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264화 (264/1,307)

# 264

오크도 오크지만 트롤들의 공격에 많은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화살과 칼, 그리고 성벽만으론 막아낼 수 없는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분명 율리안 영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영지민들을 생각한 이유는 그들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몬스터의 먹이가 되는 꼴을 어찌 두고 보겠는가!

“라임하르트 남작님!”

“아! 하인스님! 이 새벽에 웬일이십니까?”

“조금 일찍 깼습니다.”

“그렇습니까? 어제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하인스님이 안 계셨다면 율리안 영지가 쑥밭이 될 뻔했습니다.”

라임하르트는 오만한 귀족들과 달리 고마운 것을 고맙다고 표현할 줄 아는 성품인 듯하다.

정중히 고개 숙였던 라임하르트가 눈빛을 반짝인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와 대련해 주지 않겠습니까?”

늘 강해지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던 라임하르트는 십 년째 정체된 실력을 점검받고 싶었다.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현수는 병기대에서 목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라임하르트 역시 진검을 넣고 목검으로 바꿨다.

“제가 먼저 공격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야아압!”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임하르트는 오른쪽 발을 반 보 정도 내디디며 사선으로 베어왔다.

마주 보고 있는 상대가 오른손잡이라면 뒤로 물러서거나 검을 들어 수세를 취해야 하는 공격이다.

상체의 힘이 실려 있기에 예리한 소성을 내며 현수의 왼쪽 팔꿈치를 베어낼 듯 쇄도하였다.

현수는 물러나는 대신 몸을 돌려 다가오는 검을 쳐냈다.

채앵―!

반탄력에 의해 라임하르트의 검이 주춤하는 사이 현수의 검은 예리한 각도로 꺾였다.

그리곤 곧장 목을 베어낼 듯 쏘아져 갔다.

너무도 급작스런 반격이었기에 화들짝 놀란 라임하르트는 얼른 몸을 빼냈다. 감히 반격할 상상도 못한 듯하다.

이를 노렸다는 듯 현수의 검이 다시 꺾이며 가로 베기로 반전되었다. 가만히 있으면 흉부 아래쪽이 베어질 상황이다.

라임하르트는 검을 들어 이를 막으려 했다. 그런데 자세가 문제이다. 현수의 검은 가장 강한 힘이 실리는 각도에서 다가오는데 자신은 검에 힘을 싣기 어려운 자세이다.

이 상태라면 검을 막을 수는 있으나 자신의 검면에 자신이 부딪칠 우려가 있다.

또한 상대의 힘이 강할 경우 검이 부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라임하르트는 본능적으로 검을 막으면서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대련이 끝날 때까지 라임하르트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못한 채 쩔쩔매며 물러만 났다. 목검이지만 진검 못지않은 파공음이 일었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피한 것이다.

결국 현수의 검이 라임하르트의 목젖 바로 앞에서 멈추고야 대련은 끝났다.

“……! 패배를 인정합니다.”

다가오던 현수의 검을 막으려던 라임하르트는 간발의 차이로 늦어버린 검을 내렸다.

“제가 감히 남작님께 충고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현수의 말에 라임하르트의 눈이 커진다. 무슨 뜻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오늘부터 하루에 한 시간씩은 연병장을 달리십시오. 남작님의 검을 받쳐 줄 든든한 하체가 필요합니다.”

“……! 알겠습니다.”

하체가 부실하다는 말을 에둘러 말했는데 금방 알아들은 모양이다.

“허벅지 둘레가 지금보다 3인치 정도는 더 늘어나야 합니다. 장딴지도 굵어져야 하구요.”

“예, 알겠습니다.”

라임하르트는 현수가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검사라 인정했다. 그렇기에 한마디 한마디가 금과옥조라도 되는 듯 뇌리에 새겼다. 그러면서도 하체부실만 언급하기에 자신의 검술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라 생각했다.

라임하르트가 이제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상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 현수가 이를 깼다.

“검술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마나를 검에 싣는 것이 균일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검을 휘두르면 이렇게 됩니다.”

현수는 부러 마나를 불균형하게 불어넣고 검을 휘둘렀다.

두어 번 반복해서 보여주니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았다는 듯 심각한 표정이다.

“이는 하체 부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천적으로 검술의 흐름이 부드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까 남작님은 이렇게 검을 휘둘렀습니다.”

현수가 천천히 검을 운용하자 라임하르트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격을 하면서 언제 그런 걸 보았느냐는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남작이 습관처럼 휘두르는 검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남작님의 검법이 맞습니까?”

“네.”

“이 검법은 요체가 빠져 있습니다.”

“요체라니요?”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다른 검법의 일부분입니다. 중간 중간이 빠져 있어 부드러운 연결이 어려운 겁니다. 혹시 가전 검법입니까?”

“아, 아닙니다.”

라임하르트 남작은 어린 시절 율리안 영지에 머물던 노검객으로부터 이 검법을 전수받았다.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에서는 중급 검법을, 영지 기사단에선 하급 검법으로 수련한다. 하지만 외인들에겐 전수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난한 집의 자식인 라임하르트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검법을 배울 수 없다.

그렇기에 노검객이 가르쳐 준 것만을 반복해서 수련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부가 빠져나가고, 일부는 변형되었다.

너무 어린 시절에 배웠던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수의 말대로 중요한 부분이 빠진 검법이 되었다.

그럼에도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것은 노검객이 전수한 검법이 상급이었던 때문이고, 철저한 노력의 결과이다.

아무튼 라임하르트가 고개를 젓자 현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익히고 있는 검법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시전해 보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원래 남들 앞에선 검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라임하르트는 자세를 바로 하곤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문제점을 지적받기 위함이다.

천천히 검을 운용하는 동안 간간히 표정이 굳는다. 힘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내심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깨달았다. 현수의 지적대로 부드럽게 연결되지 못하는 부분에 뭔가가 빠진 것이다.

“자아, 이제 제가 하는 걸 잘 보십시오.”

현수의 검이 허공에 수를 놓는 동안 라임하르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깜짝 놀랐다.

자신의 검법은 담백 그 자체이다. 그런데 현수의 검은 수많은 변주가 담겨 있다.

라임하르트의 검법을 클래식 기타로 연주한 파헬벨(Pa

chelbel)의 캐논변주곡에 비유하면 현수의 검법은 일렉 기타로 연주한 락 버전이다.

시작은 장중했으나 점점 더 흉폭한 폭풍우가 되어 사방팔방에 휘몰아친다. 단숨에 적의 목을 베겠다는 듯 엄청난 빠르기로 사방을 쪼갠다. 그러면서도 전혀 힘이 줄지 않는다.

그리고 연결이 너무도 부드럽다. 단 한순간도 헛되이 허공을 가르지 않는다. 검이 있는 곳에 적이 있다면 적의 이마에 구멍을 뚫고, 뱃가죽을 가르며, 갈비를 베어낼 것이다.

든든한 하체가 바탕이 되어 허공을 수놓는 현수의 검을 본 라임하르트는 입을 딱 벌렸다. 자신이 익힌 검법의 본래가 이런 것이었을 것이라곤 전혀 상상치 못했던 때문이다.

현수는 라임하르트를 위해 천천히 십여 번 더 시연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라임하르트는 나직한 한숨과 탄성, 그리고 환희에 찬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렇듯 정교하고 현란한 검법을 여지껏 밋밋하게 운용해 왔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또한 이제는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터뜨린 탄성이다.

검법 시연을 마친 현수가 검을 내리자 라임하르트가 정중히 고개 숙여 사의를 표한다.

“하인스님 덕분에 새로 개안한 듯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부님이 계시기에 스승으로 모실 수는 없지만 마음속의 스승으로 삼아 늘 존경하겠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분이 좋군요. 이제 검식을 잊기 전에 수련해 보십시오.”

“네에.”

공손히 다시 한 번 고개 숙인 라임하르트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더 천천히! 검법을 머리로 익히지 말고 몸으로 익히세요. 네에, 그렇게요. 좋습니다. 아니, 아니! 거기선 조금 더 몸을 앞으로 숙여야 합니다. 네에, 좋습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이어진 수련에 현수는 수없는 잔소리를 했다. 그때마다 라임하르트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가르치는 대로 자세를 바꿨다.

다시 얻지 못할 기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때문이다.

새벽이 가실 즈음 수련을 위해 연병장으로 내려왔던 기사들은 남작과 현수를 보고는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금방 기사단 전체에 전해졌다. 또한 나후엘 자작의 귀에도 들어갔다.

호기심이 동한 자작은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연병장으로 향했다. 그리곤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엄하게 꾸짖는 하인스를 보았다. 라임하르트는 말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으음! 엘리시아만으론 부족한가? 뭘 더 주면 남아줄까?’

현수가 탐난 나후엘 자작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영지에 남겨두면 몬스터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영지 안정에 엄청난 기여가 된다.

영지가 안전하다 소문나면 라수스 협곡 인근에 집단 거주하는 드워프들을 데려올 수 있다.

이들에 의해 정교한 병장기를 생산해 낼 수만 있다면 영지는 재정적으로 부유해진다.

이는 곧장 전력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

이십여 년 전 인근 영지의 주인 다니엘 백작에 의해 조부와 부친을 한꺼번에 잃었다. 철광을 탐낸 다니엘 백작이 일방적인 영지전을 선포한 결과였다.

하지만 다니엘 백작은 율리안 영지를 집어삼킬 수 없었다.

국왕의 엄명이 있었던 때문이다.

아무튼 나후엘 자작은 원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뚱뚱하고 욕심만 많은 개 같은 인간이다.

갈아 마시고 싶지만 힘이 없어 보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만일 영지 전력이 강화되면 가장 먼저 영지전을 선포하고 싶은 인간이다.

그래서 이긴다면 백작으로의 승작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인 현수가 필요하다. 그런데 잡아둘 만한 것이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엘리시아가 몹시 사모하는 듯하다. 현수가 원하기만 하면 비록 평민과의 결혼이지만 흔쾌히 허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본인이 고사한다.

세상에 많은 호기심이 있어 죽음의 절지인 라수스 협곡으로 간다는데 막을 길이 없다. 하여 입맛만 다셨다.

“끄응……! 라임하르트 남작이라도 강해지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하나? 제기랄……!”

나후엘 자작은 침음을 삼켰다.

그러는 동안 이른 새벽부터 이어진 검법 수련이 마쳐졌다.

“수고했습니다. 검식을 잊지 말고 날마다 연마하면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인스님!”

라임하르트는 허리까지 깊숙이 숙이는 절을 했다.

현수는 연병장을 떠나 내성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기 위함이다.

“어서 오세요. 하인스님!”

“오늘은 갈비찜이란 걸 만들 생각입니다. 여기 준비할 테니 식재료 창고 정리를 부탁해요.”

“네, 총주방장님!”

루갈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졌다.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하인스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검사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 나이를 떠나 존경하는 마음이 든 때문이다.

루갈이 루시아 등을 데리고 나가자 현수는 갈비찜의 재료들을 꺼냈다. 이곳 아르센 대륙에는 없는 식재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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