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
“네, 영주님! 거의 다 만들었습니다. 이제 잠시 후에 영주님께 바칠 것이니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고맙네.”
나후엘 자작이 한시름 놓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율리안 영지엔 여러 마법사들이 있다.
3써클이 셋, 2써클은 열하나, 그리고 1써클 수련마법사들은 스물이나 있다. 현재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은 그중 가장 써클이 높은 3써클 마법사들이다.
이들 중 수장은 방금 전 나후엘 자작에게 루스펠이 좋아졌다는 말을 한 이다.
“자네들은 이만 물러가게.”
“네, 영주님!”
정중히 고개 숙인 마법사들이 물러가자 엘리시아와 현수, 그리고 나후엘 자작만 남게 되었다.
“루스펠……! 이 불쌍한 것. 어찌하여 신의 저주를 받아…….”
말은 안 했지만 나후엘 자작의 자식들 가운데 여섯은 중증이고, 나머지 다섯 가운데 넷 역시 신의 저주를 받았다.
언제부터인지 이곳 율리안 영지의 영지민들에겐 신의 저주가 내리고 있다. 모두가 공범인 양 쉬쉬거리고 있기에 세상에 소문나지 않았을 뿐이다.
신의 저주는 두통과 어지러움, 그리고 구토 증상으로 나타났다.
처음엔 신전의 신관들이 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저주가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신관들마저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은밀히 주교급 고위 신관이 다녀갔다. 하지만 어떤 신관도 저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더러운 행실의 결과로 판정되어 신관들 전부 파문되는 불상사가 일었다. 그리고 율리안 영지의 신전은 폐쇄되었다.
다음에 나선 것은 마법사들이다. 저 써클 마법사들이기에 조금 전처럼 힐 또는 큐어가 고작이다.
이것만으로도 약간의 호전 증상은 보인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원래대로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기대한 것은 영지 내에 거주하는 연금술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다시 나선 것이 마법사들이다. 이들은 대증요법을 생각해 냈다. 그 결과 쏘러리스의 간과 디오나니아의 열매를 요구했다.
문제는 영지 내의 병력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여 가장 말짱한 엘리시아가 테세린까지 가서 용병들을 고용했던 것이다.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후엘 자작과 엘리시아는 루스펠의 안색만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다. 현수는 슬그머니 발을 빼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때 누군가가 들어선다.
“영주님!”
“아, 약이 다 만들어진 건가?”
“네, 여기 있습니다. 이걸 공자님께 복용시키면 훨씬 좋아지실 겁니다.”
마법사가 건넨 것은 동그란 환약이다. 상큼한 냄새와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어 먹기 저어된다.
“어서 복용시키게.”
“네, 영주님!”
마법사들은 루스펠을 반쯤 일으켜 입을 벌린 뒤 환약을 넣고 물을 부었다. 그리곤 목젖 부위를 슬쩍슬쩍 눌렀다.
꼬르륵―!
쿠션들을 이용하여 반쯤 누운 자세가 되도록 만들고는 루스펠의 안색을 살핀다.
‘쏘러리스의 간은 해독작용이 있다 쳐도 디오나니아의 열매가 어떤 효능이 있는 거지?’
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마법사가 침묵을 깼다.
“영주님 전에 말씀드린 대로 공자님은 현재 중독된 상태입니다. 쏘러리스의 간은 강력한 해독작용을 할 것이고, 디오나니아의 열매는 순식간에 기력 회복을 시켜줄 것이옵니다.”
“그래, 여러 번 들었지. 그럼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는가?”
“저희 짧은 소견으론 이제 잠시만 기다리면 공자님이 눈을 뜨실 겁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루스펠의 눈이 떠졌다.
“끄으응―! 아, 아버지.”
“그래, 루스펠! 몸은 좀 어떠하냐?”
“아버지, 제가 추태를 보였지요? 죄송합니다.”
“아니다. 신의 저주가 내려 그런 것을 내가 어쩌겠느냐? 괜찮다. 그래, 몸은 좀 어떠냐?”
“움직일 만합니다. 하지만 두통과 메스꺼움은 여전하네요.”
“그래?”
나후엘 자작의 시선이 마법사들에게 향했다. 어찌 된 것인지 설명하라는 눈빛이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우리 영지에 내린 신의 저주는 저의 힘만으론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저흰 증상이 완화되도록…….”
머리 좋은 마법사들은 영지 내에서의 입지를 올리기 위해 쏘러리스의 간과 디오나니아의 열매를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만일을 위한 빠져나갈 구멍을 다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 알겠네, 이만 물러가게.”
“네, 영주님!”
마법사들이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한편, 나후엘 자작은 괘씸한 기분이 들었다.
완치시킬 자신도 없으면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그중엔 오랫동안 시중 들어주던 시녀와 시종들도 있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필요하다는 약재들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미봉책에 불과한 듯하다.
그러니 어찌 괘씸하지 않겠는가!
“으으음……!”
“영주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는지요?”
“말하게.”
나후엘 자작의 시선을 받은 현수는 루스펠의 안색을 다시 한 번 살폈다.
“공자님,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 주십
시오.”
“그, 그러겠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검사이자 율리안 영지의 은인인 현수의 말에 루스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한편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물을까 싶어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오랫동안 정분은 나눠온 시녀와의 일이 탄로날까 싶었던 때문이다.
“혹시 현기증과 구토 이외에 체중 감소와 식욕부진 증상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또한 복부 통증과 불편감, 그리고 변비 증상도 있습니까?”
“그것도 그렇습니다.”
“그럼, 혼수상태에 빠졌었거나 몸에서 경련이 일었던 적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현수가 시선을 돌리자 나후엘 자작이 왜 그런 걸 물었느냐는 표정을 짓는다.
본인 또한 가끔 느끼던 증세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율리안 영지에서는 일상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제넘은 말씀인지 모르지만 루스펠 공자의 증상은 일반적인 해독제로는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왜지?”
신관이나 마법사도 아니면서 어찌 단언하느냐는 표정이다.
“제가 살던 곳에서도 이런 증상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린 이걸 납중독이라고 합니다.”
“납중독……?”
“네, 납중독(Lead poisoning, Plumbism)이란…….”
현수의 설명이 한동안 이어졌다. 나후엘 자작은 물론 루스펠과 엘리시아 역시 귀를 기울여 현수의 설명을 들었다.
납은 주로 미세 분진에 흡착되기 때문에 사람의 호흡기를 통해 체내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오염된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으면서 소화기를 통해 흡수될 수도 있다.
이렇게 몸속으로 들어온 납은 대부분이 뼛속에 축적되었다가 아주 서서히 혈액으로 녹아 나오게 된다.
만일 뼈를 포함한 신체 조직에 납이 축적되는 것을 방치하게 되면, 조혈기관의 기능 장애로 빈혈이 발생된다.
뿐만 아니라 신장 및 생식 기능 장애 등의 심각한 중독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 만일, 뇌에 축적되면 사지마비, 실명, 정신장애, 기억력 손상 등의 심각한 뇌질환을 일으키고 그중 25%는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일련의 설명을 들은 나후엘 자작 등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왜 율리안 영지 사람들이 신의 저주를 받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영지 내의 광산에서는 철광석과 더불어 납이 풍부하게 산출된다. 이것 때문에 다른 영지에 비해 연금술사들이 월등히 많다. 납을 금으로 바꿀 수만 있으면 귀족들 못지않은 안락하고 풍요로운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들이 제안하여 영지에서 만들어지는 병장기에 납을 얇게 입혀왔다. 번쩍거림을 더하게 하여 상품 가치를 올리기 위함이다. 또한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지의 재정이 좋아지긴 했다. 대신 영지민 전체가 납중독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호, 혹시 해결책을 알고 있는가?”
“그래요! 하인스님은 줄리앙이 중독되었을 때 두 번이나 구해줬잖아요. 그러니 우릴 구해줄 수 있죠?”
엘리시아가 제발 그렇다는 대답을 해달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발요!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엘리시아가 재차 애원하는 표정을 짓는다.
엘리시아가 아는 하인스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용병이고, 요리 솜씨가 뛰어난 요리사이다.
또한,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불러주는 사내이다.
그리고 블링크라는 마법 이외엔 보지 못했지만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이기도 하다.
게다가 샌드웜의 이빨과 스콜론의 침에 의해 중독 당했던 줄리앙을 구해준 치료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말을 끊었던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루스펠 공자님은 광산과는 상관이 없음에도 납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영지 전체의 토지가 오염되었거나 식수가 오염된 때문입니다.”
“영지 전체의 땅이……?”
“보아하니 땅이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죠?”
엘리시아가 눈빛을 반짝인다.
“루스펠 공자님은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따라서 식수원이 오염된 것이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허어……!”
나후엘 자작은 어떤 마법사나 연금술사, 심지어 신관들조차 알아내지 못한 것을 단박에 알려주는 현수가 새롭게 보였다.
물론 좋은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기존에 사용하던 우물은 메우고, 새로운 샘을 파십시오. 가급적 광산으로부터 먼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물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네. 하지만 어디를 파야하는지를 모르는데 어찌하면 좋겠나?”
“그건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9장 엘리터의 습격
현수는 엘―로드(L―rod)를 떠올렸다.
L자로 생긴 구리 막대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수맥을 찾는다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용하는 사람의 기감 능력이 떨어지면 사기성 짙은 물건이 되는 그것이다.
현수는 7써클 마스터로 마나 감응력이 최상이다. 따라서 엘―로드만으로도 수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것으로도 안 된다면 이그드라실의 잎이 있지 않던가! 그렇기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가?”
“그나저나 영지민들 전체에게 투약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투약?”
“네, 납중독은 자손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무어라?”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나후엘 자작을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은 이어졌다.
“예를 들어, 산모가 납에 중독되어 있으면 태어나는 아기의 지능에 문제가 발생됩니다. 따라서 한시바삐 납을 체외로 배출하도록 하는 약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 이 세상에 그런 약이 있는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 나후엘 자작의 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가문에 재앙을 내리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후엘 자작은 아주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루스펠 이외의 다른 자식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중독 증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멍청해지면 작위를 잃을 수도 있고, 영지마저 빼앗길 수 있다. 그렇기에 침중한 안색이 된 것이다.
잠시 자작의 안색을 살핀 현수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제게 약간의 약물이 있습니다. 칼슘 디소듐 에데테이트와 디―페니실라민이라는 것으로 납중독에 효험이 있는 약물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네, 이걸 꾸준히 투약하면 증상이 완화될 겁니다. 또한 제 고향에서만 나고 자라는 콩이라는 작물의 씨앗도 있습니다.”
“콩……?”
“네, 이것이 함유한 철분은 납이 몸에 흡수되는 것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백질을 공급해 주는 영양원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