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시계를 보니 오전 7시이다. 서둘러 세면을 하곤 어머니가 끓여주신 해장국을 먹었다.
“에구, 이 녀석아! 너무 술만 마시지 말고 운동 좀 해.”
“네, 어머니!”
“길 다닐 땐 차 조심하고.”
“네에, 그럴게요.”
“혹시 사귀는 아가씨는 없니? 너도 이제 장가갈 나이가 되었잖아.”
“아직 없어요.”
“아가씨 생기면 바로 데리고 와라. 웬만하면 찬성해 줄 테니.”
“네, 어머니!”
현수는 불과 5분 만에 식사를 마쳤다. 그리곤 서둘러 나왔다.
나도 그렇고 네 아버지도 그렇고 이젠 손자랑 손녀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탄 현수는 지하철역까지 가는 동안 상념에 잠겨 있었다. 권지현의 부모님이 조만간 상견례를 하고 날을 잡자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난 때문이다.
‘연희 씨는 귀국했나? 그걸 안 알아봤네.’
권지현을 생각하면 자동으로 강연희가 생각난다. 강연희를 보고 있으면 권지현이 생각났다.
현수는 마음이 심란했기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때 택시기사가 라디오의 채널을 바꿨다. 시사문제들을 대담하는 프로그램이다.
“어제 정부는 일본 교과서에 기록된 일본해와 죽도라는 명칭을 동해와 독도로 수정할 것을 요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일고의 여지가 없다면서 수정을 거부했다는 소식입니다. 이에 대해 시민논객 여러분들과 대담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합정동에 사시는 김소연 씨에게 여쭙겠습니다. 김소연 씨는…….”
사회자가 시민논객의 의사를 물으려는데 기사는 이런 것에 관심이 없는지 다이얼을 돌리려 했다.
“잠깐만요. 아저씨! 방금 전의 그 방송 조금만 더 듣죠.”
“네? 아, 네에.”
다시 원래의 방송으로 돌아왔더니 잔뜩 열 받은 여자의 음성이 들린다. 그걸 요약하면 일본에 대한 성토이다.
“아저씨도 저렇게 생각하세요?”
기사는 대꾸 대신 현수에게 반문했다.
“아까 왜 다이얼을 돌렸는지 아세요?”
“왜요?”
“우리끼리 떠들어봐야 변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쪽발이들 저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네에, 그렇죠.”
“바다가 사이에 없다면 전쟁이라도 해서 다 때려죽여야 속이 시원할 겁니다. 근데 이런 거나 듣고 있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 들으려 한 겁니다.”
“아! 그러셨구나.”
현수의 맞장구에 기사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마디 더 한다.
“전엔 아주 기분이 좋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네? 언제요?”
“아, 거 있잖아요. 일본 천황이라는 쥐 같은 새끼가 살던 집 무너진 거 말이에요.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가 홀라당 타버린 거 하고요.”
“아! 그거요?”
“그 소식 듣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던지. 그날은 손님들에게 차비 안 받았습니다.”
“네……? 왜요?”
“쪽발이들이 그간 저지른 죄 값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서 그랬지요. 그랬다가 마누라에게 바가지만 박박 긁혔습니다. 하하하!”
“그러셨군요. 저도 기분이 좋네요.”
현수와 택시기사는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출근시간인지라 길이 꽉 막혀 있었기에 대화는 제법 길었다.
7장 신의 김현수!
운전기사는 많은 배우진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역사관 하나는 제대로 박혀 있는 듯하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전사해서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자 따로 공부했다고 한다.
기사의 바람은 우리나라의 자립이다.
미국의 도움 없이 일본, 지나, 러시아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이 제 목소리를 내는 당당한 국가로 발돋움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나 놈들의 동북공정도 박살 내야 한다면서 거품을 물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인지라 현수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야기 즐거웠습니다. 아, 그리고 잔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수고하십시오.”
쿵―!
현수가 낸 돈은 요금의 두 배 정도 된다. 그래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가 무너지던 날 요금을 안 받았으니 오늘은 두 배로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생각한 것이다.
전철을 타고 김포공항역까지 가는 동안 현수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마법을 어떻게 무기체계에 접목시키는가를 고심한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윤 소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네, 반갑습니다.”
“차에 타시죠.”
“네.”
윤 소령은 흔쾌히 치료해 준다 하여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현수는 치사할 것 같아 꾹 참고 있던 말을 꺼냈다.
“윤 소령님, 제가 건 조건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조건이라면 항공, 유도 무기체계 팀장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거 말입니까?”
“네.”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너무 쉽게 대답한다. 하여 한참 동안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중요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꼭 소개해 주십시오.”
“하하, 걱정 말래두요. 반드시 소개해 드릴 겁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뭘……!”
자동차는 한참이나 뻥 뚫린 길을 달렸다. 새로 조성된 도로라 그런지 노면상태는 아주 좋았다. 그러던 중 작은 교량 부근에서 잠시 정차하는 시간이 있었다.
무심코 내다보니 도로공사를 맡은 회사가 천지건설이다. 이때부터는 노면으로부터의 느낌에 정신을 집중했다.
킨샤사로부터 비날리아 지역까지 장장 2,000여㎞나 되는 고속도로 공사를 하여야 하기에 시공품질을 알아보려던 것이다.
결과는 합격이다. 육안으로 확인한 것이지만 노면상태도 양호했다.
‘흐음, 이 정도면 나중에라도 욕은 먹지 않겠구나.’
현수는 천지건설에 대한 신뢰감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김포공항역으로부터 1시간 정도 달렸을 때 차가 우회전을 한다. 그리곤 10여 분을 더 달렸다.
“자아, 다 왔습니다.”
입 다문 채 운전만 몰두하던 윤 소령의 말에 전면을 살폈다. 멀지 않은 곳에 아주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의 전원주택이 보인다.
“저긴가요?”
“아뇨, 조금 더 들어가야 합니다.”
예상 외의 대답이었으나 차는 오래지 않아 멈췄다. 조금 전에 보았던 전원주택은 아주 잘 관리된 집이다.
반면 눈앞의 집은 예쁘게 지어지긴 했으나 관리가 허술한 듯하다. 마당엔 잡초가 나 있고, 조경수들은 제멋대로 자라 있다.
삐이잉―!
“누구세요?”
“사모님, 저 윤 소령입니다.”
“아, 어서 오세요.”
덜컹―!
문이 열리자 윤 소령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현수는 그 뒤를 따르며 집과 마당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관리만 잘 하면 아까 그 집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환자가 있어서 그러나?’
아픈 자식이 있는데 어찌 마당 돌볼 시간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윤 소령님,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요.”
“네, 사모님!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니에요. 얼마나 바쁜지 제가 다 아는걸요. 이분이 그분이신가요?”
“네, 윤준이를 치료해 줄 사람입니다.”
윤 소령의 손짓에 현수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김현수라고 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셔서……. 저는 윤준이 에미 되는 강소현이에요.”
“네에.”
“그이와 윤준인 저 방에 있어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이번에도 현수는 윤 소령의 뒤를 따라갔다.
똑, 똑, 똑!
“팀장님! 저 윤강혁입니다. 김현수 사장님 모시고 왔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50대 중반쯤 된 사내가 튀어나온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너무 많아 잘못 보면 60∼70대라 볼 수도 있는 인물이다.
벌컥―!
“이분이셔?”
“네, 팀장님!”
“어서 오십시오. 최희문입니다.”
“네, 김현수라 합니다.”
“멀리까지 오시라 하여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환자가 우선이죠. 그나저나 환자는 안에 있나요?”
“네, 방금 잠 들었습니다.”
“그래요? 일단 한번 보죠.”
현수의 말에 최희문이 옆으로 비켜선다.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침대 위에 잠든 청년이 보인다. 휘휘 둘러보니 청년의 방인 듯하다.
침대 이외에도 책상과 옷장, 그리고 컴퓨터 등이 보인다.
책상이 접해 있는 벽면에는 일곱 장의 종이가 비닐에 싸인 채 부착되어 있다. 살펴보니 장학증서이다.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물리 전공? 공부를 엄청 잘했나 보네.”
뒤따라 들어온 최희문은 윤강혁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정말 저 청년이 중중근무력증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냐는 뜻이다. 그러기엔 너무 젊다. 이제 겨우 25세로 보인다. 침대에 누워 있는 최윤준과 비슷한 나이이다.
게다가 중증근무력증은 병원에서 포기한 병이다. 그런데 덜렁 가방 하나 들고 왔으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이때 환자의 모친이 주스를 들고 들어온다.
“먼 길 오시느라 목이 마를 테니 이것 먼저 드세요.”
“아, 네에. 고맙습니다.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겠습니까? 환자를 보려면 고도의 집중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네, 그러지요.”
모두들 순순히 물러났다. 현수가 아니면 치료할 수 없는 병이다. 병원에선 이미 포기했으니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
그렇기에 시키는 대로 나간 것이다.
딸깍―!
현수는 문을 잠갔다. 그리곤 주스 한 모금을 들이키며 환자를 살펴보았다.
‘흐음, 앞길이 구만리 같은 녀석인데……. 어디 한번 볼까?’
이불을 걷고 손목을 잡았다.
“슬립! 마나 디텍션!”
명령이 떨어지자 현수의 마나가 윤준의 몸속으로 파고든다. 민윤서 사장의 부인 윤영지와 거의 유사한 보고가 올라온다.
현수는 가방 속의 플라스크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윤준의 입에 그것을 흘려 넣었다. 마법에 의해 잠이 든 상황인지라 현수가 목울대를 부드럽게 만져서 넘기도록 하였다.
다음은 환자의 복부에 손을 내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나여, 모든 것을 원상으로 회복시켜라.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서늘한 푸른빛 마나가 윤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윤준의 체내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몸을 망가뜨려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세력과 모든 것을 원상으로 회복시키려는 연합군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처음엔 대등했다. 하지만 현수의 장심으로부터 마나가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기에 연합군이 점차 승세를 잡아간다.
그렇게 십여 분이 흘렀다.
“휴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현수는 숨을 고르곤 다시 중얼거렸다.
“마나 디텍션!”
이번에도 소리없이 마나가 스며들어 윤준의 몸 전체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어라, 이건……?”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생겨 정신을 집중했다. 윤준의 췌장 부근에서 강렬한 저항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췌장암인가? 거의 말기까지 간 것 같군. 그렇다면 한 번 더!’
“마나여, 모든 것을 원상으로…….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이번엔 췌장이 있는 부위에 손을 대고 마법을 구현시켰다. 그와 거의 동시에 강렬했던 저항이 점차 무뎌진다.
생명을 갉아먹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암세포이다.
하지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회복력을 지닌 마나의 힘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동안 빠져나가던 마나의 흐름이 끊기자 다시 한 번 신체를 점검했다. 계속해서 거의 다 회복되어 가고 있음이라는 보고가 올라온다.
“휴우……!”
아직 발휘되지 않은 회복 포션이 작용하면 소소한 것들은 모두 정리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잠시 눈을 감고 체내의 마나량을 점검했다. 제법 많이 빠져나갔지만 여유는 있다.
너무 일찍 나가도 그렇기에 대략 20여 분을 더 앉아서 쉬었다.
딸깍―!
문이 열리자 세 쌍의 시선이 꽂힌다.
“서, 선생님! 어떻게…….”
가장 먼저 강소현 여사가 묻는다.
“다행히 차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그래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흐흑!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흐흐흑!”
“고맙습니다.”
강소현 여사가 무너지듯 남편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흘릴 때 최희문이 무뚝뚝하면서도 진심 담긴 말을 한다.
윤강혁 소령은 정말 치료가 잘 된 것이냐며 보고만 있을 뿐이다.
“지금은 잠들어 있습니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는 그냥 놔둬야 합니다. 그러니 환자는 잠시 후에 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