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
“네……?”
“애비 말도 안 듣는 놈을 뭐하러 먹여 살리느냐? 말 안 듣고 끝까지 뻗대면 호적에서 팔 테니 그리 알아!”
“아버지……!”
“김 전무에겐 내가 말해 놓을 테니 지원해. 그리고 가서 배워. 하나에서 열까지! 남들과 뭐가 다른지 파악하란 말이야. 알았어?”
“네에.”
박진영 과장은 힘없는 음성으로 대답을 했다. 회사 일도 회사 일이지만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을 유산도 꽤 된다. 말 안 듣고 개기다가 미운털 배기면 누나와 동생 좋은 일만 하게 된다.
그렇기에 할 수 없이 대답한 것이다. 포기하기엔 너무 많고, 돈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박 과장은 중학교 3학년 때 가출을 한 적이 있다. 성적이 조금 떨어졌는데 너무 심하게 혼을 냈기 때문이다.
처음 며칠간은 친구들 집에서 보냈다. 그런데 진영이 가출한 것을 알게 된 친구의 어머니는 집으로 가라면서 내보냈다.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거의 모두 바캉스를 떠나 서울에 없었다.
배가 고팠지만 돈이 없어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당연히 잘 곳도 없다. 결국 동네 야산에 조성된 공원으로 향했다.
목이 말라 약수터까지 가서 물을 마셨다. 그리곤 인근 벤치에서 밤을 보냈다. 이날 밤 진영은 모기 회식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건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다음 날, 온몸에 모기 물린 흔적을 지닌 채 귀가했고, 또 한 번 혼났다. 그리고 그날 이후 다시는 가출하지 않았다.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돈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지 나름 처절하게 체험한 것이다.
그렇기에 내키지 않지만 기획영업단에 지원하겠다고 한 것이다.
부우우웅! 부우우우웅―!
회사를 나서는 현수의 전화가 진동을 한다.
“여보세요.”
“김 전무? 날세, 박준태 전무!”
“아! 네에. 박 전무님. 어쩐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자네 혹시 내 아들놈 아나?”
“네? 아드님이라니요?”
“기획3팀장으로 있는 박진영 과장, 그 녀석이 내 아들이네.”
“아, 네에. 그랬군요.”
이미 회사에 파다하게 소문난 인물이지만 현수는 박진영 과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일부러 모른 척한 것이다.
“그 녀석이 기획영업단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네. 지원하면 받아줄 수 있겠나?”
“네……? 박 과장님이 제 부서로 오고 싶어 한다고요?”
“그렇네. 자네 밑에서 일을 배우고 싶다고 간청을 하더군. 그러니 웬만하면 내치지 말고 받아주시게.”
“아! 그렇습니까?”
현수는 껄끄럽고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거절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본인이 싫다면 그만이기에 슬쩍 찔러보았다.
“근데 박 과장님이 혹시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아!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일 배우고 싶다는 것이니까 김 전무가 혹독하게 훈련 좀 시켜주게.”
“정말 그래도 됩니까?”
“그럼, 킨샤사로 보내도 되니 어디든 김 전무가 가는 곳에 따라붙도록 해주시게.”
“끄응!”
피할 방도가 없고, 거절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상대는 기업주와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이다.
신형섭 사장이 물러나면 후임 사장이 될 사람으로 유력하다.
현재에도 실세 중의 실세이다. 신임 전무이사가 된 현수는 업무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지라 승낙할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기획영업단 사무실이 다 갖춰지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내 아들이라 생각지 말고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도록 교육시켜 주게.”
“네에.”
전화를 끊었는데 몹시 찜찜하다.
박진영 과장은 껄끄럽다. 자재과에 있을 때 수시로 불러들여 온갖 횡포를 다 부렸으니 대하는 것 자체가 싫다.
강연희 대리도 몹시 싫어한다. 등산을 다닐 때 박 과장의 잘난 척과 느끼함, 분위기 파악 못하는 저돌적인 대시 등등이 싫다고 했다.
그런데 할 수 없이 데리고 있어야 하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현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흐으음……!”
방법은 두 가지이다.
박 과장을 기획영업단에 불러놓고 연희를 수행비서 삼으면 된다.
둘은 늘 외출 중인 상태가 되고, 박 과장은 사무실이나 지키는 강아지가 되는 것이다. 가만 놔두면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니 온갖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나 시키면 될 것이다.
이 경우엔 안팎으로부터 쏟아지는 눈초리를 감수해야 한다.
전무이사가 되더니 천지건설 최고의 미녀를 낚았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본인은 감수할 수 있지만 연희에겐 추문처럼 들릴 것이다.
다음은 박 과장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모든 게 열악한 그곳에서 현장 경험을 익히게 한다는 핑계로 고생시킨다. 이러면 과거의 악연에 대한 후련함을 느낄지 모른다.
반면 연희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에이, 하필이면…….”
현수는 박준태 전무가 미워졌다.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를 내주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어휴, 머리 아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현수는 이실리프 무역상사로 향했다.
“어머, 사장님, 오셨어요?”
“네. 회사에 별일 없죠?”
“아뇨, 별일 있어요.”
“네? 무슨 사고라도……?”
“아뇨. 이것 때문에요.”
이은정 실장이 내민 것은 신문이다.
시선을 고정시켜 보니 경제면에 대서특필된 글귀가 보인다.
천지건설 김현수 전무이사가 쓰는 직장인의 신화!
단번에 5계급 특별 승진!
100억 원의 포상금!
연봉 60억 원, 60세 정년까지 보장!
이제 겨우 29세인 천지건설 김현수 전무이사는 2년 전 입사하여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김 전무는 자재과를 떠나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 지사로 부임하여…….
큰 활자 아래 작은 글씨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워낙 센세이션한 일이라 그런지 경제면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다.
누가 말해줬는지 알 수 없지만 잉가댐 건설공사 수주와 킨샤사―비날리아 간 고속도로 공사 등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쓰여 있다.
이밖에도 이실리프 무역상사의 대표이사라는 것과 이실리프 상사의 주인이라는 내용도 있다.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잠자코 기다리던 이은정 실장이 입을 연다.
“아침부터 신문사 기자들이 와서 죽치고 있었어요. 사장님을 취재해야 한다면서요.”
“기자들이요?”
“네. 방송국 기자, 신문 기자, 잡지사 기자 등등이었어요. 한 100명쯤 온 것 같았어요.”
“아무도 없던데요?”
“누군가 사장님이 천지건설 본사에 있다고 하여 모조리 그쪽으로 갔어요. 조금 전에.”
“후후, 다행이군요. 이거 이외엔 다른 일 없죠?”
“네. 참! 그거 어떻게 되었어요?”
“뭐요? 아, 다이어트 보조제요?”
“네, 그게 떨어지니까 불안해요. 다시 살찔까 봐 무서워서 밥도 제대로 못 먹어요.”
“잠시 기다려 봐요.”
말을 마친 현수는 사장실로 들어가 쉐리엔 분말을 꺼내 캡슐에 담았다. 민윤서 사장과 통화했을 때 들어보니 식사 후 캡슐 하나만 복용하면 된다고 하기에 과용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띠리리링∼!
“네, 사장님.”
“이 실장님. 안으로 들어오세요.”
“네,”
현수는 이 실장에게 한 달치를 꺼내주었다. 김수진과 이지혜의 것도 같이 주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뭘요. 언제든 떨어지면 이야기하세요. 그리고 이건 조만간 대한약품에서 정식으로 발매될 거예요. 그때가 되면 대한약품에서 매달 상품을 보내줄 거예요.”
“고맙습니다. 사장님! 참, 조금 있다 기자들이 들이닥칠지 몰라요. 조금 전에 사장님 여기 계시냐면서 전화 왔었거든요.”
“흐음, 쉬게 내버려 두질 않는군요. 알았습니다. 외출하죠.”
단 하루 만에 현수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혼여성들이 결혼하고 싶은 남자 1위에 등극하였다.
이러니 기자들이 쫓아다닐 만하다.
금융권에서도 눈독을 들인다. 하여 아침부터 국민은행과 우리은행 사람들이 이실리프 무역상사를 왔다가 간 바 있다.
8장 에고, 갈 곳이 없네!
“에구……. 어딜 가지? 집에나 갈까?”
사무실을 나서 집으로 향하던 현수는 택시기사로 하여금 목적지를 지나치도록 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언론사 차들이 무질서하게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본 직후에 한 말이다.
“끄으응! 회사 앞에서도 진을 치고 있겠지?”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진 현수는 침음만 냈다.
“골치 아프군! 이런 땐 휴가가 최고지.”
현수는 적당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아르센 대륙으로의 여행을 떠났다.
“마나여, 나를 아르센 대륙으로…….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스러졌다.
2013년 9월 11일 수요일 오후에 빚어진 일이다.
* * *
“흐으음!”
아르센 대륙의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담았던 현수는 날숨을 내쉬며 웃음 지었다.
“역시, 무공해 청정이란 이런 것이지. 그나저나 지금은 몇 시쯤 되었을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직 오전인 듯싶다. 괜스레 기분이 좋다.
모두들 잠자리에 들어 있는 시각이면 재미없기 때문이다.
현수는 천천히 걸어 코찔찔이 세실리아 여관으로 향했다.
“어머, 주인님 이제 오셔요?”
현수가 들어서자 설거지를 하던 로즈가 손의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공손히 맞이한다.
“그래. 로즈는 아침 먹었어?”
“네, 주인님! 주인님은 아직 식사 못하셨어요? 차려 드려요?”
“아냐, 괜찮아. 배 안 고파. 릴리는 안 보이네?”
“걔는 2층에서 마법 수련 중이에요.”
로즈는 공손하면서도 상냥했다. 얀센의 부인 로사가 출산한 이후 코찔찔이 세실리아 여관의 주방장 노릇을 하는 중이다.
릴리는 마법 수련을 하는 가운데 틈틈이 언니를 돕고 있다.
“얀센은?”
“아침에 부서진 상점 수리를 해야 한다면서 외출하셨어요.”
“그래……? 날 찾아온 사람은 없고?”
“아까 이레나 상단에서 사람이 왔었어요. 카이로시아님께서 주인님을 뵙고 싶어한다고……. 그리고 영주님도 사람을 보내왔어요. 점심을 같이 먹자고…….”
“그 밖의 일은?”
“특별한 건 없어요. 다만 엘리터 습격사건 이후 그 이유를 캐기 위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것뿐이에요.”
“알았어. 나는 영주성에 들렀다가 이레나 상단으로 갈 거야. 누가 물어오면 그렇게 말해. 알았지?”
“네, 주인님!”
로즈가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여관을 나선 현수는 곧장 영주성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하인스 백작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라니안 자작의 기사 크리스가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현수가 어떤 활약을 보였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검을 다루는 기사로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고수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또한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서 중급을 바라볼 수 있도록 검술을 가르쳐 준 스승에 대한 예의이다.
“아! 크린스. 자네도 잘 있었는가? 그리고 영주님은 계신가?”
“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크린스의 정중한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니 집무실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 어서 오시오. 하인스 백작!”
“네, 영주님.”
로니안 자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현수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작위가 낮지만 장차 장인 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니안 자작은 실내의 사람들을 둘러보곤 소리쳤다.
“모두들 하인스 백작님께 예를 갖추라.”
자작의 명이 떨어지자 일제히 입을 연다.
“하인스 백작님 덕분에 큰 난리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 덕분에 테세린 영지가 살았습니다.”
“백작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게 백작님 덕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실내에 있던 모든 이들이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현수는 고위 귀족답게 말없이 사람들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오늘 점심은 백작과 함께 하고 싶은데 시간이 있소?”
“하하, 네에. 주시면 영광이지요.”
현수의 승낙이 떨어지자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전에 작전이 짜져 있었던 듯하다.
현수의 등장으로 소란스러웠던 실내는 로니안 자작이 손을 듦과 동시에 종료되었다.
“하인스 백작! 하던 회의가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