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
조금 전에 출발한 기사와 병사들은 이레나 상단 테세린 지부에 접근하기 힘들 것이다. 이쪽으로 오려면 내성 진입로로 쇄도하던 엘리터들을 모두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레나 상단은 현재 고립무원이 된 것이다.
겉보기엔 제법 두툼한 담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육중한 엘리터가 기어올라 체중을 실으면 금방 무너져 버릴 것이다.
그런 담장 뒤쪽엔 호위임무를 맡은 용병들이 저마다 무기를 꼬나들고 있다. 대부분이 검이나 창이다.
이것으론 단단하기로 이름난 엘리터의 가죽에 흠집조차 내기 힘들 것이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이상이 아니면 상처조차 입히기 힘든 몬스터가 바로 엘리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가오는 수레바퀴를 막아선 사마귀나 다름없다.
한편, 상단 내부에서도 난리가 벌어졌다.
내놓았던 상품들을 창고 안으로 들여놓는 작업이 진행됨과 동시에 다가오는 엘리터들을 막기 위한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상행에 쓰이는 마차들로 막아보려는 움직임이다.
“빨리, 빨리 움직여! 조금 더 빨리!”
누군가의 명에 따라 상인과 노예들이 정신없이 짐을 옮기고 있다. 마차의 무게를 늘리기 위해 곡물을 담은 자루들을 마차 안에 들여놓는 작업이 진행 중인 것이다.
일단 마차에 곡물자루를 가득 실으면 그 뒤엔 다시 나무 상자들을 쌓았다. 밀어도 밀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을 정도로 저마다 바쁘게 움직인다.
하여 현수는 마법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통행에 제한을 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다.
“아가씨, 얼른! 얼른 올라가십시오.”
안에 들어서니 누군가의 고함이 들린다.
“싫어! 어떻게 나만…….”
“아가씨만 올라가는 거 아닙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전부 지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말끝을 흐린다.
흘깃 바라보니 총서기라 하던 오십대 사내이다. 그리고 그 앞엔 카이로시아가 있다.
현수는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르려다 멈췄다. 카이로시아가 허리춤에 매어두었던 대거를 뽑아 든 때문이다.
“아냐, 나도 싸울 거야. 놈들이 여길 엉망으로 만들게 할 수는 없어.”
손에 들린 것은 헤어지기 전 현수가 마법을 인챈트해 주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아가씨, 안 됩니다. 그런 것 가지곤 어림도 없어요. 설마 엘리터가 어떤 놈인 건지 잊은 건 아니겠죠?”
“알아! 하지만 어떻게 해? 어떻게 나 혼자 지붕에 올라가?”
한국으로 치면 슬레트 비슷한 것들을 올려놓은 지붕은 여러 사람이 올라설 경우 그 무게 때문에 무너질 수 있다.
그렇기에 총서기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보나마나 자신이 오르고 몇몇 시비가 오르고 나면 사다리는 치워질 것이다. 엘리터가 그걸 타고 기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위험하다 판단한 다른 사람들이 지붕으로 올라갈까 싶어 치우는 것이다. 안 그러면 지붕이 무너지고, 그것은 곧 카이로시아의 안위와도 상관이 있다.
그렇기에 좋은 말로 달래 올라가게 하려는데 안 가고 뻗대니 총서기는 슬슬 부화가 치민다.
위급한 순간이기에 얼른 여러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지부장이라는 사람이 제 고집만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하극상을 하겠는가!
총서기는 깊은 한숨을 쉬곤 다시 재촉했다.
“카이로시아 아가씨! 어서 지붕으로 올라가십시오. 지금은 그게 도와주는 겁니다. 어서요!”
총서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카이로시아는 눈치를 살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총서기는 아버지가 임명한 남작이다. 계승되지 않는 단승귀족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귀족이다.
그렇기에 항상 예의 바르고,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소리를 지르니 눈치를 본 것이다.
“아가씨가 지붕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아가씨 하나를 지키기 위해 여기 있어야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엘리터가 난입하여 사람들을 잡아먹으면 책임질 겁니까?”
“……! 아, 알았어요. 올라갈게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카이로시아는 지붕으로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잡았다. 그러자 시비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그렇게 사다리를 반쯤 오르는 모습을 본 현수는 몸을 돌렸다. 카이로시아가 안전하다면 이젠 엘리터를 물리쳐야 할 시간이 도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면 된다고 했지?’
아공간에 담겨 있던 검을 꺼내 든 현수는 눈빛을 빛내며 엘리터들이 다가오는 곳으로 향했다.
“모두들 긴장을 늦추지 마라. 그리고 놈들을 자극하지 마라. 한 마리라도 들어오면 감당하기 어렵다. 알았나?”
“네에!”
누군가의 지휘에 일제히 대답한다. 그중엔 현수의 눈에 익은 사내도 있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문전박대를 했던 수문위병 발루네이다. 그리고 카이로시아의 마차를 운전했던 토렐이라는 사내도 보인다.
둘 다 창 한 자루씩을 들고 있는데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다. 하긴 엘리터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웬만한 병장기로는 흠집조차 내기 힘든 놈들이다. 따라서 둘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도주하지 않은 것은 여기가 아니면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수는 여전히 C급 용병 차림이다. 그리고 상단 호위 병력 가운데 상당수가 용병들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현수가 끼어드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은 인간이 적이 아니라 몬스터가 적이기 때문이다.
스르르릉―!
나지막하게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린다.
현수는 예리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엘리터들을 눈여겨보았다. 혹시 약점이 있나 싶어 살핀 것이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놈들은 그야말로 무질서했다. 동료의식이 없다는 뜻이다.
“흐음, 각개격파가 정답이군.”
현수는 놈들이 더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놈들의 한복판에 들어서면 꼼짝없이 마법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크르르르! 크와아아! 츄르르르! 크라라라!
제각기 특색 있는 소리를 듣자니 엘리터들은 시야를 가로막는 담장을 만나자 서로 간에 정보를 주고받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야 가장 취약한 입구 쪽으로 놈들이 몰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더 좋고!”
현수는 겁에 질려 뒷걸음치는 용병들 덕에 선두로 나서게 되었다.
“이, 이보게. 우리 힘으론 안 될 것 같아. 이, 이만 피하세.”
“그, 그래! 도망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졸지에 맨 앞에 서게 된 현수는 멀찌감치 물러나는 용병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을 조롱하려는 웃음이 아니다.
본의 아니게 남들의 눈에 뜨이게 된 때문이다.
평상시에 마차가 드나들던 상가 입구에는 몇몇 나무 상자가 쌓여 있다. 급하게 가져다 놓은 것인지라 엘리터들을 막아낼 것 같지 않다.
“읏차!”
몸을 날려 상자를 넘으니 엘리터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고 있다.
크르르르! 크와아아! 츄르르르! 크라라라!
“이야압!”
쒜에에엑―! 퍼어억―!
크아아악!
콰르르! 크라라라! 퀘에에에!
현수의 검에서 뿜어진 검기가 훑고 지나자 선두에 있던 엘리터의 몸이 갈라지면서 피가 솟구쳤다. 그러자 인근에 있던 놈들이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동족이든 뭐든 배가 고프면 잡아먹는 모양이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서로 살점을 뜯어먹겠다고 아귀처럼 달려든 때문이다.
‘코모도 드래곤들이 먹을 게 없으면 같은 무리도 잡아먹는다더니 이놈들도 그렇군. 그러고 보니 상어도 그러하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현수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야압!”
쒜에에엑! 퍼억! 쒜에에엑! 퍼어억―!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놈들 가운데 몇몇을 더 베어놓으니 아주 난리가 난다.
현수는 근방에서 달려드는 놈들에게도 같은 일을 했다.
그 결과 입구 근처엔 무려 다섯 군데나 되는 곳이 엉망으로 변해 버렸다.
현수가 베어낸 놈들의 수효는 여덟이다. 그런데 놈들의 사체가 사라지는 데 불과 5분도 걸리지 않는 듯하다.
먹을 게 떨어지자 또 다시 다가온다. 어찌 가만히 있겠
는가!
현수는 가장 가까운 놈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이야압!”
쒜에엑! 퍼억! 쒜에엑! 퍼어억! 쒜에에에엑! 퍼억!
크르르르! 크와아아! 츄르르르! 크라라라!
또 한바탕의 난리가 벌어지는 것을 보던 현수가 먼 곳을 살폈다. 피냄새가 번졌는지 상단 입구로 오는 놈들의 수효가 늘고 있다.
‘제기랄!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몰려오는 거야?’
속으로 투덜거린 현수는 형형한 안광으로 놈들을 노려보았다. 어떤 놈들 베어내야 가장 효과가 좋을지를 가늠한 것이다.
잠시 후, 현수의 신형은 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야아압!”
검이 휘둘러지고 나면 초록색 피가 솟아난다. 그리고 나면 그곳을 아귀다툼의 현장으로 변모했다. 이런 방법으로 현수는 차근차근 엘리터의 숫자를 줄여 나갔다.
한편, 뒤로 물러났던 용병 및 상단 사람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엘리터들이 쏟아져 들어오지 않자 살금살금 다가갔다.
대체 웬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하여 막 상자 너머의 현수를 볼 수 있는 위치에 당도했을 때이다.
우드드, 우드드득, 콰지직, 콰지지직―!
콰아앙―! 콰아아앙―!
기어코 담장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 담이 무너졌다. 모두 도주하라. 도주하라!”
“아아악! 엘리터다. 사람 살려! 으아아아!”
이레나 상단의 담이 무너지자 엘리터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수는 졸지에 놈들에게 포위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헤이스트! 야아압!”
몸이 빨리 움직이도록 스스로에게 버프를 건 현수는 사방팔방으로 쏘다니며 엘리터에게 검기의 맛을 보여주었다.
“이야압!”
쒜에엑! 퍼억! 쒜에엑! 퍼어억! 쒜에에에엑! 퍼억!
크르르르! 크와아아! 츄르르르! 크라라라!
여기저기에서 동족을 물어뜯는 동족상잔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본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모두들 도망가거나 은신하기에 바빴던 때문이다.
같은 순간, 지붕 위에 올라 있던 카이로시아와 시녀들은 이 광경을 목도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며 시퍼런 검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사내가 있다. 그가 스치고 지난 자리엔 엘리터들이 난리법석을 떤다.
시녀들은 위험에 처한 자신들을 구원해 주는 멋진 사내의 모습에 매료되어 풀린 눈빛으로 현수의 움직임만을 뒤쫓았다.
벌써 상단 내부까지 엘리터들이 파고들어 적지 않은 인명피해가 발생되고 있지만 그런 건 안중에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여전히 눈빛을 반짝이는 여인이 있다. 물론 카이로시아이다.
처음엔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눈에 익은 체형이다. 그렇기에 먼 거리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아아, 하인스 백작님!”
“지부장님, 누구시라고요?”
곁에 있던 시녀의 물음이었다.
“저분은 나의 낭군이신 하인스 멀린 백작님이셔.”
“네에? 그분은 멀리 여행을 떠나셨잖아요. 그런데 어찌……?”
“내게 위기가 닥친 걸 알고 도와주러 오신거야.”
“네에……? 정말이요?”
카이로시아와 지근거리에서 생활하는 시녀는 여전히 동분서주하는 현수의 모습을 눈여겨 살폈다.
분명 하급 용병 차림이다. 하지만 검에서 뿜어지는 시퍼런 오라를 보면 하급은 아니다. 기사들조차 당하지 못할 실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