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남자 밖에 없는데 뭐 어때?”
“네, 알겠습니다.”
군대 생활이 제법 된 중사라도 대령은 대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이전처럼 뺀질거리지 못하고 전투복을 갈아입었다.
“좋아, 지금부터 연병장을 두 바퀴 뛰고 온다.”
“네? 연병장을요? 이 더위예요?”
강 중사는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최 대령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더우면 전쟁 안 하나?”
“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다시 명령한다. 지금부터 연병장 네 바퀴를 전속력으로 뛰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좋아, 실시!”
“실시!”
강 중사는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병사가 있다. 물론 이한기 상병이다.
“쓰벌, 저 새끼, 보복하지 않을까?”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든다. 뺀질이 강 중사가 죽을힘을 다해 연병장을 뛰고 있으니 후환이 두려운 것이다.
“나중에 뭐라 하면 최 대령님이 직접 이름을 찍어서 불렀다고 하지. 근데 그게 먹힐까?”
이한기 상병은 못내 찜찜했지만 어쩌겠는가!
강 중사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구름 한 점 없는 그야말로 쨍쨍한 날씨이다. 강 중사가 딛고 지나는 곳마다 뿌연 먼지가 들썩인다. 습도는 높다는데 왜 저렇게 마른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 기온이 연중 최고라는 예보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날보다도 더 뜨거운 날씨라는 생각이 든다.
“에이, 쓰벌! 모르겠다.”
이한기 상병은 짱 박힐 장소를 물색했다. 최 대령에게 호출 당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 이참에 점심식사 전까지 푹 쉴 생각을 한 것이다. 이 상병도 강 중사 못지않은 뺀질이였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 중사는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다. 최 대령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최 대령!
결코 인간성이 좋지 않은 인간이다. 하급 장교들은 물론이고, 부사관과 사병들까지 갈군다. 군 경력이 제법 긴 준위나 상사들도 가급적이면 최 대령과 엮이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는 같이 술을 마셔야 하는 자리가 있으면 온갖 핑계를 대고 빠져나간다. 걸핏하면 트집 잡고, 그걸 빌미로 두고두고 괴롭히는데 어찌 같이 있고 싶겠는가!
게다가 입은 얼마나 싼지 영내에서 일어난 일들을 최 대령의 사모가 쫘악 꿰고 있다. 그게 빌미가 되어 같은 아파트에 사는 부하 장교들의 마누라들이 들들 볶이고 있다.
저런 인간이 어떻게 대령까지 진급했으며, 조만간 준장으로 진급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나도는지 영 알 수 없다.
아무튼 강 중사는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잘못하면 두고두고 갈굼을 당하거나 더러운 보직을 맡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온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줄줄 흘러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정도 달렸으면 군화 신은 발에서도 열기가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슬슬 걸어다닌 것만큼이나 시원하다. 여름이 아니라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 같다.
“헐! 이게 왜 이러지? 뭐야? 혹시 내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거야? 술, 담배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러나? 이거 혹시 불치병……?”
강 중사는 불안감을 느꼈으나 달리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불치병보다 최 대령의 보복이 더 두려웠던 때문이다.
“헉, 헉! 헉, 헉! 중사 강만섭, 연병장 네 바퀴 모두 돌았습니다.”
“수고했다. 현재 느낌은 어떤가?”
“네? 뭐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긴? 한국말 몰라? 열나고 이러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 따, 땀은 조금 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이 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몸에서 열도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와 발은 어때?”
“네? 머리는… 머리는 괜찮고 발도 괜찮습니다.”
“괜찮느냐는 뜻이 아니라 열나고 땀나고 하느냐는 말이다. 너 원래 이렇게 어리바리했어? 그런데 중사로 진급한 거야?”
“아, 아닙니다. 원래는 안 그렇습니다.”
“그럼 뭔데? 왜 말을 못 알아들어?”
“죄, 죄송합니다. 머리도 발도 모두 이상 없습니다. 시원합니다.”
“시원해?”
“네,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은 것 같이 시원합니다.”
“그래? 좋아, 수고했다. 원래 옷으로 갈아입고 가도 좋다.”
“네, 알겠습니다.”
강 중사는 혹시라도 또 뛰라 할까 싶어 그러는지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는 사라졌다. 그러면서 중얼거린다.
“이 상병 이 새끼, 어디 걸리기만 해봐라. 내가 아주 갈아 마셔 버린다. 으드득!”
더운 여름 날 연병장을 전력으로 뛰게 만든 이 상병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는 순간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 대령이 박 사장을 바라본다.
“이 샘플, 며칠 동안 여기에 둬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보안에 신경 써주십시오.”
“무슨 말인지 압니다. 알겠습니다. 각별히 주의하지요.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언제든 문의사항이 있으면 전화 주십시오.”
“그러지요. 멀리 안 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주차장으로 향하는 박근홍 사장은 싱글벙글한 표정이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김 사장님.”
“네.”
“다음 순서는 우리 제품의 납품단가와 물량, 그리고 기일이 정해지는 거겠지요?”
“그럴 겁니다. 하지만 낙관하지는 마십시오. 2005년도에 결정된 납품단가를 보니 뭔가가 있는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중간 중간 기름칠도 하고 그래야겠지요. 방금 헤어진 최 대령님과도 조만간 식사 한 번 할 생각입니다.”
박근홍 사장은 부친 생전에 어떤 경로를 통해 군복이 납품되는지를 들은 바 있다.
군대와 관련된 단체들은 상당히 많다. 재향군인회, 성우회, 군인공제회 등이 그것이다.
박근홍 사장이 직접 군납을 한 것이 아니기에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순조로운 납품을 바란다면 요소요소에 충분한 기름칠이 칠해져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그렇기에 마트나 백화점 바이어 접대하듯 그렇게 접대할 생각을 하는 듯하다.
현수는 이쯤해서 쐐기를 박아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박 사장님, 우리 제품은 비교대상조차 없는 겁니다. 굳이 접대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네? 그래도 원만한 결정이 내려지려면…….”
박근홍 사장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현수가 입을 연 때문이다.
“접대에 들어간 비용까지 국민이 부담하는 게 될 겁니다. 그러니 접대 같은 건 생각지도 마십시오. 국방부에서 안 받아줘도 팔 데는 널렸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네? 그,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관행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 관행이라는 것을 끊어보면 어떨까요? 군복 납품을 안 해도 팔 데는 널렸잖아요.”
“……!”
“대한민국에는 방금 말씀하신 관행이라는 명목하에 저질러지는 수많은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럴싸하게 관행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분명한 뇌물수수와 청탁입니다.”
“……!”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제품은 독보적인 겁니다. 이런 걸 가지고 손바닥 비비면서 아부 떨 일 있을까요?”
“……!”
박근홍 사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현수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국방부가 아니면 열대지방에 수출해도 됩니다. 아다시피 제 근무지가 적도를 끼고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입니다. 거기에 수출해도 되니 국방부에서 연락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갔습니다.”
“네에.”
“연락이 오더라도 부당한 요구를 하면 포기하면 그만입니다.”
“……!”
“그러니 국방부에서 연락오기 전까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드린 항온장치를 적용할 품목이 매우 다양할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럼요. 항온장치의 적용 대상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죠.”
박근홍 사장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리곤 이내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김 사장님 말씀대로 일체의 접대 없는 영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에. 배짱장사 한번 해보세요. 생각만으로도 신나지 않습니까?”
“하하, 물론입니다. 대신 이번엔 제가 접대를 받아보려는데 김 사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접대를 받아요? 누구한테요?”
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박근홍이 심술궂은 웃음을 짓는다.
“국방부 납품이 물 건너 가면 백화점과 대형마트 바이어들이 사주는 술 한번 마셔보고 싶습니다. 지금껏 사주기만 했거든요.”
“하하! 네에. 그러십시오.”
“이전엔 맨날 후려치는 가격과 영업비 전가 때문에 멍이 들었는데 이번엔 깎아달라고 할 때마다 값을 올려볼 생각입니다.”
“후후, 그것도 괜찮겠군요.”
“하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네에, 한번 만끽해 보십시오. 단, 사모님에게 혼나지 않을 정도로만 마셔야 합니다. 건강도 생각하시고요.”
“하하! 물론입니다.”
박근홍 사장은 생각만으로도 즐겁다는 듯 환히 웃었다.
“그나저나 거처가 불편하지 않습니까?”
“거처요? 아! 아닙니다. 조금 좁기는 하지만 괜찮습니다.”
“사장님은 그렇지만 사모님은 아닐 겁니다.”
“네?”
“밤이 깊어지면 1층부터 11충까지 아무도 없잖습니까.”
“아! 그렇군요. 그래서 조금 무섭다곤 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조금 더 견뎌보죠.”
“아닙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러니 작은 아파트라도 하나 얻으십시오. 비용은 제가 빌려 드리겠습니다.”
“……!”
현수의 말에 박 사장은 잠시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네에. 너무 작은 건 그러니 32평쯤 되는 걸로 얻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참, 사무실로 가시죠. 혹시 몰라 샘플용으로 제작한 티셔츠들이 있습니다. 필요하신 만큼 가져가시죠.”
“그래요? 그럼 혹시 여자용도 있습니까?”
“네, 여성용도 몇 장 있습니다.”
이실리프 어패럴을 나선 현수는 이실리프 무역상사로 향했다.
“어머, 사장님!”
“이 실장님, 오랜만이네요.”
“네에. 건강하신 거죠?”
“그럼요. 김수진 씨와 이지혜 씨는요?”
“창고에 검수 나갔어요.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그런데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조금 전 이실리프 어패럴에서 했습니다. 근데 에어컨 안 켜요?”
“더우세요? 그럼 켜드릴게요.”
이은정 실장이 리모컨을 들 때 현수가 손으로 저지했다.
“이거 먼저 받으세요.”
“어머, 이거 뭐예요?”
“이실리프 어패럴에서 개발 중인 신개념 티셔츠입니다. 입으면 시원할 겁니다.”
“정말요?”
“올라가서 갈아입고 내려오세요. 그러면 효능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래요? 잠깐만요.”
이은정 실장은 실제로 집에 가서 티셔츠로 갈아입고 내려왔다.
티셔츠는 칼라넥 스타일이다. 하긴 깃이 없으면 항온 마법진을 넣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인지 겉보기엔 평범하다.
이 실장이 올라갔다가 내려온 사이에 현수는 돌고 있던 선풍기마저 꺼버렸다. 그거 없어도 덥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신개념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이다.
“어머, 선풍기도 끄셨네요.”
“지금도 더워요?”
“어머, 정말……! 하나도 안 더워요.”
조금 전 이은정 실장은 전기요금을 아끼기 위해 창문을 열고 선풍기만 돌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사라질 더워가 아니기에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선풍기를 껐으니 금방 땀이 맺혀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도 덥지 않다. 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를 눈치챈 현수가 웃음 지었다.
“어때요? 하나도 안 덥죠? 그게 다 셔츠 때문이에요. 체온을 일정한 온도로 유지시켜 주는 기능이 있거든요.”
“어머! 티셔츠에도 그런 기능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이 실장의 눈이 커다래진다. 상상조차 못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날로 발전하잖아요.”
“정말로요?”
이은정 실장은 걸치고 있는 티셔츠의 요모조모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찌 알겠는가!
이런 면에서는 마법이 과학을 능가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게 하는 마법진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가 물었다.
“내가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나요?”
“네? 아, 아니에요. 통상적인 업무뿐이라 굳이 사장님이 결재하지 않으셔도 되요. 어머! 죄송해요.”
어찌 들으면 너 따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뜻으로 들릴 수 있기에 이 실장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