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
현수라는 친구를 둔 덕이다.
“야, 현수야……!”
“에구, 사내자식이 왜 눈물을 글썽여? 누구 죽었어?”
“현수야……!”
상렬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억지로 눈물을 참는 남자의 모습이 있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어머, 어머! 저 사람들 좀 봐!”
“그러게, 왜 저러지?
“왜긴? 둘 다 게이인가 봐. 저 사람이 헤어지자고 해서 울려고 그러는 거 같아.”
“그래, 그렇게 보인다. 근데 기분 나쁘다. 남자가 왜 남자를 좋아하지? 우리 같은 여자들도 있는데.”
“그러게. 근데 저 사람 좀 괜찮게 생기지 않았냐?”
“누구? 차는 사람? 차이는 사람?”
“누구긴, 차는 사람이지. 차이는 사람 배 좀 봐라. 남산만 하다못해 터지려고 한다.”
“하긴! 근데 저 사람 진짜 괜찮아 보인다.”
“그치? 나, 저 사람한테 대시 한 번 해볼까?”
“대시?”
“그래, 되면 좋고, 안 되면 본전이잖아.”
“근데, 저 사람 게이인데 괜찮아? 왠지 조금 불결하다는 느낌 안 들어?”
“참, 그렇구나. 치이, 얼굴도 괜찮고, 키도 큰 거 같고, 몸매도 좋은데 왜 하필 게이람.”
“그래, 그러니 그냥 포기해.”
“그래, 아깝긴 해도 그래야겠다. 관심 끊자.”
귓전으로 들리는 소리에 현수는 짜증이 났다. 자기들 마음대로 억측하곤 멀쩡한 사람을 게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현수야……! 흐흑! 나, 너 너무 좋다. 흐흑! 현수야. 사랑해.”
“끄응……! 이 자식은 하필이면 왜 이때……? 하긴, 그만한 물량이면 눈물이 나올 만하지.”
현수는 남들이 오해를 하든 말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오냐. 안다. 네 마음 다 아니 이제 그만 울어라.”
“흐흑! 내 맘을 알아준다니 고맙다. 흐흑!”
기어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곤 손을 내밀어 현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머, 어머! 저 사람들 다시 재결합하기로 했나 봐. 어휴, 불결해. 야, 우리 가자.”
“그래, 어떻게 남자끼리……. 생긴 건 멀쩡한데. 가자!”
여자들이 슬슬 밖으로 나간다. 그리곤 현수와 상렬이 있는 쪽을 흘깃 바라본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것이다.
“끄으응!”
졸지에 특이성욕자가 된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렬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눈물을 흘린다.
이제 신세계마리타임은 해운업계의 풍운아가 될 것이다.
현재 국내 해운업계에서 절대 강자는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그리고 STX이다.
한진해운은 70척 보유에 658만 9,000/DWT1)를 기록했으며 현대상선과 STX 팬오션은 각각 43척 보유에 486만 9,000DWT과 71척 보유에 약 412만 9,000DWT를 나타냈다.
신세계마리타임은 아직 단 한 척의 상선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제 곧 달라질 것이다.
천지건설과 이실리프 무역상사의 물량만 수주해도 톱3 안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김상렬은 부친으로부터 신세계마리타임을 물려받을 때 회사를 크게 키워 해운업계의 중심이 되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간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톱3는 넘사벽 너머에 있던 업체들이다. 그런데 현수의 덕으로 단숨에 그들 사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최선을 다해줘. 내가 널 추천했으니 기대에 부응하라는 뜻이다.”
“물론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게. 고맙다. 친구야! 정말 고마워!”
“야, 친구끼리는 고맙다는 말 안 하는 거거든. 네가 나였다면 나를 위해 힘써주지 않았겠냐? 안 그래?”
“그, 그래! 물론 그랬겠지. 하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렇게 밀어주는 건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더 고마워!”
“짜식! 그럼 오늘 커피 값은 네가 내. 알았지?”
“그, 그래. 당연하지. 말만 해라. 밥도 사고 술도 살게.”
“됐어, 인마!”
상렬과 헤어진 현수는 권지현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어머, 현수 씨! 귀국하신 거예요?”
“네, 회사에 일이 있어 잠시 귀국했어요.”
“거기 어디예요?”
“네?”
“어디냐구요. 오셨으니 만나야 하잖아요.”
“여긴……. 아니에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6시 퇴근이죠? 저번에 만났던 그 커피숍에서 기다릴게요.”
“네에, 그러세요. 그럼 이따 봬요.”
전화를 끊고 보니 아직 세 시도 안 되었다. 현수는 이실리프 상사로 전화를 걸었다.
“어, 주영이냐?”
“현수? 네가 어떻게? 귀국한 거야?”
“그래. 회사에 일이 있어 잠시 귀국했어. 별일 없지?”
“그래! 근데 너, 지금 어디냐?”
“왜?”
“왜긴, 시간 있으면 얼른 이실리프 빌딩으로 와라.”
“알았다. 지금 출발할게. 한 10분쯤 걸릴 거야.”
“그래, 기다릴게.”
전화를 끊고 곧장 택시를 탔다. 이실리프 빌딩 로비에 들어서려니 눈에 익은 사람이 나온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 김 사장님! 귀국하신 거예요?”
“네, 일이 있어 잠시 귀국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이가 사장님과 연락해야 한다고 했는데 잘 되었네요. 전화 한 번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실리프 어패럴의 사장 박근홍의 부인인 김주미 여사가 얼른 고개를 숙이곤 서둘러 나간다.
“뭐 급한 일이라도 있나?”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갔다. 이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경비원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손님, 잠깐만요.”
“네? 저요?”
“네, 어디에 용무가 있어서 오신 분이신지요?”
“12층에 가려고 합니다.”
“그래요? 그럼 죄송합니다만 방명록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 용무를 기록해 주십시오.”
“방명록이요?”
“네, 보안 때문에 그러니 협조해 주십시오.”
“흐음, 그러지요.”
현수는 순순히 데스크 앞까지 따라갔다. 보안의 중요성을 알기에 기꺼이 협조한 것이다.
경비원은 기록지와 볼펜을 건넨다.
“여기에 내용을 쓰시면 됩니다. 성함과 재직하는 회사가 있으면 그 회사의 이름, 그리고 직책과 연락처를 먼저 쓰시고, 이곳에서 만나실 분의 성함과 소속부서를 기록하십시오. 또한 이곳에서의 용무를 써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현수는 서둘러 기록지에 신상명세를 써 내려갔다.
성명 : 김현수
소속 : 이실리프 상사
직위 : 대표이사 사장
연락처 : 010―1234―5678
면담대상 : 이실리프 상사 총괄비서실 민주영 실장
면담내용 : 회사의 전반적인 업무
모든 기록을 마친 현수가 방명록을 건네자 경비원이 이를 받아 들고는 대강 훑어본다. 그러는 사이에 현수가 입을 연다.
“자, 이제 올라가도 되죠?”
“잠깐만요? 이봐,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경비원은 화가 났다는 듯 눈을 부라린다.
“네……? 장난이라니요?”
“여기 이거… 이게 장난이지 그럼 아냐? 그리고 우리가 심심해서 이런 거 기록해 달라고 하는 거야?”
놀림 당했다 생각한 경비원은 노골적인 반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수는 차분했다.
“장난이라니요? 장난 아닌데요?”
“이 사람이 지금……! 좋아, 신분증 내놔 봐. 진짜 김현수인지 확인하게.”
“네? 신분증이요……?”
주머니를 더듬던 현수는 주민증을 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깜박 잊고 놓고 왔네요.”
“뭐요? 지금 이 사람이……. 안 돼! 당신은 못 올라가.”
말을 마친 경비원은 더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듯 대꾸 대신 데스크 아래 버튼을 눌렀다.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았건만 로비 양쪽 문에서 검은 양복을 걸친 사내 넷이 후다닥 달려온다.
“뭡니까?”
“이 사람, 아무래도 잡상인 같습니다.”
“뭐요? 내가 잡상인이라고요?”
현수가 항의하는 사이에 검은 양복을 걸친 사내들이 얼른 현수의 양쪽 팔을 붙잡는다.
“손님, 이 건물은 잡상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나가주십시오.”
위압적이기는 하지만 정중했다.
현수는 어이가 없었으나 실랑이를 벌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렇기에 힘을 뺀 채 입을 열었다.
“장난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면 알 거 아닙니까?”
“흥, 네놈이 어떻게 우리 회사 사장님과 총괄비서실장님 이름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어림도 없어.”
경비원의 대꾸에 현수가 뭐라 하려는 찰나이다.
“자, 순순히 말할 때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검은 양복을 걸친 경비원들이 현수의 팔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하지만 어찌 끌려가겠는가!
“아이, 참! 이봐요. 장난 아니라니까 왜 이러는 거요?”
“우리 회산 잡상인 출입금지입니다. 그러니 나가주십시오.”
“잡상인 아니라잖아요. 봐요. 내가 물건 팔러왔다면 뭔가가 있어야 하잖아요. 난 아무것도 없어요.”
경비원은 마이동풍인 듯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용무가 불분명해도 출입금지입니다. 뭐? 회사 업무 전반이라고……? 장난해요? 뭐합니까? 어서 끌어내지 않고.”
“네.”
검은 양복의 경비원들이 현수를 잡아당기려 할 때이다.
땡―!
엘리베이터 정지신호음에 이어 문이 열렸고, 누군가 튀어나온다.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시선을 고정시킨다.
민주영이다. 주영은 현수를 잡아끌려는 경비원들을 보자 고함을 질렀다.
“거기……! 모두 멈춰요.”
경비원은 민주영을 보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사장이 부재중인 현재 이실리프 상사의 실제 운영자이기 때문이다.
“아! 총괄 비서실장님. 이 사람이 지금 장난을 해서…….”
“지금 미쳤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이런 거예요?”
“네? 그건 저희가 어찌…….”
2장 육군 군수사령부에서
“어서 팔 풀어요. 당신들이 끌어내려는 사람이 우리 회사 사장님이에요. 알았어요?”
“네에……?”
“헉……!”
주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쪽 팔에 가해지던 억센 힘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내가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 전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 건물 예전엔 조폭들이 쓰던 거라고 했죠? 그러니 그런 사람들 출입을 막으라고 한 거잖아요. 안 그래요?”
“네, 그렇죠.”
경비원의 음성엔 힘이 없었다.
“근데 뭡니까? 우리 회사 사장님이 조폭으로 보여요? 그런 거예요?”
“죄송합니다.”
경비원은 얼른 고개를 숙인다.
“됐다. 그만해라.”
현수의 말에 주영이 얼른 고개 숙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앞으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이만 올라가자.”
“네, 이쪽으로…….”
주영이 안내하여 현수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하자 경비원들이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한다.
그런 경비원들의 등에선 진땀이 솟는다. 어렵게 취업에 성공해서 근무 시작한 지 얼마 안 된다.
그런데 사장을 잡상인 취급해서 내쫓으려 했다. 어쩌면 해고 통지가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일자리를 찾아 헤매야 한다. 그렇기에 자신들을 불러들인 경비원 최씨를 째려보았다.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냐는 뜻이다.
한편, 경비원 최씨도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다. 잘리게 될 것임을 직감한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상승하기 시작하자 현수가 입을 열었다.
“보안 때문에 방명록을 요구하는 건 좋은데 조금 개선해야겠다. 경비원 말고 여직원을 배치해.”
“그래, 알았어. 어떻게든 인건비를 줄이려다 그런 거야. 경비원들은 잘라야지?”
“아냐, 놔둬. 얼굴을 몰라서 그런 건데. 그리고 나 옷 입은 거 봐라. 차도 없이 그냥 걸어서 들어왔으니 그런 걸 거야.”
“알았다. 그래도 주의는 줘야지.”
“이미 주의 받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냥 둬. 근데 조폭들이 그렇게 자주 들어오냐?”
“거의 매일! 웬놈의 조폭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그래서 경비원들을 그렇게 배치한 거야. 가끔 들어와서 깽판 치는 놈들이 있어서.”
“잘했다. 점점 덜해지겠지.”
“지하실의 룸살롱 말이야.”
“락희……?”
“그래, 그거 때문에 더해. 임대기간 만료되면 내보내자.”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
“알았어.”
12층에 당도한 둘은 사장실로 들어갔다. 세정파 유진기가 쓰던 방의 인테리어를 아주 약간 손본 방이다.
“여기가 네 방이야.”
“흐음, 좋네.”
“일단 앉자.”
“그래.”
자리에 앉자 문이 열리고 예쁜 아가씨 하나가 들어선다.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몸매까지 아주 착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