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안녕하세요? 사장님! 비서실 윤성희라고 합니다.”
“아, 네에.”
현수가 시선을 맞추자 얼른 고개를 숙인다.
“차는 뭐로 준비해 드릴까요?”
“커피 좋아해요. 그거 없으면 다른 것도 괜찮고요.”
“커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실장님은 녹차 드실 거죠?”
“그래요, 그걸로 주세요.”
윤성희가 나가자 주영이 입을 연다.
“사장 비서실 소속이지만 내 비서도 겸한다. 네가 자리를 많이 비우잖아.”
“그래. 근데 이은정 실장이 은근히 경계 안 해?”
“은정 씨가? 왜……?”
“비서실에 너무 예쁜 아가씨가 있으니까.”
“짜식! 별 걱정을 다해준다. 걱정 마라. 은정 씨는 손톱만큼도 경계하지 않으니까. 왜 그런 줄 알아?”
“뭔데?”
“윤성희 씨는 은정 씨 사촌이야.”
“뭐? 그럼 인사 청탁 받아서 뽑은 거야?”
현수은 부러 버럭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영은 태연자약하다.
“아니, 당당히 면접을 통과해서 뽑은 아가씨야. 내가 설마 그런 짓 하겠냐?”
“아니면 다행이고……. 그나저나 날 왜 불렀냐?”
“사람 뽑는 일, 이거 정말 힘들다. 오늘 면접은 네가 봐라.”
“나 조금 있다 어디 가야 하는데?”
“야! 안 돼! 두 시간, 딱 두 시간만이라도 네가 봐라. 나 며칠째 집에도 못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주영은 컨디션이 별로인 듯하다. 그동안 살이 좀 빠진 듯해 보이기도 한다.
“알았다. 갔다 와라. 단, 나 이따 여섯 시쯤에 서초동 가야 하니까 그 시간 감안해서 와라. 알았지?”
“오케이. 나 그럼 간다. 참, 면접은 11층에서 본다. 지금쯤 사람들 길게 줄 서 있을 거야. 어서 내려가.”
“끄으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똑, 똑, 똑―!
가벼운 노크 소리에 이어 윤성희가 커피 잔을 들고 들어선다.
“성희 씨! 내 건 성희 씨가 마셔요. 난 바빠서 먼저 갑니다.”
“네……? 어딜 가시는 지 알려주셔야……. 실장님!”
윤성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영의 신형은 문밖으로 사라졌다.
‘짜식! 은정 씨 보러 가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하여간 늦게 배운 도둑질 밤 새는지 모른다더니.’
현수가 실소를 베어 물 때 커피 잔을 내려놓은 윤성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곤 나가려 한다.
“윤성희 씨라고 해죠? 앉아요.”
“네에.”
조신하게 치마를 여미며 자리에 앉은 윤성희는 슬쩍슬쩍 현수의 얼굴을 보았다.
은정과 주영에게 말로만 듣던 사람이다.
키도 크고, 잘 생겼다. 성격도 온화한 듯하다. 하지만 이실리프 상사라는 큰 회사의 주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직원도 못 되고 알바쯤으로 보인다. 이제 겨우 대학을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얼굴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 채용된 후 성희는 은정에게 물어보았다.
이실리프 상사는 매일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고용하고 부서별로 배치하는 일만 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뭔가가 생산되는 기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월급은 꼬박꼬박 나온다고 한다. 재벌의 계열사 부럽지 않은 급여 체계이다.
그리고 이실리프 상사엔 이사급 임원이라곤 딱 하나이다. 민주영 실장의 공식 직함은 전무이사이다. 상무이사도 없고, 평이사들도 없는 이 회사는 대체 어떤 회사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실로 놀라웠다.
이실리프 상사는 주식회사로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표이사 사장인 김현수 개인 기업이다.
주주들이 있기는 하다.
지분율은 김현수가 50%, 현수의 부친이 20%, 모친이 25%이다. 나머지 5%는 민주영 실장의 지분이다.
아무튼 김현수 본인은 천지건설의 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으로 출장 간 상태라 들었다.
자기 회사를 내버려 두고 외국에 머문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고, 큰 회사의 사장이면서 월급쟁이를 하고 있다는 것도 상상이 되지 않아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은정은 두고 보면 안다면서 취직 하나는 제대로 잘 한 것이라 하였다.
아무튼 그렇게 말로만 듣던 현수이다. 그런데 단독 면담을 하자 하니 괜스레 손에서 땀이 난다.
“윤성희 씨는 우리 회사에 입사하신 지 얼마나 되었죠?”
“보름 조금 안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회사에 대해 느낀 바를 말해주십시오.”
“네……?”
“우리 회사 분위기가 어떤지 말해달라는 겁니다.”
“아! 네에. 근데…….”
성희는 잠시 머뭇거렸다. 잘못 말했다가 불이익을 당할까 싶은 것이다. 이를 눈치챈 현수는 피식 웃음 짓는다.
“그냥 느낀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외국에 있다 보니 요즘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늠할 수 없어서요.”
“아, 네에. 우리 회사는 괜찮은 회사인 것 같아요. 근데 생산되는 물건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서 월급이 제 날짜에 안 나올까 봐 걱정하는 사원들이 많아요.”
“그밖에 다른 것은요?”
“다른 건 모두 만족스럽습니다.”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나가서 일 보세요.”
“네에.”
윤성희가 나가려는데 현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참, 월급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
윤성희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잠시 후, 현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면접을 보았다.
직능별 기술자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현수는 출신학교나 자격증보다는 실제 업무에 얼마나 오래 종사했는지를 따졌다. 물론 인성도 살폈다.
오늘은 현대그룹의 창시자인 고 정주영 회장이 조성한 서산농장 출신 인사들의 면접이 잡혀 있었다.
현대 서산농장의 농지면적은 약 10,212㏊이다. 이를 환산해 보면 102.12㎢이다.
이곳에서 연간 생산되는 쌀은 336,280석이다.
이를 환산하면 약 4억 8,400만㎏이다. 이것을 다시 환산하면 60만 가마니를 약간 상회한다.
아무튼 대한민국에선 가장 큰 농장이다.
그런데 오늘 면접 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바로 서산농장에서 정년퇴직한 나이 지긋한 분들이시다.
서산농장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조성하려는 이실리프 농장, 농산, 그리고 축산에 비하면 작다.
그래도 규모있는 농업을 해본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현수에게 딱 필요한 사람들이다.
하여 대부분의 면접은 불과 2∼3분 정도의 대화로 결정되었다. 정년퇴직할 때까지 서산농장에 근무한 분들이라면 더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현수는 면접 자리에서 바로 채용 통보를 했다.
퇴직 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고심하던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면접을 보자 주영이 복귀했다. 아까와 달리 얼굴이 훤하다.
“짜식! 은정 씨 만나고 오니 그렇게 기분 좋냐?”
“알았냐?”
“그래, 인마! 얼굴에 다 써 있다. 언제 결혼할 거야?”
“내년에……. 은정 씨 졸업하면 곧바로!”
“짜식, 급하기는……. 축의금 준비해야겠네. 얼마나 내랴?”
“나야 많이 주면 고맙지.”
“오냐, 알았다. 알아서 많이 챙겨주마.”
“너, 약속했다. 하하! 농담이야.”
주영은 이미 현수에게 큰 은혜를 입었음을 안다. 그건 은정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어찌 들으면 말실수가 될 자신의 언사를 무마하려 환한 웃음을 지었다.
현수는 피식 웃음만 지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이 녀석의 결혼 선물로 무엇을 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실리프 무역상사의 사옥이 된 건물 중 주영과 은정이 사는 집들을 분양해 주는 것이 괜찮을 듯 싶다.
‘흐음, 조금 더 넓은 집을 사줄까?’
현수가 고심할 때 주영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연다.
“참, 너 이제 가야 하지?”
“그래, 일단 서초동에 갔다가 다른 데도 들러야 할지 몰라.”
“알았다. 시간 날 때마다 와서 면접 좀 봐라. 나 죽겠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이실리프 빌딩을 나설 때 곽인겸 씨가 나와 인사를 한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오셨는데 미처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아! 곽인겸 씨. 몸은 괜찮으시죠?”
“아이구, 그럼요. 너무 멀쩡해져서 요즘 펄펄 날아다닙니다.”
“하하, 다행입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네에. 그리고 아까 직원들이 사장님께 무례를 범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에구,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저는 괜찮습니다.”
“너그럽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아까 그 사람들 임무에 충실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군요. 이걸로 회식 한 번 하세요.”
현수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네……? 아이고, 아닙니다. 사장님께 그런 실례를 범했는데 어떻게 이런 걸……. 아닙니다. 그거 받을 자격 없는 것 같습니다.”
곽인겸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까지 쳤다. 이에 현수는 피식 웃음 지었다.
직원들은 임무에 충실하고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겸양이 무언지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든 것이다.
“우리 회사 직원이 임무에 충실한 게 기분 좋아서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사양치 마시고 받으세요. 그리고 맛있는 거 드시구요.”
“……! 감사합니다. 사장님! 무례를 용서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너무 너그러우십니다.”
인겸은 현수가 내민 봉투를 받았다.
곽인겸은 현재 이실리프 빌딩 관리실 실장이다.
아까 현수의 앞을 가로막았던 경비원과 경호원도 곽 실장 관할이다. 부하직원들이 사장에게 무례를 범했기에 일부러 나와서 기다렸던 것이다.
그동안 곽 실장은 알게 모르게 부하직원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업무에 정통한 것도 아니고, 힘이 있는 자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본인의 자리를 아주 굳건히 하는 일이 생겼다. 잘릴 뻔한 직원 다섯의 자리를 구해낸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금일봉까지 받았다.
몰래 숨어서 이를 지켜보던 관리실 소속 직원들은 앞으로 곽 실장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 관리실 소속 경비원들은 회식자리에서 입을 딱 벌렸다. 젊은 사장이 회식이나 하라면서 준 봉투에 너무 많은 돈이 들어 있었던 때문이다.
다음 날, 이실리프 상사엔 몇 가지 소문이 돌았다.
회사에 거의 나오지 않는 젊은 사장이 나타났다는 것이 첫째이다. 둘째는 임무에 충실해서 사장 마음이 흡족해지면 금일봉이 하사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그 액수가 직원들이 상상하던 것 뒤에 0이 하나 더 붙어 있다는 것이다.
우연한 사건으로 이실리프 상사의 직원들은 애사심이 몹시 고취되었다.
회사를 나서 곧바로 서울 중앙지검으로 향한 현수는 신분증을 내밀고 면담 신청서를 작성했다.
물론 대상자는 5급 공무원인 권지현이다.
지하에 내려가니 공중전화가 있다. 현수는 이걸로 이경천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경천 검사님 방입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전에 세정 캐피탈 장부를 보내 드렸던 사람인데 일이 어찌 진척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이 검사님 바꿔주실 수 있습니까?”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띠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링∼!
대기음이 한참을 울린다. 그럼에도 이 검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1분쯤 기다리다 전화를 끊었다.
보나마나 발신지 추적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조폭의 뒤나 봐주는 부패한 검사와 대화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전화를 건 것은 마지막 확인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현수는 주영으로부터 락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언제 귀신 소동이 있었느냐는 듯 성업 중에 있다고 한다. 세정파에게 적지 않은 자금이 공급된다는 뜻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세정 캐피탈은 여전히 불법적인 고금리 영업을 하고 있다.
이경천 검사가 아무런 수사도 하지 않은 것이다.
“어머, 현수 씨!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냥 로비에 계시지. 여기까지…….”
복도에서 마주친 권지현이 환한 웃음을 짓는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린 얼굴이 아니다. 현수의 전화를 받는 순간 묵은 피로가 말끔히 가신 때문이다.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아서요. 퇴근한 거죠?”
“네에. 우리 가요.”
지현이 팔짱을 낀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 몇몇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검찰청을 나서 커피숍 쪽으로 이동했다.
“우리, 저녁 먹고 커피 마셔요. 근처에 황태구이 아주 잘 하는 집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