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저는 알리사라고 해요.”
“알리사! 안에 가서 내가 왔다고 해줄래요?”
“네, 주인님!”
알리사가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현수가 소파에 주저앉자 피터스 가가바가 창문 쪽으로 가서 선다. 외부로부터 저격이 있을 경우 제 몸으로 막기 위함이다.
“가가바! 여기 와서 앉아봐요.”
“아닙니다, 보스!”
감히 그럴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그렇습니까? 그럼, 잠시 앉겠습니다.”
가가바가 맞은편에 앉았다. 각진 턱과 굳게 다물린 입술 등을 보면 군인이라는 직업에 딱 맞는 얼굴이다.
“경호 2팀과 3팀에도 내 말을 전해줘요.”
“네, 보스!”
“이동 시에는 밀착 경호를 해도 좋습니다. 다만 지금처럼 저택에 있는 경우에는 외부 경계만 실시하도록 하세요.”
“보스, 그러면 혹시 있을지 모를…….”
가가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현수가 말을 끊은 탓이다.
“이건 명령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보스!”
현수의 단호한 의지를 읽었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고맙네요. 그리고 이 저택에 처음 와봤을 테니 경호원들에게도 방을 배정하세요.”
“아, 아닙니다. 저희는 외곽에 숙소를 미련하여…….”
이번에도 가가바의 말은 끊겼다.
“나를 위해 애써주는 사람들에게 잠자리조차 제공하지 못하게 하고 싶은 건가요?”
“아, 아닙니다. 보스!”
“남는 방 많으니 적합한 방들을 찾아보세요.”
“네! 보스!”
“지금 즉시!”
“네, 보스!”
가가바는 현수로부터 뿜어지는 카리스마에 압도된 듯 찍소리 앉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경례를 붙이곤 밖으로 나갔다. 이때 이리냐가 치마를 펄럭거리며 뛰어온다.
“자기야!”
“흐음……!”
현수는 이리냐를 어찌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순정을 바치는 상황이다.
무엇이든 원하든 대로 다 해주겠다는 듯 눈빛을 반짝이면서!
“끄으응……!”
나직한 침음 이외엔 대책이 없었다.
“자기야, 왜 이제 왔어요? 자기야랑 점심 먹으려고 기다렸는데. 근데 저 사람은 누구예요?”
가가바는 현수의 명에 따라 밖으로 나가려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가히 천사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뛰어온다.
보아하니 보스의 여자인 듯하다.
앞으로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여인이다. 그렇기에 확실히 기억하기 위해 자세히 살폈다.
날개만 달리지 않았을 뿐 분명한 천사이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정자세를 갖추고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이때 이리냐가 현수에게 물은 것이다.
“으음, 앞으로 우리 경호를 맡아줄 경호원이야.”
“그래요? 근데 갑자기 웬 경호원이에요? 누가 위협해요? 그럼 지르코프 보스에게 말해서…….”
“여긴 콩고민주공화국이야. 그리고 저 사람들은 대통령 경호실 소속이고. 레드 마피아보다는 더 낫지.”
“어머! 대통령 경호실이요?”
이리냐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대통령 경호실 소속 경호원들이 현수를 경호한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네에.”
이리냐의 장점이 또 한 번 보인다.
몹시 궁금하지만 말해주기 전까지는 캐묻지 않는다. 남자를 귀찮게 하는 여자가 아닌 것이다.
“참, 미스터 지르코프에게 전화해야 하는구나.”
“이쪽으로 오라고 할 거예요?”
“그래! 뭔 일인지 모르지만 봐야지. 그나저나 오늘 출국한다고 하지 않았어?”
“네, 조금 이따 가야 해요.”
갑자기 이리냐의 표정이 확 바뀐다.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 일단 대학은 졸업해야지. 이리냐는 아직 학생이잖아.”
“나, 여기 또 와도 되죠?”
“그럼, 언제든 올 수 있으면 와.”
“약속한 거예요.”
“그래!”
현수는 별뜻 없이 대답했다. 이리냐가 여길 오려면 상당히 많은 비용이 든다. 노보로시스크에서 모스크바로,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파리로 가야 이쪽으로 오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
항공료가 만만치 않다. 그런데 이리냐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 아니다. 그래서 몸을 팔 생각까지 했었다.
이후엔 현수의 여자로 대접을 받아 사는 장소부터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하지 않아 현수는 모르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쪽으로 오는 게 쉽지 않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편한 대로 하라는 말을 한 것이다.
“정말이에요.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 아무 때나 올 수 있으면 와.”
“네에.”
이리냐가 좋아 죽겠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으며 끌어안는다. 어쩌겠는가! 뭉클한 느낌이 나지만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잠시 후, 지르코프와 통화를 마쳤다.
“금방 오신대요?”
“그래, 10분이면 온다는 군.”
잠시 후, 지르코프 일행이 헐레벌떡 들어선다. 이때 경호원들이 이들을 제지했다.
“아! 그들은 내 손님이오.”
“네, 보스! 죄송합니다. 손님!”
갑작스런 경호원의 등장에 지르코프가 이게 어찌된 영문이냐는 표정을 짓는다.
“졸지에 국책사업 비슷한 걸 하게 되어 대통령이 경호원을 붙여줬네요.”
“아! 그렇습니까?”
지르코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있기 때문이다.
“근데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는 겁니까?”
“미스터 킴! 화물이 몽땅 사라졌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화물이요?”
현수는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우리가 통관시켜 준 화물 말입니다. 목적지에 당도해서 열어보니 먼지 한 톨 없었답니다.”
“그럴 리가요?”
현수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우리 조직원이 가서 확인까지 한 겁니다.”
“혹시 미리 빼돌리고……?”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현수의 말을 자른 지르코프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때문이다.
“제가 알기론 통관 작업이 마쳐지자마자 마림바라는 사람이 일일이 컨테이너 무게까지 확인했습니다. 맞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미스터 지르코프의 책임은 아니군요.”
말이야 맞다! 그래서 마림바는 레드 마피아에 잔금을 지불했다. 따라서 지르코프는 소정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그렇기는 한데…….”
지르코프는 말끝을 흐렸다. 현수에겐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이 이어졌다.
“화물이 없어진 것은 저쪽에서 인수한 이후입니다. 따라서 편한 마음으로 출국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으음! 하긴, 미스터 킴의 말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뭔가 생각을 굳힌 듯 표정을 푼 지르코프가 웃음을 짓는다.
“언제 출국하십니까?”
“이제 곧 가야지요. 호텔에선 짐을 싸던 중이었습니다.”
“우리 다시 또 만나야지요?”
“하하! 물론입니다. 꼭 다시 만났으면 합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한국에 가시거든 드미트리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그러지요.”
현수와 악수를 마친 지르코프가 이리냐에게 시선을 돌
렸다.
“미스 체홉!”
지르코프는 현수가 있는 자리이기에 이리냐의 이름이 아닌 성을 부른다. 이는 정중한 표현이다.
“네, 보스!”
“이따 차를 보낼 테니 타고 오십시오.”
“네에.”
이리냐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현수가 한마디 한다.
“출발 시각이 몇 시지요?”
“오후 8시 정각입니다.”
“몇 시간 안 남았군요. 미스터 지르코프, 이리냐는 내 차로 공항까지 갈 겁니다. 그러니 차를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연인끼리 더 있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지르코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그럼 이만!”
“잘 가십시오.”
악수를 마친 지르코프가 사라지자 이리냐가 무너지듯 현수의 품으로 안겨온다.
“아아, 미스트르 킴!”
“이, 이리냐……!”
“밤은 아니지만 아직 시간 남았어요. 이제 나를 가져요.”
이리냐가 속삭이면서 힘주어 현수를 안았다.
“이리냐……!”
현수는 이래선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이리냐를 힘껏 안아주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지고지순한 순정이라는 느낌이었던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현수는 애수(哀愁)라는 흑백영화를 보았다. 원제는 ‘Waterloo Bridge’이다.
왠지 이 영화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로버트 테일러를 사랑한 비비안 리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느낌만은 너무도 지고지순했다.
현수는 이리냐의 순정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라도 곁에 있고 싶다는 이 아름다운 여인을 어떤 사내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현수는 부드럽게 이리냐를 떼어놨다. 이리냐는 왜 이러느냐는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한다. 그러면서 호소했다.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흔적을 만들어달라고……!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당신만을 그리워하게 해줄 강렬한 추억을 만들어달라고……!
현수는 직감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어디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 이리냐의 관심을 돌려야 했다.
“참, 이리냐에게 줄 선물이 있는데 깜박했네.”
“네……?”
이리냐의 눈빛이 단박에 바뀐다.
선물에 눈이 어두워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님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것에 감동 받았기 때문이다.
“잠깐만!”
현수는 얼른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리곤 황급히 결계를 쳤다. 그 안에서 현수가 한 일은 캡슐 속에 쉐리엔 분말을 넣은 것이다. 다음엔 적당한 병을 찾아 그것들을 넣고 예쁘게 포장까지 했다.
“어머! 이건 뭐예요?”
현수가 건넨 상자를 받은 이리냐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서둘러 포장을 뜯었다.
다음 순간 ‘이건 뭐람?’하는 표정을 짓는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약사에서 만든 것은 아니다.
라벨도 붙어 있지 않고, 상표도 없으며, 설명서도 없다.
“이리냐, 그건 이리냐의 예쁜 몸매를 유지시켜 줄 다이어트 식품이야. 식사 후 하나씩만 먹으면 웬만해선 살이 안 찔 거야. 그러니 이제부턴 체중 조절하느라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먹어도 돼. 알았지?”
“미스트르 킴……! 정말이에요? 정말 이것만 있으면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쪄요?”
현재의 이리냐는 특급 모델 뺨칠 정도로 예쁜 몸매이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들이는 공은 보통이 아니다.
식사할 때마다 칼로리를 따지고, 물도 계산해 가면서 마신다.
한 끼를 조금 많이 먹었다 싶으면 다음 끼니는 양배추 껍질 몇 장에 방울토마토 두어 개로 끝내야 한다. 그리고 오후 6시가 넘으면 물 이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다.
그래서 늘 배가 고프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침이 나오지만 그때마다 애써 참아야 했다.
말은 안 했지만 상당한 고통이다. 그런데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다이어트 보조제라니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그렇다고 돼지처럼 먹지는 마! 알았지?”
“정말이죠? 정말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도 되요?”
“그래! 그래도 돼. 하지만 너무 과식하지는 마.”
현수는 자신과 식사할 때마다 제법 많은 양을 먹었던 카이로시아를 떠올렸다. 그럼에도 이리냐처럼 날씬하다.
카이로시아도 아르센 대륙의 여인이기에 쉐리엔의 즙을 먹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말인 거죠? 근데 포장이 왜 이래요?”
“한국에 있는 대한약품에서 곧 출시할 제품이라 그래. 아직 정식으로 발매한 게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