하시죠?”
“리야……!”
“여기서 세수하세요.”
리야가 내민 세숫대야엔 맑은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고마워요.”
“고맙기는요. 이 정도는 당연한 거죠.”
리야가 생긋 웃는다. 그러고 보니 에티오피아에 와서 본 아가씨들 가운데 가장 예쁘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아주 잘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고 한다.
까무잡잡한 미녀가 보는 앞에서 세수하고 나니 수건을 내민다. 향수라도 뿌린 듯 향내가 난다.
“고마워요.”
“아니라니까요. 자, 이제 양치하세요.”
내민 칫솔을 받아 이빨을 닦았다.
“아침식사 준비해 놨어요. 가세요.”
리야가 이끄는 대로 가니 코리안 빌리지의 촌장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이 예복을 입고 도열해 있다.
“차렷! 성자께 대하여 경계!”
구호 없이 일제히 경례를 붙인다. 느닷없이 당한 현수는 저도 모르게 경계를 했다.
“바로!”
모두가 손을 내리기에 현수도 손을 내렸다.
“우리 코리안 빌리지를 방문하여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준 성자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건 우리가 마련한 선물입니다.”
촌장이 내민 것은 누런 봉투에 싸인 것이다.
선물이라지만 포장도 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 봉투의 윗부분은 열려 있다. 들여다보니 커피 원두가 들어 있다.
로스팅을 하지 않은 생두인지 옅은 쑥색이다.
커피 농장을 계획하고 있지만 아직 전문적인 지식이 없기에 이건 뭔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눈치 빠른 리야가 입을 연다.
“그건 게이샤(Geisha) 품종의 씨예요. 아라비카 중 하나이지요. 커피 중의 커피라 불리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현수가 허리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자 노병들 역시 고개를 숙여준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맞절을 한 것이다.
곧이어 단체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노병이고 현수만 젊은이다. 쑥스러웠으나 어쩌겠는가! 현수는 리야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마쳤다.
“리야! 오늘도 어제 그 천막이지?”
“네! 그런데 소문이 나서 그런지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요.”
“흐음, 사람들에게 말해주세요. 내일까지만 진료를 한다고.”
“그럼 다시 안 오시나요?”
“아니요, 조만간 다시 올 겁니다.”
“네에. 알겠어요.”
또 다시 진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점심은 굶었다.
현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코리안 빌리지의 환자 및 다른 곳에서 온 환자들을 보살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침 몇 방에 고질병들이 시료된다. 점심나절엔 방송국에서 왔는지 촬영하려고 한다.
일단 저지했다.
왜 그러느냐는 리포터의 물음에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싫다고 하였다. 결국 치료된 환자들만 촬영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대신 취재에 응해달라고 하였다.
리야는 하루 종일 진료만 했으므로 휴식을 취할 겸 커피 한잔 하면서 취재에 응하라 하였다.
결국 자리를 바꿔 리포터와의 대담을 시작했다.
“먼저 여쭙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온 겁니까?”
“1950년에 동양의 작은 나라 코리아에선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에티오피아는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도왔습니다.”
“네, 그랬었지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은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리포터는 알고 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라를 재건하느라 곁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가 우리에게 베풀었던 호의를 잊은 것은 아닙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제가 이곳에 왔습니다. 한국을 도왔던 노병들이 어려운 형편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겁니다.”
“아! 네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어르신들을 도우려는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왜 얼굴 촬영을 거부하신 거죠?”
“속담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 와서 진료 행위를 했다고 드러내면 그건 생색을 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촬영을 하지 말라고 부탁드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