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
여기에 어펜시브 참이라는 마법까지 동원되었기에 이제 이들은 현수의 심복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원하든 최선을 다해 도울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뇌물 따위는 전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갔던 일을 잘 됐나?”
“네에. 그럼요.”
“그럼, 자네 계획대로 거기에 농사지을 수 있게 된 건가?”
“아마도요. 내일 대통령 앞에서 한 번 더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나면 의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해 줄 것 같아요.”
“하여간 자넨……!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우연한 기회에 어린 아이 하나를 구해주었다.
그 인연이 가에탄 카구지 장관에 미치더니 그로부터 엄청난 결과를 야기시켰다. 그것만으로도 전설이다.
수습 딱지를 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사원이, 그것도 실세에 밀려 좌천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엄청난 규모의 공사를 단독으로 따냈다.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로비한 돈은 0원이다.
다시 말해 단 한 푼도 안 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창사 이래 처음으로 두 계급 승진에 3개월 휴가, 그리고 2,000%의 보너스가 부여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그보다 더한 것들을 얻어내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춘만 지사장은 새삼스런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보았다.
“미스터 킴! 오늘도 맥주 한잔 어때?”
어느새 다가온 마투바의 손엔 맥주 캔 하나가 들려 있다.
피부색이 검은지라 얼굴이 붉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이미 많이 마신 듯하다.
“어이구, 또 마시게 나뒀어요? 저러다 알콜 중독되겠
어요.”
“이미 중독이고… 오늘은 그냥 냅둬.”
“왜요?”
“쟤 오늘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드라마를 봤어. 그래서 조금 전까지 펑펑 울고 있었거든.”
“네에?”
“슬퍼서 엉엉 우는 것보다는 취해서 해롱거리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뜻이야.”
요즘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사는 마투바를 이 지사장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 못하기 때문이다.
“한류가 여기까지 뻗어온 거예요?”
“그런 모양이야.”
현수도 이 지사장과 비슷한 시선으로 마투바를 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참, 저 집 한 채 생겼어요.”
“집……? 샀어? 어디에?”
이 지사장의 말에 현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택이 생겼다고 하면 어찌 받아들일지 몰라서이다.
하나 그 시간은 짧았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현수의 두뇌는 맹렬히 가동되었다.
“서울의 부모님을 모시려고 조금 큰 집을 샀어요.”
“그래? 그럼 이제부턴 거기 가서 자겠네?”
“아뇨, 오늘은 여기서 잘 겁니다.”
“왜? 집을 샀다며? 아! 청소를 안 해서 지저분하구나?”
이춘만 지사장은 지레짐작하고는 환한 웃음을 짓는다.
“네? 아, 네에.”
현수는 굳이 자세히 알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여 말끝을 흐렸다.
이춘만 지사장도 이제 돈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다시 말해 충분한 재력을 갖췄다. 그럼에도 처음 살던 곳에 그대로 머문다.
인근에 천지약품 가게와 창고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에 사는 주민들과 친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많아졌음에도 곰베 지역의 저택을 구입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이 지사장과 맥주 몇 캔을 비웠다. 그리곤 잠자리에 들었다.
저택에선 이리냐가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에 가서는 안 된다. 현수는 이리냐가 오늘을 D―Day로 잡았다는 것을 느꼈던 때문이다.
이리냐는 내일 지르코프와 더불어 출국해야 한다. 현수와의 만남 이후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다. 하여 학점 취득에 실패한 과목이 둘이다. 그렇기에 여름 계절 학기를 듣는 중이다.
만일 내일 돌아가지 않으면 내년 졸업은 물 건너간다. 중요한 시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리냐는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몸까지 팔 생각을 했었다. 그만큼 대학 졸업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꼭 귀국해야 한다. 그런데 언제 현수를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다. 하여 오늘 밤 현수를 유혹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목욕 재계도 하고, 향수도 뿌렸다. 하늘하늘한 슬립도 준비했다. 물론 속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이다.
밤이 늦었지만 이리냐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현수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에탄 카구지를 만나러 갔으니 빨리 오라고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밤이 지나 새벽이 되었다.
기다리다 지친 이리냐는 쪼그린 채 잠들어 있다. 그런 그녀의 볼에는 눈물자국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도 보고 싶은데 야속하게도 오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또한 자꾸 엇나가기만 하는 현수와의 인연이 속상해서이다.
달라고만 하면 무엇이든 다 주고 싶은 사람이다. 이리냐는 이를 운명적인 사랑이라 정의 내린 바 있다.
아무튼 이날 밤은 이렇게 지났다.
짹, 짹, 짹―!
“흐으음!”
잠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 20분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무더위가 시작될 것이다.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밖으로 나가 양치와 세수를 했다.
“그러니까, 못 주겠다는 거야?”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현수가 귀를 쫑긋 세웠다.
이곳은 이춘만 지사장과 마투바, 그리고 그녀의 동생들과 자신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외인의 음성이 들린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 회사에서 치르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에겐 소매약방의 지위를 줄 수 없네.”
“아, 약을 파는데 그게 꼭 있어야 한다는 법이 있어?”
“법은 없지. 하지만 정부에 그렇게 신고했으니 그렇게 해야 하네.”
“난, 인정 못해. 그러니 계약서나 쓰자.”
“아, 안 된다는데 왜 자꾸 이러나?”
사람 좋은 이춘만 지사장의 음성에 짜증이 묻어났다. 보아하니 한두 번 이런 게 아닌 듯하다.
“이 사장! 목숨이 여러 갠가 보지?”
명백한 협박투이다.
“이 사람이 지금 어디서…….”
이춘만 지사장의 말은 중간에 잘렸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냐? 그냥 좋은 말로 달랄 때 주면 되잖아. 안 그래? 같은 동양인끼리.”
‘지나놈인가? 아님, 쪽바리?’
한국인은 분명 아닌 것 같다. 한국인끼리 불어로 대화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안 되네. 그러니 이만 돌아가게.”
“흥! 내가 여기 있겠다는데 뭘? 좋은 말로 해도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지.”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린다.
퍽! 퍼퍽―!
“윽! 으윽!”
“어때? 이제 내 말을 들어줄 만해졌지?”
“안 된다. 절대 안 돼!”
“그래? 그럼 조금 더 아파보라고.”
퍽, 퍼퍽! 퍽! 퍼퍽!
“으윽! 큭! 켁! 끄윽!”
이춘만 지사장이 폭행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현수는 벽을 두들겼다.
쾅, 쾅, 쾅, 쾅―!
“거기 누구야? 당장 멈추지 못해?”
“뭐야, 이건! 넌 누구냐?”
벽을 사이에 둔 대화였다. 현수는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이 지사장이 있을 곳으로 뛰어갔다.
걸음으로 치면 약 50걸음이다. 밖으로 나가보니 이 지사장 혼자 쓰러져 있다.
“지사장님!”
“으으……!”
입술이 터져 선혈이 배어나오고 꼴이 엉망이다.
“대체 어떤 새낍니까?”
“으으……!”
이 지사장은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현수는 끝까지 캐물었다. 그 결과 어떤 녀석인지 알게 되었다.
놈의 이름은 정림(程琳)이다. 지나인으로 30대 중반이다.
이놈은 두 달 전부터 끈질기게 소매약방 계약서를 요구했다. 하여 소정의 시험을 통과하면 계약해 주겠다고 했다.
그동안 두 번이나 시험에 응시했다.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일이기에 100점 만점에 70점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시험의 결과는 13점과 17점이다.
답안지를 살펴보면 찍은 게 아니다. 아주 돌대가리가 아니면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는 뜻이다.
두 번째 시험 결과가 발표되던 날 놈이 이 지사장을 방문했다. 그리곤 소매약방 계약서 여섯 부를 작성해 달라고 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런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때마다 현수가 붙여놓은 보디가드들이 막아냈다.
그러다 오늘 폭력까지 행사한 것이다.
“흐음, 그럼 한 녀석이 아니란 겁니까?”
“그래, 지난번에 약방에 불이 나서 죽은 왕씨라고 있어. 그놈의 조카라는데 그 약방에서 일하던 다섯 놈의 계약서를 추가로 달라는 거야.”
“무슨 명분으로요?”
“자신들이 먹고살 길이 없으니 같은 동양인으로 도와야 한다는 거지.”
“말도 안 되는…….”
너무 어이가 없어 현수는 말끝을 잇지 못했다. 이때 이 지사장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근데 놈들 배후에 삼합회가 있는 거 같아.”
“네에? 삼합회요?”
뜬금없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반문한 것이다.
“왜 있잖아. 지나의 폭력조직……. 흑사회라고도 하지,
아마.”
“그럼 아까 그놈이 삼합회의 조직원이라고요?”
“제 입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느낌상 그런 거 같아.”
이 지사장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이다.
“그걸 지사장님이 어떻게 알아요?”
“요즘 킨샤사에 부쩍 지나인들이 많이 돌아다녀.”
“그래요? 근데 왜요?”
“글쎄,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지. 아무튼 지나놈들이 많아졌는데 사업가나 회사원 같지가 않아.”
이 지사장은 심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있어요?”
“있지, 우리 회사 사람들이 계속해서 파견되어 오는데 자칫 놈들에게 위해를 당할 수도 있잖아.”
“으음!”
삼합회의 조직원이라 하더라도 콩고민주공화국 국민들을 협박하는 등의 일은 할 수 없다.
그랬다간 그야말로 철퇴에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까지 갈 일도 아니다. 주민들 스스로 나서서 보복할 것이다.
결과는 몰살 내지는 생매장 등이 될 것이다.
제대로 된 무덤조차 갖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다. 악어의 먹이로 전락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이다.
하긴 레드 마피아도 어쩌지 못하는 곳이 이곳 콩고민주공화국이다. 삼합회가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핵무기와 핵잠수함까지 동원할 수 있는 레드 마피아에 어찌 비하겠는가!
따라서 삼합회가 콩고민주공화국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다르다. 같은 피부색을 지녔기에 다툼이 벌어지면 내부의 일로 치부되기 쉽다.
만일 천지건설 직원을 납치한 뒤 목숨 값을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문제가 된다.
콩고민주공화국 경찰의 눈엔 지나인과 한국인이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범인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럼, 마약과 금괴를 보낸 왕영백이라는 놈과 혹시……?’
현수는 짚이는 바가 있었다.
“지사장님, 혹시 놈들이 언제부터 많아졌는지 기억하
세요?”
“그럼! 내가 텔레비전을 수입했던 때 있지?”
“컨테이너를 잃어버렸다고 했던 그때요?”
현수는 부러 모르는 척했다. 본인에게는 깊은 관심을 가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러고 얼마 후부터 갑자기 많아졌던 것 같아.”
“그래요?”
“확실해! 왜냐하면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놈들이 여길 왔었거든.”
“왜요?”
“되찾은 화물이 확실히 내 것이냐고 확인하러 온 거지. 스무 개나 없어졌는데 자기네들 것 두 개만 빼고 나머진 모두 찾았으니까. 그래서 그런 모양이야.”
“그래서요?”
“컨테이너를 보여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어. 그랬더니 뭐라 투덜대며 가더군. 그래서 확실히 기억하는 거야.”
“그렇군요.”
현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속내는 이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