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황태구이 좋죠.”
지현이 안내한 곳에 당도하니 냄새부터 다르다.
저절로 식욕이 자극되어 침이 샘솟는 듯하다. 이를 눈치챘는지 지현이 생긋 웃는다.
“아마 현수 씨 입맛에도 맞을 거예요. 정말 맛있거든요.”
“네에. 콩고민주공화국에 있는 동안 이런 음식이 늘 먹고 싶었습니다. 오늘 지현 씨 덕에 제 입이 호강하겠네요.”
“호호, 그랬으면 좋겠어요.”
지현의 환한 웃음에 현수는 기분이 좋아졌다. 향기 그윽한 예쁜 꽃 한 송이를 대하는 듯했던 것이다.
“참, 전에 서류 주셨던 건 말이에요.”
“네, 그 사건이요.”
지현의 부친인 서울고검장에게 현수는 세정 캐피탈 장부 사본을 건넨 바 있다. 다른 한 부는 강민경 기자에게 보내져 있는 상태이다. 이쪽에서 액션을 취하기 전까지는 터뜨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아무튼 서초동엔 벽에도 귀가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둘은 구체적인 언급 없이 에둘러 대화를 한다.
“비선을 통한 은밀한 내사가 진행 중이래요. 그런데 경찰과 법조계, 그리고 정계까지 폭넓은 로비가 있었나 봐요. 이들간의 커넥션도 만만치 않고요. 그래서 조금 더 캐봐야 한다고 하시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현수를 본 지현은 또 한 번 웃는다.
“그나저나 아주 귀국한 건 아니죠? 언제 다시 나가세요?”
“아직 정확한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어요. 회사에서 조만간 어떻게 하라는 말이 있겠죠.”
“그럼 이번 주말에… 아! 음식이 나오네요.”
뭔가 말을 하려던 지현이 얼른 낯빛을 바꾼다.
‘응……? 무슨 애기를 하려다 말지?’
둔감한 현수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제 아무리 7써클 대마법사가 되었다곤 하지만 남자이기에 지현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맛있겠어요. 어서 드세요.”
“네, 지현 씨도…….”
식사를 마치고 이전의 그 커피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지현은 뭔가 말할 듯 말할 듯하면서 끝내 이야기하지 않았다. 몹시 궁금했으나 캐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 모르는 척했다.
커피숍에선 그간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현수는 문득 죄책감을 느꼈다.
지현을 보고 있지만 강연희 대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결국 속 알맹이 없는 이야기들만 나누었다.
부우우웅! 부우우우웅―!
저녁 8시경, 핸드폰이 울린다. 번호를 보니 이실리프 어패럴의 박근홍 사장이 발신자이다.
“아! 박 사장님. 그간 안녕하셨죠?”
“네, 저흰 잘 있었습니다. 김 사장님도 안녕하셨죠?”
“네에.”
현수가 의례적인 대답을 하자 곧장 용무를 말한다.
“김 사장님! 내일 아침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네, 내일 오전에 육군본부에서 군수담당 장교와 미팅이 있습니다. 같이 가주시죠.”
“알겠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문자로 보내주십시오.”
“네에.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 *
“육군 군수사령부 보급처 최세창 대령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실리프 어패럴의 박근홍 사장입니다. 이쪽은 저희 제품을 개발한 김현수 사장입니다.”
현수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지만 별다른 말이 없었다. 박근홍을 따라온 사람 정도로 취급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나이가 어려 보여서 그런 듯하다.
“두 분 모두 반갑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죠.”
“네.”
군대답게 면회실의 풍경은 아주 단출했다. 인테리어라는 것은 아예 없는 듯하다.
잠시 후, 병장이 커피 세 잔을 내온다. 그마나 종이컵이 아니라는 게 이색적일 뿐이다.
“이철용 장군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신개념 군복을 제작하셨다고요?”
박근홍 사장은 최세창 대령을 만나기 위해 선친의 동기이자 친구였던 이철용 예비역 중장에게 전화를 건 바 있다.
그냥은 만나기도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 대령은 이철용 예비역 중장이 현역에 있을 때 휘하에 있던 장교이다.
그렇기에 비교적 쉽게 미팅 날짜가 잡힌 것이다.
“네, 저희가 이번에 개발한 군복은 항온 기능이 적용된 것입니다. 이것을 입고 있으면 한 여름에도 늘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군복만 입으면 시원하다고요?”
“그렇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합니다. 여기 샘플용 군복이 있으니 이걸 한번 입어보시지요.”
박근홍 사장이 슈트케이스에서 얼룩무늬 전투복을 꺼내 건넸다. 이를 받아 든 최세창 대령은 별다를 바가 없음을 느껴서 그러는지 약간 실망하는 표정이다.
“제가 보기엔 현용 군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겉보기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만든 군복은 일단 원단 자체가 국산입니다. 이 원단은 내열섬유인 아라미드계 섬유와 나일론66 혼방 원단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요?”
최세창 대령은 시큰둥한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근홍 사장의 설명은 이어졌다.
“여기에 고어 가공을 해서 투습 및 방수 기능을 부여했습니다.”
“고어 가공이 되어 있다고요?”
이번엔 약간 흥미있다는 표정이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패턴이며…….”
최 대령은 대꾸없이 박 사장의 설명을 들어주었다.
“저희 군복의 최대 강점은 항온 기능이 적용되어 한 여름에도 에어컨 앞에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자, 이제 설명은 끝났습니다. 죄송하지만 군복을 입어봐 주십시오.”
최 대령은 들고 있던 군복으로 갈아입는 것이 마뜩치 않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알겠습니다. 한번 입어보죠.”
결국 군복을 갈아입었다.
“이제 밖으로 나가보십시오. 가급적 햇살이 강한 곳에 계십시오. 조금 뛰어보시면 더 좋습니다.”
“지금 이 더위에 나가서 뛰어보라고요?”
“네, 부탁드립니다.”
박근홍 사장이 정중히 고개 숙여 당부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리곤 밖으로 나섰다.
현수와 박 사장은 최 대령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몹시 찡그려져 있었다. 밖에 나가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말하길 80년 만의 더위라고 한다. 그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뛰려니 마뜩치 않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밖으로 나간 최 대령은 잠시 머뭇거렸다. 박 사장의 말만 믿고 나갔다가 땀에 흠뻑 젖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 대령님 부탁드립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최 대령은 결국 따가운 햇살 속으로 걸어 나갔다. 몇 발짝 걷지도 않았는데 모자에서 강렬한 더위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깨에서도 그에 맞먹는 뜨거움이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
최 대령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곤 슬슬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덥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소매를 걷어보니 햇살의 강렬함이 단박에 느껴진다. 하여 다시 소매를 내렸다. 그리곤 조금 빨리 걸어보았다.
이 정도면 땀이 나야 한다. 그런데 덥지 않다.
‘어쭈……!’
최 대령은 조금 더 빨리 걸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자 달리기를 시작했다. 결국 최 대령은 약 100m를 달렸다.
“세상에……!”
전속력으로 달렸으니 땀이 비 오듯 해야 한다. 실제로 머리에선 땀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린다.
그런데 몸에선 땀이 나지 않는다. 마치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달린 듯 약간 열이 나는 듯하더니 이내 그런 기분마저 사라진다.
‘헐! 이건… 말도 안 돼!’
최 대령은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평범한 군복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원단이 약간 다르다고 이런 효과를 낸다는 말은 들어본 적조차 없다.
“어떻습니까?”
“이거 원단이 뭐라고 했죠?”
아까는 대강 들었다. 군복에 사용되는 원단이 달라봐야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네, 이 군복에 적용된 원단은…….”
박근홍 사장이 또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설명을 했다.
“근데 원단이 그러면 이런 효과가 나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이 군복에는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항온 기능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래요? 그럼 그 온도도 바꿀 수 있는 겁니까?”
“네, 현재 착용하고 계신 것은 36℃가 유지되도록 한 겁니다. 동절기용은 37℃또는 그 이상의 온도가 적용되도록 할 계획입니다.”
“겨울용도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기존의 방한복엔 55℃를 6시간 지속시키는 발열체가 필요했지만 저희 군복엔 별도의 장치 없이 온도를 유지합니다.”
“……!”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인데 저희 군복은 어떤 온도든 설정해 드릴 수 있습니다. 군에서 필요한 온도를 지정해 주면 그에 맞춰 납품할 수 있습니다.”
“끄으응!”
최 대령은 나직한 침음을 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군복이기 때문이다. 이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방탄 기능도 가능합니까?”
“방탄 기능이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기에 박근홍 사장은 현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대답할 범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적용하려고만 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걸 원하시는지요?”
“그게 적용되면 납품가가 비싸지겠지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당연한 질문이기에 간단히 대답해 주었다. 방탄 기능이 추가되려면 실드 마법이 몇 개나 중첩되어 구현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 마법진을 만들어내는 거야 시간만 있으면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마법진이 작동되도록 하는 마나석은 유한하다.
그리고 현재로선 가치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군복의 효능을 조금 더 실험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허락이 떨어지자 최 대령이 전화기를 집어 든다.
3장 배짱장사 합시다
“난데, 거기 이한기 상병 있나? 그래? 그럼 지금 즉시 면회실로 오라고 해. 그래, 지금 당장!”
전화기를 내려놓고 불과 30초 만에 노크 소리가 들린다.
똑, 똑, 똑!
“들어와.”
“필승! 상병 이한기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쉬어!”
“쉬어.”
“상의를 탈의하고 이것을 입어. 그리고 연병장을 전속력으로 두 바퀴 뛰고 이곳으로 되돌아온다. 실시!”
“실시!”
명령이 떨어지자 이 상병은 지체없이 군복을 갈아입었다.
이때 박근홍 사장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이 모자를 쓰라고 하십시오.”
“모자도 있었습니까?”
“당연하죠. 하의와 전투화에도 적용 가능합니다.”
현수가 준 마법진 샘플을 이용하여 박 사장이 나름대로 적용시킨 모양이다.
“그랬군요. 이 상병, 이 모자를 쓰고 달린다.”
“네, 알겠습니다.”
옷을 다 갈아입은 이한기 상병은 문을 박차고 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정은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두 바퀴를 뛰고 나면 땀으로 범벅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장도 아닌 대령의 명령이다. 감히 이유를 묻는다거나 항명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이 상병은 최선을 다해 달렸다.
“헉, 헉! 헥, 헥! 헉, 헉!”
이 상병이 되돌아온 시간은 불과 몇 분이다. 이쯤 되면 머리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상의도 가슴팍이 푹 젖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멀쩡하다.
“이 상병, 느낌이 어떤가?”
“네, 상병 이한기! 이거 이상합니다. 몸에서 열도 나고 그래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땀은 안 나나?”
“땀은 나기는 하지만 거의 안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땀이 덜 난다고?”
“네, 에어컨 세게 틀어놓고 슬슬 달린 것 같은 기분만 듭니다.”
“박 사장님, 혹시 하의와 전투화도 준비되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런데 전투화는 270㎜짜리밖에 없습니다.”
“이 상병, 자네 발 사이즈 얼마인가?”
“네, 전 280㎜ 신습니다.”
“그래? 그럼 270㎜ 신는 병사를 찾아서 즉시 이곳으로 보내게. 아, 전투복 상의는 벗어놓게.”
“네, 알겠습니다.”
이 상병은 군복을 갈아입고는 쏜살처럼 사라졌다. 잠시 후, 누군가가 노크를 하고 들어선다.
재무계 강 중사이다. 뺀질거리기로 이름난 부사관이다.
“재무계 강만섭 중사, 부르심 받고 왔습니다.”
“그래, 강 중사! 발 사이즈가 270㎜ 맞지?”
“네, 그렇습니다.”
“좋아, 여기 이 군복으로 갈아입어라.”
“여기서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