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287화 (287/1,307)

# 287

현수는 대답 대신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다. 특별한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회장에 대한 예의도 아니기에 일단 2차까지는 같이 있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호호! 좋아요. 그럼 자리를 옮길까요?”

잠시 후 둘은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다. 주로 현수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했던 일에 대한 것이다.

일종의 무용담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그렇게 30여 분쯤 지났을 때 누군가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선다. 수린이 먼저 보았는지 손을 들어 흔든다.

“아! 여기야, 여기!”

이 순간, 현수가 고개 들어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라……!”

“어, 형님……!”

놀랍게도 들어선 사내는 현수의 군대 후임인 이현우였다.

“어머, 둘이 아는 사이였어요?”

“형님, 형님이 어떻게 여길……?”

“현우야! 그냥 편하게 말해. 네가 너무 깍듯하게 하니까 좀 그렇다.”

“아, 네. 형! 그건 그렇고 수린아, 아까 네가 말했던 사람이 현수 형이었어?”

“응……? 으, 으응. 근데 둘이 어떻게 알아?”

“현수 형은 군에 있을 때 내 선임이야. 그리고 지금은 내 멘탈의 지도자이지. 하하, 형을 이런 자리에서 만날 줄이야.”

“그러게, 나도 신기하다. 근데 수린 씨와 넌 어떤 관계야? 사촌이라고 들었는데.”

“형, 수린인 작은 아버지 딸이에요. 그러니까 고종사촌이죠.”

“그럼, 너…….”

이수린이 작은 아버지의 딸이라면 현우는 수린의 큰 아버지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건 천지그룹 창업주인 이연서 회장의 장남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현우가 장남이라면 이연서 회장의 장손이 된다.

“미안해, 형. 일부러 말 안 한 거야. 날 멀리할까 봐.”

현수는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현우야, 그럼 네가 이연서 회장님의 손자인 거야?”

“응, 천지그룹 이연서 회장님의 장남이 아버지야. 난 그 아버지의 장남이구.”

장차 천지그룹을 물려받을 확률이 매우 높은 녀석이라는 뜻이다.

“끄으응……!”

재벌의 손자이건만 평범한 청년과 전혀 다를 바 없었기에 감쪽같이 속았다는 것을 확인한 현수는 침음을 냈다.

이때 수린이 끼어든다.

“가만……. 그럼 오빠에게 이수정 씨를 소개시켜 준 사람이 그럼 현수 씨인 거야?”

“그래. 덕분에 경빈이 녀석이 수연 씨와 인연이 된 거지.”

“세상에, 맙소사……! 그럼 전에 이수정 씨 남자친구라고 언론에 발표되었던 사람도 현수 씨인 거야?”

“그래. 근데 넌 어떻게 형하고 만난 거니?”

둘은 동갑이기에 말을 놓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한번 만나보라고 하셔서.”

“설마 진지한 만남……?”

“응! 날 시집보내려 하셨나 봐.”

“아이구, 두야……! 하필이면…….”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던 현우가 시선을 돌린다.

“형, 설마 얘가 마음에 든 건 아니지?”

“응……? 그건 왜?”

“얘가 형하고 어떻게 되면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잖아. 그건 안 돼! 절대 안 돼. 알지?”

“어머, 야! 이현우, 왜 내가 너한테 형수님 소리 들으면 안 돼? 우리 동갑이잖아. 내가 설마 나보다 어린 남자랑 결혼할 거라 생각했어?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 우리보다 나이가 많잖아. 그럼 형수가 되는 거잖아.”

“야! 네가 결혼하면 그 남자는 내게 매제야, 매제! 내 생일이 너보다 열흘 빠르다는 거 잊었어?”

“그, 그게…….”

수린이 대꾸하기도 전에 현우의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현수 형하고 결혼하면 내가 못 그러잖아. 형! 형한테 다른 애인 있잖아. 그러니 애한테 신경 쓰지 마.”

“……!”

앙숙 같아 보이지만 사실을 매우 친한 사촌남매의 말다툼에 현수는 빙그레 웃음만 지어 보였다.

“야, 이수린! 할아버지한텐 네가 차였다고 해. 알았지?”

“어머, 내가 왜?”

“그럼 내 멘탈의 지도자인 형이 너 따위에게 채여야겠냐?”

“어머, 어머……!”

“하여간 형한테 신경 끊어라. 이 형 애인 엄청난 미인이니까.”

“미인……?”

“하여간 그런 분이 계셔.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부로 신경 딱 끊어. 이건 오빠로서 하는 말이야.”

“치이, 오빠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수린은 현수의 얼굴을 힐끔 바라본다. 그 순간 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 확 돋는다.

“어쭈, 시선 안 돌려? 내가 형한테 관심 끊으라고 했지?”

“어머, 내가 뭘 어쩌든 네가 웬 참견인데?”

“야! 내 하나밖에 없는 형이야. 경빈이도 형한테 무한 존경을 보내는 중이야. 네가 감당할 분이 아니니 신경 끊어라.”

“……!”

수린은 호기심이 더욱 왕성하게 샘솟음을 느꼈다. 깐깐한 현우와 오만한 경빈이 무한존경을 하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형, 얘 보내고 우리끼리 뭉치는 거 어때? 경빈이도 부르기만 하면 총알처럼 올 건데.”

“야! 그래도 그렇지 회장님이 소개해 주셨는데 수린 씨는 어떻게…….”

“치이, 갈게요. 사내들끼리 진탕 마시든지 말든지.”

그 사이에 삐친 수린이 핸드백을 든다.

“고맙다, 이수린! 내가 꼭 괜찮은 놈을 찾아서 대령할게. 알았지? 그러니 할아버지에겐 잘 말씀드려 줘.”

“알았어. 현수 씨,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 네에. 저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네, 다음에 봬요.”

“야! 이수린. 네가 왜 형을 다음에 또 봐?”

“너 장가갈 때 현수 씨 안 오셔? 그럼 너 결혼할 때도 나는 가지 말란 말이야?”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알았어, 미안해.”

“치이, 말로만……! 아무튼 저 가요.”

“네, 살펴 가십시오.”

현수의 배웅을 받으며 수린이 갔다. 현수는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이다. 어른이 소개해 준 아가씨이기에 심히 부담되었던 것이다.

“그래, 얼른 와!”

현수가 자리로 되돌아오자 현우가 환히 웃는다.

“형, 경빈이한테 전화했더니 금방 온대.”

“그래. 알았다.”

자리에 털썩 앉은 현수는 현우를 힐끔 바라보았다.

“왜 속였냐? 아니, 왜 말 안 했냐?”

“형이 내게 거리감을 느낄까 봐 그랬어. 적당한 시간에 말하려 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고. 미안해, 형!”

“아니다. 그건 됐어! 근데 이거 하나 물어보자.”

“뭔데?”

“너, 내가 천지건설에 입사 지원 했을 때 힘 좀 썼냐? 솔직히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게 말이지……!”

현우의 말이 이어졌다.

현수가 천지건설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한 날은 원서 접수 마지막 날이었다. 이날 현우는 인사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수의 지원서가 서류전형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관행대로 했으면 현수는 필기시험조차 치를 자격을 부여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사부장은 미래의 주인이 될 현우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특별한 부정이 아니다. 다시 말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기에 받아들인 것이다.

그 결과 현수는 필기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얻었다.

그날 현우는 인사부장에게 재차 전화를 걸었다. 영어 성적이 수준 이하일지라도 턱걸이 합격을 시켜 면접까지 보게 해달라는 것이다.

휴가 나와 우연히 만났을 때 현수는 이미 상당히 많은 곳에 입사 지원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면접본 걸 따져 보면 손으로 꼽을 정도라 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길 면접이라도 봐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걸 기억하기에 현우가 청탁 전화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시험 문제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 중 한 대목이 지문으로 나왔다.

곳곳이 빈칸이고, 몇몇은 빈 줄이다. 여기에 적합한 내용을 써서 채워 넣는 것이 문제였다.

이 시험을 치르기 얼마 전 현수는 영문과 대학생의 과제를 대신해 준 적이 있다.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한 일이다.

영어 실력이 일천했기에 일일이 사전을 찾아가며 문장을 해석했고, 그에 대한 감상도 영어로 썼다.

그 덕에 어렵지 않게 빈칸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시험 결과는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필기시험 합격이었다.

다시 말해 현우의 청탁이 없었어도 합격이다. 하지만 현우는 이런 사실을 모른다. 인사부장이 힘써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면접시험을 보게 된 날 인사부장은 또 전화를 받았다. 웬만하면 현수를 합격시키라는 내용이다.

이날 면접관이 현수에게 물었다.

“김현수 씨는 이력서를 보니 수학과 출신입니다. 우리 회사랑은 어울리지 않는 전공인데 어떻게 지원한 겁니까?”

“천지건설은 천지그룹 산하의 계열사입니다. 그리고 천지그룹은 국내 굴지의 재벌로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지요?”

이때 면접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면접자들도 동석한 자리인지라 아니라고 하면 안 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천지그룹은 이익의 사회 환원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물론 이연서 회장의 품성 때문이다.

이때 현수의 발언이 이어졌다.

“저는 천지건설에 입사하여 더 많은 이익이 창출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지건설이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바를 지켜보고 싶습니다. 제게 있어 천지건설은 오로지 기업 이익에만 눈 먼 재벌과는 차별되어 보입니다. 면접관님! 그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현수의 발언이 끝나자 면접관은 평점으로 C를 주었다. 다른 지원자들이 하는 말과 약간 다르기는 했지만 특장점이 없었던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수는 합격했다.

최종심사 때에는 출신 학교를 보지 않기 때문이고, 워낙 영어 성적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입사가 결정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현우는 인사부장에게 또 다시 청탁했다. 되도록 학력 빵빵한 사람들 틈에 끼워 넣지 말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회사 생활을 하라는 뜻이다.

이에 인사부장은 현우에게 물었다. 대체 현수가 누구이기에 이런 배려를 하냐는 것이다.

현우는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청을 받아줘 고맙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인사부장 입장에선 처음에 서류전형을 통과시켜 준 것 이외엔 특별히 힘써 준 것이 없다. 그럼에도 가장 유력한 후계자의 호감을 샀기에 지금껏 비밀을 지켜준 것이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현수는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그래서 내가 입사할 수 있었던 거였어? 나, 낙하산이구나?”

“그게 그렇게 되나? 하지만 형이 입사하는 바람에 회사가 아주 큰 이익을 봤으니 내가 잘 한 거잖아. 안 그래?”

그러고 보니 모든 게 현우의 덕이다.

천지건설에 입사하지 못 했으면 등산을 다니지 않았다.

그럼 전능의 팔찌를 줍지도 못했다. 아르센 대륙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고, 킨샤사 지사로의 발령도 없었을 것이다.

“고맙다. 네 덕이었구나.”

“아이구, 형! 그럼 말 말아. 요즘은 형이 최고라면서? 어제 얘기 들었어. 이번에 엄청나게 큰 공사를 또 땄다면서?”

“큰 공사?”

“응, 엄청난 공사.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데 최소 40조 원짜리 공사라면서? 그거 확정되면 천지건설이 대한민국 최고의 건설사가 된다고 하셨어. 맞지?”

“으음, 그 공사가 확정되기만 하면 현재의 1등인 현대건설의 네 배가 넘는 초대형 건설사가 되겠지.”

“으와! 정말 대단해. 내가 합격시키라고 말하길 정말 잘했네.”

“끄으응……!”

“헤헤, 그러니까 내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현우는 부러 재롱을 떨었다.

“아냐,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그런 의미로 오늘 술은 내가 산다.”

“정말? 실컷 마셔도 되지?”

“그래. 허리띠 풀어놓고 마셔도 된다.”

현수는 현우에게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려던 생각을 접었다. 재벌 후계자를 어찌 밑에 데리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 경빈이 말고 수정 씨랑 수연 씨도 불러도 돼?”

“수정 씨와 수연 씨를? 니들 쌍쌍파티 하려고?”

“형도 불러. 없으면 수린이라도 부를까?”

“아이고, 아니다.”

잠시 후, 경빈이 당도했다. 수정은 비행 중이라 올 수 없고, 수연은 CF 촬영 중이라 오지 못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셋은 취할 때까지 마셨다.

짹, 짹, 짹!

“하암……! 끄으응!”

이른 아침에 깨어난 현수는 하품을 하곤, 기지개를 켜서 찌뿌드드한 몸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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