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286화 (286/1,307)

# 286

웨이터는 이런 손님을 많이 접했는지 별로 어렵지 않게 대처했다.

이윽고 모든 주문이 끝났다.

다음은 이연서 회장이다. 이 회장은 레스프리 피에르 가니에르를 주문했다. 별다른 주문 사항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현수는 돈을 버는 사람이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는 말이 무언지 이해했다.

이수린이 주문한 것은 부가세와 봉사료를 뺀 가격만 30만 원이다. 반면 이 회장이 주문한 메뉴는 13만 원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주문을 마친 이 회장이 현수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네도 주문을 하지. 가격에 관계없이 맛있는 걸로 주문하게.”

“네, 알겠습니다.”

현수는 상대에 대한 배려로 저렴한 것을 고를 생각이 없다. 그것도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슴없이 주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Hommage Séoul로 주세요.”

이 대목에서 먼저 주문해 놓고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이수린의 표정이 확 달라진다.

프랑스 유학을 하느라 파리에서만 5년 정도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어가 유창하지도 않고, 발음도 시원치 않다.

공부보다는 놀기와 쇼핑하기에 바빠서이다.

그런데 현수의 불어는 거의 원어민 수준이다. 그렇기에 매우 놀랍다는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주문은 이어졌다.

6장 계산은 하실 거죠?

“바닷가재는 너무 달지 않게 해주시고, 스테이크는 칼집을 너무 많이 내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참깨를 곁들인 감자볶음은 너무 으깨지 말고…….”

현수는 와인의 이름을 묻고 메뉴에 맞는 걸로 고르기까지 했다.

웨이터가 긴 주문을 받고 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때 이수린은 웬 잡놈 때문에 귀찮게 끌려왔다는 표정이었다. 7써클 대마법사인 현수는 이를 금방 눈치챘다. 아무리 둔하다 하더라도 말없이 입술만 삐죽거리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게다가 서슴없이 가장 비싼 메뉴를 골랐다. 돈이 워낙 많은 집안이기에 된장녀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그러고 보니 의복과 장신구, 그리고 액세서리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각종 로고를 보니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것으로 완전무장한 상태이다.

체면 차리기와 남들에게 돋보이기, 그리고 사치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기에 일부러 프랑스어로 주문했다.

아무튼 이수린의 눈빛은 달라져 있다. 그렇다 하여 현수에게 매료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심심하던 차에 흥미가 생겼다는 정도이다.

이때 이 회장이 한마디 한다.

“자네, 불어가 유창하군.”

“네, 콩고민주공화국의 공영어가 불어라 그렇습니다.”

현수는 겸손 떨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이때 이수린이 끼어든다.

“어디서 배운 불어죠?”

이수린의 물음에 현수는 살짝 웃어주었다.

“EBS 교육방송을 보고 배운 겁니다.”

“말도 안 돼! 거짓말! 어머……!”

이수린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주워 담으려는 표정이다. 하나 한번 내뱉은 말을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녀석, 말조심 해야지.”

“죄송해요.”

이 회장의 지적에 수린이 얼른 고개 숙인다.

물론 그 대상은 현수가 아닌 이 회장이다.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기에 그러는 것일 것이다.

“이 녀석이 내 손녀라네. 아직 남자친구가 없어. 적당한 짝이 생기면 시집보내려 하네.”

“아, 네에.”

남의 가정사에 밤 놔라 대추 놔라 할 일 없기에 얼른 맞장구쳤다.

“그런데 진짜 교육방송을 통해 불어를 익혔나?”

“네,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현수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너무도 태연자약하기에 이 회장과 이수린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치이, 그거 거짓말이죠?”

“이 녀석, 말조심하라니까.”

이 회장이 또 한 번 지적했지만 수린은 고개 숙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교육방송 강사들보다 김현수 씨 발음이 더 좋거든요. 근데 어떻게 거기서 배운 거라고 해요? 그리고 거긴 중급 회화까지만 있어요. 근데 김현수 과장님은 최상급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교육방송에서 배웠다는 건 말도 안 되죠.”

“그런 건가?”

“아닙니다. 저는 평범한데 이수린 씨가 괜한 칭찬해 주는 겁니다.”

현수는 시치미를 뗐다.

“그래?”

불어라곤 한마디도 모르는 이 회장은 누구의 말이 옳은지 모르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수린은 현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놀림 당한 기분이 든 때문이다.

재벌가의 손녀로 태어났다. 그래서 날 때부터 모든 게 풍족한 삶을 살았다. 늘 떠받들어지며 살았기에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우월하다는 느낌 속에서 생활했다.

프랑스에 유학 가서 이수린이 제대로 배우고 온 것은 불어 하나뿐이다. 전공인 경영학은 뒷전이었다.

유창한 불어는 같은 유학파 중에서도 돋보였다. 그런데 오늘 눈감고 들으면 완전한 프랑스인이라 오해할 사람이 앞에 앉아 있다.

오기 전 할아버지 비서로부터 받은 현수의 프로필을 본 바 있다.

김현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났다.

초, 중, 고 모두 평범했고, 대학도 3류대학 수학과 출신이다. 학교 다니는 내내 알바로 학비를 벌어야 했던 인물이다.

졸업 후엔 곧장 군대를 갔고 제대 후엔 아무리 봐도 수상한 과정을 거쳐 천지건설에 입사했다.

현수가 나온 대학 출신은 천지건설 입사 지원과 동시에 이력서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는 것쯤은 알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어 성적이 우수해서 뽑혔다. 그리곤 수습사원 시절을 보냈고, 정직원이 되고 얼마 후엔 병가를 냈었다.

몇 달 후, 다시 복직했지만 마땅히 보낼 곳이 없어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킨샤사 지부로 발령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 덕에 두 계급 승진과 3개월 휴가라는 전무후무한 포상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더 엄청난 공사들을 가져왔다. 결정타는 2,000㎞가 넘는 4차선 고속도로 건설 공사 수주이다.

천지건설이 창립된 이후 가장 큰 공사이다. 아니, 대한민국의 어떤 건설사도 수주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규모의 공사이다.

할아버지는 현수를 만나게 해줄 테니 살펴보라고 하셨다. 달리 표현했을 뿐 현수에게 시집가라는 뜻이다.

이쯤 되면 능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그런데 여러 모로 마음에 차지 않는다. 집안도 그렇고, 학벌도 그렇다. 생긴 것도 멀끔하기는 하지만 초절정 꽃미남은 아니다.

그래도 풍기는 분위기는 제법 괜찮다. 유일하게 합격점을 받은 게 이것이다. 이건 대마법사가 뿜어내는 아우라 때문이다.

그런데 불어를 기가 막히게 잘 한다. 아무리 연습해도 따라 하기 힘든 미묘한 부분까지 완벽한 불어이다.

하여 생각을 이으려는데 웨이터가 들어온다.

조용한 식사가 계속되었다. 이 회장은 밥 먹을 때 떠드는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인도 말하지 않았고, 수린도 먹기만 했다. 현수는 당연히 할 말이 없기에 음식을 즐겼다.

간간히 웨이터에게 음식에 대해 묻기도 한다.

수린은 이 사내 제법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이 나오자 드디어 이 회장이 입을 연다.

“회사에서 조만간 포상을 할 걸세.”

“어머, 그럼 또 승진하는 거예요? 전에 두 계급이나 올랐다면서요.”

“당연하지! 회사에 큰 이익을 주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포상을 해야지. 그런데 특별히 배속되고 싶은 부서가 있나?”

“네? 아, 아닙니다. 전 지금도 괜찮습니다.”

“할아버지, 그룹 전략기획실은 어때요?”

천지그룹 회장인 이연서 회장 직속 기관 중 수린이 언급한 전략기획실이라는 부서가 있다.

그룹을 총괄하는 각종 아이디어를 생산해 내고, 진취적으로 실행까지 시키는 곳이다.

이곳에 배속되는 것은 임원까지 고속 승진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천지그룹 계열사 직원들은 모두 이곳에 들기를 바란다.

강연희에게 들이대던 박진영 기획3팀장 역시 전략기획실로의 전출을 오매불망 바라고 있다.

천지건설 전무의 아들이지만 빽으로도 갈 수 없어 좌절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수린이 전략기획실로의 발령을 언급한 것이다.

“자네가 원한다면 전략기획실에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아, 아닙니다. 전, 천지건설이 좋습니다. 그리고 해외영업부에 있는 것도 좋구요. 될 수 있으면 발령 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흐음, 그런가?”

남들 같으면 얼씨구나 하면서 받아들일 제안을 절대 아니라며 펄쩍 뛰는 모습에 이 회장의 시선이 묘해진다.

‘이 녀석, 뭐야? 바보인 거야? 아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전략기획실이 어떤 곳인데.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러는 거겠지? 아닌가?’

“어머, 왜 전략기획실을 마다해요? 거기로 가면 연봉도 왕창 오르고 승진도 쑥쑥 되는데.”

수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황금 덩어리를 줬는데 걷어차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전략기획실이 아무리 좋아도 전 천지건설에 남겠습니다. 그러니 발령 내지 말아 주십시오. 회장님!”

“흐음, 자네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러지.”

“감사합니다.”

현수가 한 시름 돌렸다는 듯 얼른 고개 숙여 절을 하자 이 회장의 눈빛이 달라진다.

‘이놈, 진국이라 그런 건가? 아님 조금 모자란 건가? 흐음, 회사 일 하는 거 보면 모자란 것은 아닌 것 같고……. 남 칭찬 안 하는 거에 인색한 수린이 녀석이 불어도 잘 한다 하니 쓸 만한 녀석인 거 같은데.’

현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스케줄이 있어 이만 가야 하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젊은 사람들끼리 이야길 나누게.”

“네……?”

“우리 수린이 잘 부탁하네.”

“……!”

“할아버지 여기 계산은 하고 가실 거죠?”

“하하, 그럼! 배가 고프면 더 먹어도 된다.”

“치이, 손녀 돼지 되는 거 보고 싶으세요?”

“하하, 아니다. 자, 그럼 난 이만 간다.”

“네에.”

현수가 뭐라 하기도 전에 이 회장이 사라졌다. 오늘 처음 만난 둘만 남게 되자 한동안 어색한 분위기였다. 하여 한동안 조용했다.

딱히 할 말이 없기에 둘 다 입을 닫은 탓이다. 하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수린이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현수 씨, 진짜로 말해주세요. 프랑스 유학 다녀왔죠?”

“아뇨. 아닙니다.”

“그럼 프랑스 여자가 애인이었어요?”

“네에? 하하, 아닙니다. 애인이라니요.”

대답을 하는 순간 현수의 뇌리로 두 여인이 스친다. 강연희와 권지현이다. 그런데 애인이라 칭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연희에게선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고, 지현에겐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둘 중 누군가를 골라 본격적인 교제가 시작되어야 애인이라 생각하기에 본인은 애인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 수린이 눈빛을 반짝이며 묻는다.

“그럼 여자친구는 있으세요?”

“여자친구요? 네, 있습니다.”

이런 대답을 한 이유는 수린이 무슨 뜻으로 묻는지 알기에 거짓이지만 선을 그은 것이다.

“……!”

현수의 똑 부러진 대답에 수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없다고 하면 관심 가는데 한번 만나보자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분과 결혼을 약속하셨나요?”

“아뇨, 아직 그건 아닙니다.”

“호호, 그럼 됐네요.”

“네……?”

수린의 말과 웃음이 무슨 뜻인지를 가늠할 수 없던 반문이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기분도 꿀꿀한데 2차 어때요?”

“꿀꿀……. 2차요?”

“네, 이 호텔 바가 괜찮아요. 성인들끼리 만났으니 간단한 한잔 어떨까요?”

“한잔이요?”

“아! 잠깐만요. 전화가 왔어요.”

수린은 현수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응? 그래. 여기? 롯데호텔 신관 35층. 할아버지 회사 직원분이랑 같이 있어. 아니, 조금 있다 피에르 바로 자리를 옮길 거야. 온다고? 왜? 안 오면 안 돼? 알았어.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하셔. 알았어. 응, 응! 그럼 술값은 네가 내는 거다.”

전화를 끊은 수린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갑자기 사촌한테 전화가 와서요. 제가 현수 씨랑 같이 있다고 하니까 꼭 와서 봐야 한다고 하네요.”

“그래요?”

“와서 술값 내준다고 하네요. 와도 되죠?”

하여간 제멋대로이다. 같이 있는 현수의 의사 따윈 소용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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