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잠시 쏠렸던 사람들의 시선이 제자리를 찾은 것은 현수의 앞에 시원한 아이스커피가 놓인 후였다.
“내일 화물이 당도합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마타디 항에 가서 확인했습니다.”
“제 임무는 통관된 컨테이너를 이쪽 사람들에게 넘기는 겁니다. 일이 잘 끝나면 한잔합시다.”
“좋죠, 이쪽은 제 구역이나 마찬가지이니 제가 쏘겠습니다.”
“하하! 누가 내면 어떻겠습니까? 같이 마시는 게 중요한 거죠. 안 그렇습니까?”
“물론입니다.”
“통관엔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네, 그럴 것 같습니다.”
“우리 쪽 배는 내일 오후 2시경에 입항한다고 합니다.”
“통관은 걱정 마시고 트레일러 수배나 해두십시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이미 다 되어 있습니다.”
보아하니 오늘 입국한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런데 통관이 되면 화물을 어떻게 확인시킵니까?”
“계량소에서 총중량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
현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게만으로 내용물을 확인시킨다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지르코프는 왜 그런지 이해한다며 웃는다.
“안에 담긴 내용물은 이쪽 사람들이 노보로시스크에 와서 다 확인했습니다. 혹시 기억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뒤쪽에서 따르던 키 작은 사내를 기억하십니까?”
“누구요? 아! 그럼 그때 그 흑인이…….”
“네, 그가 반군 지도자 마림바입니다. 미스터 킴이 화물 확인할 때 그 사람도 같이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컨테이너를 봉할 때 봉인을 직접 했지요.”
“그랬군요.”
현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담길 때 내용물을 확인했고, 봉인은 직접 했다.
그 봉인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내용물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마림바는 각각의 컨테이너에 번호를 매겨두었고, 각각의 중량을 기록해 두었다.
따라서 컨테이너를 통째로 달아보아 번호와 무게가 일치하면 된다는 뜻이다. 물론 봉인이 완전할 때이다.
“계량소는 어디를 이용하십니까?”
“항만 입구에 알아봐 두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는 통관까지만 관여하겠습니다. 이후엔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지요. 그나저나 이곳 맥주 맛이 각별하다는데 저녁 먹고 한잔 어떻습니까?”
“하하, 좋죠.”
현수는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제가 할 일이 있어 자리를 잠깐 비워야겠습니다. 몇 시까지 다시 오면 되죠?”
같이 있어봤자 대화할 내용이 별로 없다. 그렇게 앉아 있느니 차라리 서류 작업을 할 생각을 한 것이다.
시간 약속을 하고 헤어진 현수는 천지약품 사무실로 되돌아가 이실리프 농산에 관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
13장 이 집 어때요?
이실리프 농산의 입지는 오자이르 지역으로서 붐바와 부타, 그리고 비날리아로 둘러싸인 곳이다.
정글도 있지만 황무지도 있는 곳이다.
면적은 일단 1억 평 정도 예상한다. 약 330㎢이다.
불하기간은 100년이며, 그곳까지의 도로는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서 닦아주어야 한다.
대신 이실리프 농산은 생산량의 절반 정도를 생산 원가에 20% 마진을 얹은 가격으로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 납품한다.
작물은 쌀과 옥수수가 우선이며 차츰 다른 작물까지 확대한다. 농사지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볼 생각이다.
여기에 필요한 모든 재원은 전적으로 현수가 부담한다. 아울러 최대한 많은 콩고민주공화국 국민들을 고용한다.
큰 테두리가 그어지자 세세한 부분에 대한 계획을 입안했다.
정글과 황무지는 한국에서 반입할 각종 벌목 기구와 중장비를 이용하여 개간한다.
농업용수는 부지를 감싸며 흐르는 두 개의 강물을 이용할 계획이다. 관계수로를 만들면 해결될 것이다.
만일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면 이그드라실의 잎을 이용하여 샘을 팔 것이다.
이실리프 농산의 중심지에는 고용인들이 모여서 살 마을이 조성된다. 전통방식의 주거보다는 현대식 주거가 제공될 것이다. 위생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건축 자재는 정글을 개간하면서 취득한 목재를 사용할 계획이다. 갓 벌목한 것은 수분이 많은 상태이기에 타임 패스트 마법으로 해결할 생각이다.
사업계획서를 만들다보니 점점 분량도 늘고, 고려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장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피리 불면서 노래까지 불러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려면 한두 시간 만에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현수는 묘안을 짜냈다.
적당한 곳을 찾아 앱솔루트 배리어를 치고, 타임 딜레이 마법을 걸었다. 그리곤 마나 집적진을 깔고 앉은 채 각종 서류를 가다듬었다.
외부시간으론 4시간, 결계 안 시간으론 30일이 지났을 무렵 현수는 사업계획서를 완성시켰다.
여러 번 경우의 수까지 따져 허술한 점이 있는지를 확인한 완전한 사업계획서이다.
이번 것은 들어가는 비용 대비 얻어내는 수익까지 계산되어 있다. 결론은 5% 미만의 수익이다.
다시 말해 별 이득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족했다. 못사는 나라 콩고민주공화국에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일용할 양식 가운데 일부를 제공한다.
물론 20%라는 이득이 있다.
나머지는 한국 등으로의 수출을 한다. 그런데 국제 곡물가와 대비해 보면 별다른 수익이 없다. 분명 물량 공세와 더불어 덤핑 공세를 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았다. 대한민국에 유기농법으로 지은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것 자체 때문이다.
“나, 언제부터 애국자가 된 거지?”
두툼한 사업계획서를 툭툭 두드리며 현수가 나직이 중얼거린 말이다.
“미스터 지르코프! 오래 기다렸어요?”
“조금 늦었네요.”
“네, 긴급히 작성해야 할 서류 작업이 있어서요.”
“갑시다. 내가 좋은 델 봐놓았습니다.”
현수는 지르코프와 차를 타고 시가지를 구불구불 이동했다.
“내리시죠.”
“네.”
콩고민주공화국에선 보기 힘든 저택이다.
지르코프는 제집 드나들 듯 거리낌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심코 따라 들어가던 현수가 걸음을 멈췄다.
흰색 드레스로 성장을 한 늘씬한 미녀 때문이다.
“아니……! 이리냐!”
“아아! 미스트르 킴!”
와락 안기는 이리냐를 안은 현수와 시선이 마주친 이는 지르코프이다.
마음에 드느냐는 듯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현수의 속내를 모르기에 이걸 배려라고 한 것이다.
‘끄으응……!’
이번 침음은 속으로만 냈다. 안 그러면 이리냐가 마음의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미스트르 킴! 이 집 어때요?”
“이 집……? 왜? 좋은데?”
들어오면서 본 이 집은 3층짜리 저택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스무 개 이상의 방이 있을 집이다.
“지르코프 보스가 우리에게 선물하신 집이에요.”
“뭐라고……?”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를 묻기 위해 시선을 돌리자 지르코프가 만족스런 웃음을 짓고 있다.
“미스터 지르코프. 대체 이게 무슨……!”
“하하, 미스터 킴이 만족해하는 듯하여 기분이 좋습니다. 자, 집 구경이나 해봅시다.”
“끄으응!”
현수는 내놓고 침음을 냈다. 이번 것은 마음 상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지르코프가 앞장서고 현수와 이리냐가 뒤를 따랐다. 예상대로 방이 스무 개가 넘는다. 정확히는 서른두 개이다. 화장실이 열일곱 개, 자쿠지 딸린 욕실만 여덟 개이다.
이밖에 대형 거실과 주방, 그리고 식당과 서재가 있다.
집 밖엔 수영장이 있으며 널찍한 잔디밭도 있다. 한국에서 이만한 집을 사려면 최소 200억은 있어야 할 집이다.
“미스터 지르코프! 이건 너무 과분한 선물입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 대보스의 귀빈이니 이 정도에선 사셔야지요. 자자, 어쩌나 저쩌나 음식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 식당으로 갑시다.”
지르코프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니 그야말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원탁엔 딱 세 개의 의자만 있다. 현수와 지르코프, 그리고 현수의 여자인 이리냐를 위한 것이다.
메이드 복장을 한 흑인 아가씨들이 눈짓을 받자 음식을 내오기 시작한다.
와인까지 동원된 제대로 된 프랑스식 만찬이다.
음식 맛은 정갈했고, 맛은 깔끔했다. 좋은 재료를 쓴 듯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지르코프는 식사하는 내내 집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이 집은 원래 벨기에 귀족이 살던 집이다. 그런데 콩고민주공화국이 독립하면서 남겨놓고 떠난 것이다.
결국 현수는 지르코프의 선물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이리냐가 과제 때문에 곧 귀국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수는 부러 만취하도록 술을 먹였다. 책임지지 못할 인연을 맺지 않기 위함이다.
이리냐는 저택을 선물 받은 것이 기뻐 그러는지 계속해서 잔을 비웠다. 물론 현수도 상당히 많이 마셨다.
결국 이리냐가 먼저 떨어졌다. 현수는 그 즉시 페이스 조절을 했다. 바라던 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리냐를 침실에 눕혀놓고 온 현수는 지르코프와 새벽 1시가 되도록 마셨다.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다,
보드카로 단련된 지르코프도 결국엔 취했다. 하여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 그랜드 호텔로 떠났다.
내일 있을 일 때문이다. 현수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물론 이리냐와 관계 없는 침실이다.
작성한 서류들을 다시 한 번 살피고는 내일을 위해 잠깐 눈을 붙이려 했다. 그런데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아공간 속에서 30일이나 촉각을 곤두세운 채 서류 작업을 했던 것이 몹시 피곤했던 때문이다. 게다가 주량 이상을 마셨다. 하여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 것이다.
쪼옥―!
“으응……?”
괴이한 감촉에 눈을 뜬 현수는 눈앞에서 깜박이는 속눈썹을 보곤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잘 잤어요? 내 사랑!”
먼저 일어난 이리냐가 모닝 키스를 해준 것이다. 그리고 제법 능숙한 한국어였다.
“이, 이리냐!”
“미안해요. 어젠 좀 취했어요. 그래도 나빴어요. 술 냄새 난다고 딴 방에 재우고……. 하긴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우리 첫날밤을 취한 상태로 맞이하는 건 좀 그러니까요.”
또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다. 하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아침부터 속상하게 하여 좋을 일 뭐가 있겠는가!
이리냐가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고 현수가 그곳을 방문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끊어질 인연이다.
그러니 마음 아프게는 하지 말자 생각한 것이다.
“내 사랑, 어서 샤워해요. 전 아침 준비할게요. 오늘 배 들어온다면서요.”
“아! 맞아.”
9시면 천지건설에서 보낸 화물선이 들어온다. 그것에 대한 통관작업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현수는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이리냐의 눈이 동그래진다.
잘 발달된 대흉근, 빨래판 같은 복근, 그리고 활배근과 승모근 등 조각상 같은 상체를 본 때문이다.
늘 재킷을 걸치고 있어 다소 말랐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건 가히 예술적인 상체이다.
게다가 팬티 아래의 다리 근육도 장난이 아니다. 아르센 대륙을 다니면서 많이 걷고, 뛰고를 한 결과이다.
이리냐는 몽롱한 시선으로 샤워실로 사라지는 현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어쩌면 세상에……! 아! 저 남자는 내 남자야.”
이리냐는 새삼 기분이 좋아졌다는 듯 얼른 주방으로 들어갔다. 고용된 하녀들이 있기에 요리는 그들이 하겠지만 안주인으로서 간섭하려 간 것이다.
“미스트르 킴! 이것도 먹어요.”
살짝 익힌 토스트 조각 위에 베이컨과 토마토를 얹어서 건넨다.
“응! 고마워.”
생각보다 맛이 있었기에 현수는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이리냐는 먹을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건네기만 한다.
“근데 이리냐는 안 먹어?”
“속이 쓰려요. 그래서 우유만 한 잔 마셨어요.”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지.”
“조금 있다가요. 지금은 일하러 나갈 당신이 먹을 시간이에요. 난 안 먹어도 배불러요. 당신 먹는 모습 너무 예뻐요.”
어휘 선택에 약간 문제가 있지만 이리냐의 한국어는 정말 일취월장해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짐작이 간다.
한국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 중 3위에 랭크되어 있을 정도로 외국인들에겐 어렵다.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이 정도면 정말 잘하는 것이다.
이리냐의 시중을 들어 식사를 마친 현수는 재킷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마타디 항에 있어야 한다.
계속해서 배가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리냐는 동행하지 않는다.
할 일이 있다고 한다. 현수는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따라와 봐야 신경만 쓰이기 때문이다.
차를 몰고 가려다가 적당한 곳에서 텔레포트 마법을 쓰기로 했다. 그러기엔 늦은 시각이기 때문이다.
시동을 걸고 일단 출발했다. 문득 어제 획득한 황금을 어찌 처분할 것인지 고심하였다.
가에탄 카구지에게 부탁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다. 한국에서 꺼내 놓으면 보나마나 출처를 대라고 할 것이다.
“결국 지르코프나 알렉세이에게 부탁해야 하나?”
레드 마피아가 먼저 접촉해 와서 적지 않은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 일이 성사되도록 해줄 생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게 될 무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좀 이기적인가?”
1억 2,700만 달러나 되는 거금을 세탁 받았다. 여기에 황금의 처분까지 맡기면 뭐라 할지 궁금하다.
생각하는 동안 차는 킨샤사 외곽에 당도했다.
인적이 완전히 끊긴 그곳에서 차를 아공간에 넣었다. 그리곤 곧장 마타디로 텔레포트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47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