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1장 어휴, 불결해!
“어서 오게.”
“네, 사장님! 그간 안녕하셨죠?”
“그럼! 자네도 수고 많았네.”
“감사합니다.”
현수의 인사를 받은 신형섭 사장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설계가 마쳐지지 않아 아직 금액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공사 두 개가 현수에 의해 수주될 예정이다.
그중 하나는 본인이 발주하는 공사로서 3만 호에 이르는 주택과 우사, 돈사, 계사 등 축사와 임가공을 위한 공장들, 그리고 병원, 도서관, 극장, 쇼핑몰 등을 짓는 것이다.
인구 12만짜리 도시 하나를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이외에도 총연장 2,000㎞짜리 4차선 고속도로 건설 사업도 있다. 이것에 대한 공사비 대부분은 구리와 콜탄, 그리고 원유 등으로 받는다.
이 둘만으로도 천지건설은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신형섭 사장은 요즘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도 발언권이 세다.
잉가댐 공사만으로도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큰 공사를 수주할 예정이다.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던 어느 누구보다도 돋보이는 실적이다. 이런 상황이니 어찌 현수가 반갑지 않겠는가!
“그래, 어디 불편하거나 한 데는 없고?”
“에구, 사장님! 제가 뭐 노인네도 아니고……. 네! 저 아주 건강합니다.”
“이춘만 차장에게서 들었네. 공수특전요원이 되어 만점 활약을 벌였다고? 그러다 어떻게 되면 어쩌려고……. 자넨 우리 천지건설의 보배네. 앞으론 그러지 말게.”
무슨 뜻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앞으론 절대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사장님, 과장님! 차는 뭘로 드릴까요?”
“우리 김 과장이 왔으니 조 대리 특선 어떨까? 난 그거 좋던데. 김 과장은 어때? 조 대리에게 맡겨볼 건가?”
“하하, 네에. 조 대리님, 뭐든 주십시오.”
“호호, 네에.”
조인경 대리가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고 나가자 신 사장이 빙그레 웃음 짓는다.
“조 대리가 자네 언제 비서실로 불러들일 거냐고 성화했었네. 어지간히 자네와 같이 있고 싶은 모양이야.”
“네? 아, 네에.”
현수는 부담스러웠지만 억지로 웃음 지었다.
“그나저나 뭔 일로 날 보자고 했나?”
“네, 어제 콩고민주공화국의 대통령님과 내무장관님을 뵈었습니다.”
“허어, 이젠 아예 독대까지 하는가?”
신 사장은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와 만나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천지건설이 국내 유수의 건설회사이지만 신 사장은 아직 대통령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한국보다 권력의 힘이 더 강력한 콩고민주공화국은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현수는 대통령과 내무장관이라는 실세 중의 실세를 직접 대면한다니 놀란 것이다.
“네, 어쩌다 보니…….”
“하여간 대단해! 그래, 만났는데 뭐라 하는가? 고속도로 건설 공사 때문에 보자고 한 건가?”
“그 일도 관련이 있지만 다른 일도 있어섭니다.”
“다른 일? 또 다른 공사를 이야기하던가?”
신 사장은 흥미있다는 듯 눈빛을 반짝인다.
“며칠 전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서는…….”
현수는 잉가댐 건설 현장과 킨샤사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신 사장의 눈이 점점 더 커진다.
잉가댐 현장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누군가의 침입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보고되었다. 혹시라도 걱정할까 싶어 축소 보고된 것이다.
“이런……!”
신 사장은 최종보고자였던 해외영업부 최 부장의 거취를 심각하게 고심했다.
통솔력도 있고, 실력도 있는 능력 있는 직원이긴 하다.
하지만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볼 혜안은 부족하다 여기기에 지금껏 승진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직원들 전체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을 축소 보고하였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여기에 비너스 호텔 습격 사건까지 더해지자 신 사장의 얼굴은 몹시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건으로 말미암아 콩고민주공화국은 지나와의 선 긋기를 의도했다. 그러려면 지나가 하려던 일들을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한국은 지나보다는 공사비가 비싸지만 품질은 어떤 선진국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는 국가이다.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현수로 하여금 매개 역할을 하게 되면 양심적인 일처리를 기대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현대화되기 시작하는 콩고민주공화국의 거의 모든 공사를 현수를 통해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신 사장은 몹시 흥분한 표정이다. 천지건설이 모든 일을 주관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한 신 사장은 즉시 임원회의를 소집했다. 단 한 명의 열외도 없는 소집이다. 따라서 국내 건설 부문을 담당한 박준태 전무 역시 참석해야 하는 회의이다.
신 사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조인경 대리는 사장실을 나서는 현수를 보며 생긋 미소 짓는다.
“잊지 마세요. 저하고 데이트하기로 한 거요.”
“에구! 그거 농담 아니었어요?”
“치이, 그냥 밥이나 한번 먹자는 거예요.”
“네에, 알았습니다.”
모처럼 본사를 들렀기에 해외영업부도 찾아갔다. 어찌 되었든 현재 소속된 곳이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어서 오시게, 김 과장!”
최 부장의 만면에 웃음꽃이 핀다.
이 지사장의 전화를 받는 즉시 출국할 것처럼 그러더니 아직 출발도 안 하고 있어 의아했다.
어찌 되었든 해외영업부에서 사고를 친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잠시 앉아 의례적인 대화를 했다. 최 부장과는 딱히 대화 주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외영업부에 머문 시간은 짧았다. 그후 곧장 자재과로 갔다.
“사수!”
“누구……? 어! 김현수 씨, 아니, 김 과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콩고민주공화국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재과 사수였던 곽 대리는 반가움과 의아함을 한꺼번에 표정 짓고 있었다.
“에구, 그러지 말라니까요.”
“아, 참……!”
한번 사수는 영원한 사수라면서 말을 놓으라 하였던 것을 떠올린 곽 대리가 계면쩍은 미소를 짓는다.
“이제 기억나세요?”
“그래, 그래! 근데 그간 잘 있었어?”
“그럼요. 전 그런데 곽 대리님은요? 에구, 살 찐 걸 보니 요즘 되게 편한 모양이에요.”
“살이 쪄? 이게……? 이건 부은 거야, 현수 씨 때문에.”
“네……? 왜 저 때문이에요?”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보낼 자재가 좀 많아? 그거 수배하랴, 검사하랴, 그리고 물량도 확보해야 하고……. 어휴∼! 요즘은 잠 잘 시간도 없어.”
곽 대리는 지레 엄살을 부린다. 현수는 단번에 씹어주었다.
“유민우 씨는요?”
“검사실에 있어. 조금 있으면 올 거야. 아, 저기 오네.”
“어라! 김 과장님? 정말 김 과장님이세요?”
“하하, 네에. 유민우 씨 오랜만이네요.”
“네에. 김 과장님도요. 얼굴 좋아 보이시네요.”
“하하, 그래요?”
유민우는 마음속의 롤 모델을 보자 그간 잊고 있던 의욕이 샘솟는지 언제 지쳤냐는 듯 원기 왕성한 모습을 보인다.
이때 곽 대리가 묻는다.
“김 과장, 금방 가야해?”
“아뇨, 시간 있어요.”
“그럼 점심이나 같이 해. 오늘은 내가 쏠게.”
“그러세요. 저녁은 제가 사죠.”
“저녁은 안 돼. 오늘 업체 미팅만 세 건이야.”
“네에, 요즘 업체 미팅 때문에 우리 죽습니다.”
유민우의 말에 현수가 무슨 의도냐고 눈을 크게 떴다.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보낼 자재 때문에 거의 매일 접대를 받아요. 이젠 고기도 싫고, 회도 싫어요. 술은 더 싫구요.”
“그래, 나도 그래!”
이제 보니 둘 다 살집이 두둑하다. 그간 엄청난 접대를 받은 듯하다. 하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갈 자재의 종류와 양이 얼마나 많은가!
자재를 생산하는 업체 입장에선 천지건설만 잡으면 대박이 나는 판이니 적극적인 로비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점심은 뭘 먹죠?”
“그냥 김치찌개 어떨까? 요즘은 된장찌개에 질렸어.”
고기를 먹을 때 공깃밥을 시키면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가 서비스로 나온다. 그걸 얼마나 먹었으면 이러나 싶다.
“네에, 김치찌개 좋죠! 그거 못 먹어본 지 오래되었어요.”
“사수, 저도 사주실 거죠?”
“에구, 그래라.”
잠시 후, 셋은 로비를 나섰다. 회사 인근에 김치찌개를 잘하는 집이 있어 그리로 가려던 참이다.
“김 과장님! 식사하러 가세요?”
“아! 조 대리님. 네, 밥 먹으로 갑니다.”
“저도 그런데.”
“네에, 그럼 조 대리님도요?”
“네, 근데 전 혼자예요. 합류해도 되죠?”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짓는다. 어찌 의도를 모르겠는가! 현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요.”
“호호! 고마워요. 근데 뭐 드시러 가요?”
“김치찌개 먹을 건데 괜찮겠어요?”
차가운 도시의 남자를 줄인 말을 차도남이라 한다. 까탈스럽고 도도한 여자는 까도녀라 한다.
이런 여자들은 남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절대 소탈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조인경 대리는 누가 봐도 까도녀이다. 생긴 것부터가 그렇다. 연희와 더불어 천지건설 2대 미녀로 군림한다.
연희가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천지건설은 새로운 CF를 제작했다. 물론 그 주인공은 조인경 대리이다.
그 CF를 본 많은 연예기획사가 탤런트 제의를 했다. 물론 모두 거절당했다.
온갖 스펙으로 무장된 엄친딸이기도 하지만 집안도 빵빵해서 굳이 연예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늘 레스토랑에서 칼질만 하고 살 것 같다. 그래서 김치찌개도 괜찮겠느냐는 양해를 구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을 한다.
“그럼요, 저 김치찌개 좋아해요. 가요. 회사 뒤쪽에 유화정이라는 집이 잘 해요.”
“어라! 조 대리님도 유화정 알아요?”
“그럼요, 일주일에 두어 번은 가는걸요.”
진짜로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곽 대리와 유민우는 조 대리를 다시 봤다.
까도녀가 아니라 도도하지만 소탈한 여자로 보인 것이다.
길을 가는 동안 조 대리가 팔짱을 낀다.
곽 대리와 유민우가 보기에 팔을 뺄 수가 없었다. 마음의 상처를 입힐까 싶은 것이다.
거리를 누비며 간 유화정의 김치찌개는 정말 맛이 있었다. 현수는 오랜만에 깊은 맛을 느껴 입이 즐거웠다.
식사를 마친 현수는 일행과 헤어져 중구로 갔다.
“어이, 친구!”
“어, 현수냐? 귀국했어?”
“그래, 일은 잘 되고 있지?”
“물론이야. 근데 너 지금 어디냐?”
“여기? 한영빌딩 로비.”
“뭐? 알았다. 꼼짝 말고 기다려.”
신세계마리타임의 대표이사 김상렬이 현수 앞에 나타난 것은 3분 12초 만이다.
“야, 이 자식아!”
상렬은 현수는 와락 껴안았다.
“하하, 그렇게 반갑냐?”
“당연하지, 인마! 점심 전이지?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점심은 먹었다. 차나 한잔 사라.”
“그래, 가자!”
상렬은 달착지근한 카페라떼를, 현수는 그냥 원두커피를 주문했다.
“그래, 일이 좀 바쁘지?”
“고맙다. 네 덕에 직원 둘을 더 뽑았다.”
드모비치 상사로 보내는 물량과 천지약품으로 보내는 약품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음을 우회적으로 시사한 것이다.
“그래? 앞으로 더 많이 뽑아야 할 텐데?”
“뭐어? 또, 뭐냐? 어서 말해.”
“하하, 녀석……! 알았다, 알았어.”
상렬의 반짝이는 눈빛에 현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우리 회사 사장님하고 이야기한 건데…….”
현수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상렬은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현수는 신형섭 사장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발주한 공사의 자재는 가급적 신세계마리타임이라는 해운사를 이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이유는 믿을 수 있으며,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어찌 이를 거절하겠는가!
현수의 요청은 즉각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잉가댐 및 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장비와 자재 역시 신세계마리타임이라는 회사를 이용하겠다고 했다.
창구가 일원화되어야 업무 효율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새로 수주할 고속도로 건설 공사에 필요한 모든 기자재 역시 신세계마리타임를 통하여 운송하겠다고 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상렬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영업 한 번 안 했는데 신세계마리타임이 100년 동안 영업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건이 거저 굴러들어 온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