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281화 (281/1,307)

# 281

그렇지 않아도 현수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첫째는 아무런 희망도 없던 가난한 집 딸에게 재벌급 직장 부럽지 않은 직업을 갖게 해준 것이다. 그래서 동창들 모두 부러워한다.

둘째는 하루 종일 어둠뿐이던 지하 월셋방을 면하게 해준 것이다. 그 결과 할머니의 병환까지 말끔하게 나았다.

셋째는 해결할 수 없는 짐이라 여겼던 은행 대출금을 모두 갚아준 것이다. 매달 급여에서 조금씩 갚아나가고는 있지만 누가 이런 선의를 베풀겠는가!

넷째는 현수를 흠모하던 마음을 배반한 것이다.

이실리프 무역상사 초창기에 이은정은 현수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래서 무엇을 원하든 해달라는 대로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아직 졸업하지 않은 상태지만 같이 살자고 하면 졸업장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리라 마음먹었었다.

심지어 현수가 변태에 가까운 행위를 요구하더라고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고마움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마음은 점차 사랑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런데 그걸 배반했다!

현수의 절친인 민주영에게 마음을 열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엔 남들의 시선을 피해 키스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을 하면 곧바로 식을 올리기로 했다.

이렇듯 은정이 현수에게 향하던 뜨거운 마음을 바꾼 것은 권지현이란 아가씨가 나타난 이후이다.

대구에서 온 이 아가씨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신분이 조회된다.

부친은 대구지방검찰청의 지청장이다.

본인은 일류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며, 5급 공무원을 선발하는 행정고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패스했다. 과거의 신문을 보니 차석으로 합격해서 인터뷰한 기사가 있을 정도이다.

미모는 톱 탤런트들을 울릴 정도이고, 몸매는 슈퍼모델 뺨친다.

누군가의 블로그에 올라온 인물평을 읽어보니 1등 신붓감이다.

늘 겸손하고, 친절하며, 선량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평해져 있다. 그래서 대구지청의 총각검사들과 변호사들이 마음을 얻고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한다.

블로그의 끝엔 대체 누가 이 천사의 마음을 얻을 것인지 궁금하다는 것으로 맺음 되어 있다.

게다가 부친인 권철현 지청장은 불의와의 타협을 극도로 혐오하기에 검찰청 내에서 대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말해 아주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내친 김에 권철현 검사장을 검색했더니 부친이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했던 유명한 독립투사이며 인권 변호사라는 내용이 뜬다.

이 대목에서 은정은 부자이면서 성공한 기업가인 현수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자신이 아닌 지현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무엇 하나 비교할 것이 없다 여긴 것이다.

그래서 현수에 대해 애틋했던 마음을 접은 것이다. 하지만 은정은 이를 배신이라 여긴다. 그래서 내내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

어쨌거나 은정이 현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은 다섯 번째 이유는 대한약품의 주식을 매수하게 해준 것이다.

본인이 매입해도 막대한 차익을 얻을 수 있음에도 굳이 가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재정적 이득을 취하게 해주었다.

이로 인해 은정은 이제 겨우 20대 중반이지만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정도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현수가 독차지해도 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미안한 마음뿐인 것이다.

어쨌거나 은정은 자신이 한 말을 곧바로 부정했다.

“사, 사장님이 있으나 마나 하다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거라 굳이 확인하지 않으셔도 저희가 알아서 잘……. 죄송합니다.”

은정은 더 이상의 변명 대신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현수는 빙그레 웃음만 지었을 뿐이다.

“괜찮아요. 아무튼 별일 없다는 뜻이죠?”

“네에, 다만 이번 주문량이 너무 많아서…….”

“알아요. 백신 종류가 꽤 되죠? 그거 급한 거니까 항공화물로 발송하세요.”

“네, 사장님!”

“참, 전에 내가 준 거 있죠. 그거 효과가 있던가요?”

“다이어트 보조제 말씀하시는 거죠?”

은정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맞아요. 살 좀 빠지던가요?”

“사장님, 그거 어디서 파는 거예요? 그거 정말 끝내줬어요. 운동도 못했는데 살이 쏙쏙 빠졌어요.”

“지혜 씨나 수진 씨도 살이 빠졌어요?”

“물론이에요. 특히 수진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죽어도 빠지지 않던 젖살까지 빠졌거든요.”

“다행히 효과가 있군요.”

“네, 걔들도 그거 아무리 비싸도 산대요. 그거 어디서 팔아요?”

알려주기만 하면 당장 사러 가려는 듯한 눈빛이다. 현수는 또 한 번 웃음 지었다.

“대한약품에서 곧 출시하게 될 거예요.”

“대한약품이요? 그럼……!”

“맞아요. 내가 개발한 거예요.”

“네? 사장님이 어떻게……?”

“하여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거 드모비치 상사로도 수출될 거니까 미리 서류도 준비해 놓고요.”

“네. 근데 언제부터 시판한대요? 전에 주신 것 다 떨어졌는데…….”

은정과 수진, 그리고 지혜는 쉐리엔을 믿고 날마다 야식을 즐겼다. 그래도 살이 안 찐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틀 전, 쉐리엔이 모두 떨어졌다. 그날 이후 겁이 나서 야식을 먹지 못한다. 다시 살찔까 두려운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얻어다 줄게요.”

“어머, 정말요?”

은정이 반색한다.

“돈은 안 받겠지만 그것만 믿고 운동 안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 주영이와 주말마다 산행 하세요. 아셨죠?”

“네에, 사장님!”

은정이 얼른 고개 숙여 절을 한다. 여러 의미가 담긴 절이다.

현수는 그간 밀려 있던 업무를 단숨에 해결했다. 워낙 일처리가 꼼꼼했기 때문에 달리 살필 게 없었던 것이다.

“여보세요.”

“아! 현수 형님, 반갑습니다.”

전화를 받은 이현우가 반색한다.

“그간 잘 있었어?”

“그럼요. 형님은요?”

“나도 잘 있었지. 수정 씨하곤 잘 지내지?”

“네,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모든 게 형님 덕입니다.”

“하하, 고맙긴……! 경빈이는 요즘 어때?”

“처제하고 잘 지냅니다.”

“뭐어… 처제? 나 몰래 장가간 거야?”

“아뇨. 그건 아니고 생파 부를 때 그냥 그렇게 불러요.”

톱 탤런트 이수연의 별명이 생파라는 것을 떠올린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잘 되었네. 시간 내서 식사나 한번 하자.”

“형님! 그러지 말고 지금 봐요. 우리 본 지 오래되었잖아요. 어디 계신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그래 줄래? 여기 이실리프 무역상사야. 어딘지 알지?”

“형님이 주신 명함 주소로 가면 되죠?”

“그래, 올 때 경빈이도 같이 와.”

“네, 알았습니다. 휑하니 달려갑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인터넷 서핑을 했다. 주로 자동차 엔진에 관한 기술 자료들을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떠오르는 상념들을 메모했다. 고효율 엔진을 개발하는 힘든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똑, 똑, 똑―!

“사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아! 그래요?”

현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장실 문이 벌컥 열린다.

“형님!”

“행니임―!”

“하하, 어서들 와라.”

현우가 먼저 과장된 몸짓으로 현수를 와락 포옹했다. 경빈도 질 수 없다는 듯 둘을 안았다.

“자, 일단 앉자.”

“네, 형님!”

현우와 경빈이 자리에 앉자 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요즘 둘 다 깨가 쏟아지는 모양이다.”

“네, 모두가 형님 덕입니다.”

경빈이 고개를 깊숙이 숙인 절을 한다.

“얘, 왜 이래?”

“요즘 처제하고 아주 죽고 못 살거든요.”

“하하, 녀석! 그래, 그렇게 연애도 해야지.”

“형님, 오랜만에 만났으니 우리 한번 뭉쳐야죠?”

“술? 그래 술도 한잔해야지. 그보다 먼저 일 얘기부터 해야겠다.”

“일이요?”

“참, 경빈이 네 머리카락 수집해 놓았던 유진기라는 놈 앨범은 찾아서 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너희 회사에 있던 조폭 끄나풀들 이제 자르는 거냐?”

“당연히, 그래야죠.”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었는지 조경빈의 얼굴엔 단호함이 엿보인다.

“그리고 언제 한번 너희 회사 중역들과 자리 한번 마련해 줘라.”

“백두마트요?”

“아니, 백두그룹……!”

“네? 왜요?”

현수가 보자는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경빈은 눈만 크게 떴다. 이에 싱긋 웃음 짓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이번에…….”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과 내무장관을 만났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경빈과 현우는 눈을 크게 떴다.

중요한 국가사업의 결정권을 현수가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이다.

“형님! 형님이 계시는 천지그룹은 어떻게 하고요?”

“천지그룹에도 일감은 넘칠 거야. 콩고민주공화국이 후진국이긴 하지만 작은 나라는 아니거든. 다시 말해 천지그룹 혼자서 다 해먹을 수는 없을 정도야.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다른 그룹과 컨소시엄을 구성해야지. 안 그래? 지금 그 다른 그룹으로 백두를 선택한 거야.”

“혀, 형님! 이건 나중이 아니고 당장 어째야 할 일인 거 같은데요? 잠시만요. 아버지에게 전화 걸고 오겠습니다.”

경빈은 백두마트의 주인이지만 상무이사로 재직 중이다.

다시 말해 경영 수업 중이다. 그렇기에 현수가 말한 것이 얼마나 큰 무게를 가졌는지 단박에 알아들은 것이다.

현우와 둘만 남자 현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넌 우리 회사에 입사해라.”

“네? 이실리프 무역상사예요?”

“아니, 이실리프 상사가 따로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농업과 축산 등을 주관하는 사업체야. 그러니 이제 그만 놀고 입사해.”

“형님……! 알았어요. 생각 좀 해볼게요.”

“그래! 너무 질질 끌지는 마라. 마음이 정해졌는데 내가 국내에 없으면 이리로 전화해. 민 실장 찾아서 내 이야기 하면 될 거다.”

현수가 건넨 명함을 받은 현우는 그것을 세심히 들여다보았다.

이때 경빈이 들어선다.

“형님! 아버지하고 통화했는데 시간이 되면 지금 보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쪽으로 오기 조금 불편하세요. 그러니 같이 가죠.”

경빈은 백두그룹 사람들이 와야 하는데 가자고 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는 아버지 때문이다.

현수가 한 말을 거의 그대로 설명했지만 반응은 매우 시큰둥했다. 하긴 이제 겨우 20대 후반인 현수가 콩고민주공화국의 국책사업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경빈의 부친은 아직 어린 경빈이 누군가에게 사기당하고 있다 생각했다. 재벌가의 자손들에겐 이런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여 불러들였다. 백두그룹이 어떤 회사인 줄 안다면 못 올 것이다. 온다면 되지도 않는 말로 사기 친다며 혼쭐 내줄 생각인 것이다.

닳고 닳은 사람이라면 이런 뉘앙스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현수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에 선의로 받아들였다.

4장 인연 만들기

“아버님이 어디 불편하셔?”

“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있어서 잘 걷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잔머리의 대가 조경빈은 순간적으로 부친의 고질인 무릎 부위 류머티즘을 떠올린 것이다.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증상이 심한 것은 사실이다.

“어른이 그렇다면 당연히 가야지. 근데 시간이 있으시대?”

“그, 그럼요. 언제든 편한 시간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오케이, 그럼 바로 가지 뭐. 근데 현우 넌? 너도 갈래?”

“아뇨. 전 경빈이 아버지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전 빠질게요.”

“그래, 그럼! 이따 저녁 때 다시 만나자.”

“네, 크리스탈이랑 생파도 같이 부를게요. 괜찮죠?”

“그래. 이따 연락할게.”

“안녕하십니까? 김현수라 합니다.”

“오! 어서 오게. 듣자하니 경빈이하고 친하게 지낸다고?”

“네, 현우와 같이 군 생활한 게 계기가 되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그랬군. 아무튼 경빈이와 친하게 지낸다니 말을 놔도 되겠지?”

“그럼요. 저도 그게 편합니다.”

“아무튼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네. 경빈이에게 전화로 대강 이야긴 들었네. 구체적으로 다시 말해줄 수 있겠나?”

“네, 저는 천지건설에 재직 중인데…….”

현수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조경빈의 부친은 간간이 메모를 하며 경청하고 있었다.

이에 경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는 사기꾼이라며 꾸지람을 내렸었다. 그런데 그런 말은 일절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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