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293화 (293/1,307)

# 293

“네, 그러지요.”

현수의 동의가 떨어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쏟아진다.

“롤랑 경, 자네는 조금 전 엘리터의 습격 원인이 밝혀졌다고 했네. 그것이 무언지 말을 하게.”

“네, 영주님!”

로니안 자작에게 고개 숙인 이는 나이 60쯤이 약간 넘은 영지 마법사 롤랑이다. 대외적으로는 3써클 마스터로 소문나 있다.

얼마 전 깨달음을 얻어 4써클 초입에 올랐다. 하지만 영주인 로니안 자작도 모르는 일이다.

롤랑의 심장 부위를 돌고 있는 네 개의 고리를 인증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다.

조만간 마탑을 방문하여 인증 받을 계획이었으나 느닷없는 엘리터의 습격으로 그러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영주님,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번 엘리터 습격사건의 원인은 누군가의 음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음모……? 그럼 엘리터들이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상륙했다는 뜻이오? 한낱 몬스터들인데……? 설마, 위대한 존재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중간계의 조율자인 그분들은 음모 따위나 꾸미지는 않으니까요.”

“하긴 브레스 한방이면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을 분들이시니 그럴 리가 없겠구려. 방금 전의 말은 취소하리다.”

“네, 영주님!”

아르센 대륙의 사서를 읽어보면 드래곤에 대한 몇몇 대목이 있다.

드래곤들은 천리 밖에서도 듣고자 하는 걸 듣고, 보고자 하는 걸 본다는 것도 그 내용 중 하나이다.

그리고 드래곤의 분노를 사고도 멀쩡했던 이는 하나도 없다는 것도 있다. 그렇기에 얼른 자신의 말을 주워 담은 것이다.

“그럼, 누가 어떤 방법으로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오?”

“존경하는 영주님! 오늘 아침 저희 마법사들은 엘리터들을 유인한 무엇인가가 영지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저희는…….”

마법사 롤랑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테세린 영지에는 여러 개의 우물들이 있다. 이들 우물은 모두 한 수맥에서 연유된 것으로 수질이 맑고, 시원하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질 좋은 물을 펑펑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롤랑은 수중 몬스터인 엘리터들이 상륙한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판단하여 면밀한 조사를 했다.

그러던 중 몇몇 우물에서 이물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오리알만 한 크기의 희뿌연 덩어리이다. 이것은 3등분되어 있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마법사들은 보유하고 있던 서적들을 총동원하여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엘리터 중에는 다른 것들에 비해 월등히 덩치 큰 놈이 있다.

여왕 엘리터이다.

무성생식을 하는 엘리터 여왕은 일 년에 약 500여 개의 알을 낳는다. 알 하나하나의 크기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하다고 한다.

이 여왕 엘리터는 모든 놈들을 지배한다. 딱히 사냥 나가지 않아도 다른 녀석들이 알아서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가만히 있으면서 덩치만 불리면 되는 것이다.

보통의 엘리터들은 수명이 200년 정도이다.

반면 여왕 엘리터는 무려 1,000년을 산다. 너무 오래 살아 영물이 되기에 자연스럽게 내단이 형성된다.

기록에 의하면 여왕 엘리터가 죽으면 체외로 내단이 배출되고, 누군가가 이를 삼킨다.

그러면 그게 차기 여왕 엘리터가 되는 것이다.

이 내단을 3등분하여 우물에 넣어두었으니 수맥을 통해 바벨강으로 그 냄새와 기운이 퍼져나갔다. 이 때문에 엘리터들이 일제히 상륙하는 전대미문의 괴사가 일어난 것이다.

“흐음, 그러니까 누군가 엘리터의 내단을 우리 영지 우물에 일부러 빠뜨렸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잘려진 단면도 그렇지만 각각의 조각을 돌덩이에 매달아 빠뜨려두었습니다.”

“으으음! 대체 누가……?”

로니안 자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테세린 영지에게 누가 원한을 품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의 범행인지는 알아두었소?”

“저희가 주목한 것은 내단 조각을 묶은 끈입니다. 우리 영지에서는 쓰지 않는 질긴 섬유질로 되어 있습니다. 시간만 주시면 밝혀낼 것이 기다려 주십시오.”

“좋소, 시간을 줄 테니 충분히 알아본 뒤 보고하시오. 그리고 무적기사단장 홀리세 경과 철혈기사단장 펠른 경!”

“네, 영주님.”

“소신 여기 있나이다. 하명하소서.”

두 기사단장이 한 무릎을 꿇으며 가슴에 주먹을 대는 예를 갖춘다.

“누군가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영지에 위해를 가하려는 놈, 또는 세력이 있소. 오늘부터 영지 전력이 최고에 이르도록 훈련을 재개하시오.”

“네, 영주님!”

“아울러 영지민들 가운데 병사가 될 수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병사의 수를 늘리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리고 클로니 경!”

“네, 영주님.”

“영지 내 치안을 보다 강화하시오. 낯선 이들에 대한 검문검색을 철저히 하고 의심 가는 자들은 따로 모아 신분을 확인하시오.”

“네, 영주님!”

“시종장!”

“네, 영주님!”

“이번 엘리터 습격으로 병사와 영지민들의 희생이 많았소. 이들을 위무할 방법을 강구하여 보고하시오.”

“네, 자애로우신 영주님!”

“오늘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는 바이오. 홀리세 경, 펠른 경, 그리고 클로니 경과 롤랑 마법사만 남고 모두 물러가시오.”

“네, 영주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니 텅 빈 듯한 느낌이다.

“하하, 이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로니안 자작은 현수를 대하는 것이 어렵다. 나이는 어리지만 작위도 높고, 지닌 바 무력 또한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위될 사람이기에 억지로 말을 반쯤 내리고 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테세린을 위협하려는 세력이 어딘지 얼른 파악하셔야겠습니다.”

“그렇지요. 흐으음!”

로니안 자작은 누가 대체 이런 짓을 벌였는지 궁금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영지 전력을 제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을 만한 영지와는 연락체계도 잘 갖추십시오. 유사시 즉각적인 지원을 받으려면 그래야 하니까요.”

“그렇지. 드리안 영지의 칼루센 백작님에게 연락해 두겠소.”

“유카리안 영지는 어떻습니까?”

“데니스 알만 드 유카리안 백작 말인가? 우리가 갚아야 할 원한이 있을 뿐 그곳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는 생각지 않소.”

“테세린을 둘러싼 영지가 그곳 두 곳입니까?”

“그렇네. 두 영지 사이에 데스랜드가 있을 뿐이지.”

“데스랜드는 뭡니까?”

“너무도 산세가 험해 기사들도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협곡을 아우르는 명칭이네.”

“사람은 살지 않습니까?”

“사람은커녕 몬스터들도 없네. 중간 중간 펄펄 끓는 용암지대도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독한 냄새 때문인지 아무것도 없지. 풀만 몇 포기 있을 뿐이네.”

“그 밖에 테세린을 노리는 세력이 있습니까?”

“케일론 영지의 영주인 칼멘 후작이 우리 테세린에 군침을 삼킨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 직접적인 군사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네.”

“흐으음! 영지는 위험한데 딱히 노리는 세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경계해야 할 듯합니다.”

“백작의 충고를 가슴에 새기겠네.”

로니안 자작이 가볍게 고개 숙여 걱정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한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건가?”

“아닙니다. 라수스 협곡의 입구에 당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온 겁니다.”

“이잉? 그럼 갔던 길을 되짚어온 겐가?”

“아닙니다. 이곳을 떠나기 전 여기 좌표를 알아둔 바 있습니다. 그것을 마법 스크롤에 적용하여 왔습니다.”

“아! 아무튼 고맙네. 백작이 아니었다면 큰 피해를 입을 뻔했네. 테세린의 영주로서 진심으로 고맙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나저나 로잘린 영애는 괜찮습니까? 많이 놀란 것 같던데.”

“염려 덕분에 괜찮지. 아! 식사 준비가 되었나 보군.”

막 들어선 시종장의 손짓을 본 모양이다.

로니안 자작이 일어서자 모두들 일어났다. 그리곤 식당으로 갔다. 이미 여러 사람이 앉아서 기다리던 중이다.

세실리아 자작부인과 로잘린 등이다.

“어서 오세요. 하인스 백작님!”

“네, 그간 안녕하셨지요? 자작부인!”

“백작님을 뵙습니다.”

“로잘린 영애, 괜찮아요?”

“네, 백작님 덕분에……. 감사합니다.”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현수가 준 각종 화장품 덕분에 몇 년은 젊어진 듯한 모습이다. 엷게 화장을 한 로잘린은 발가벗은 모습을 보였던 것이 생각났는지 낯을 붉히고 있다.

“자! 오늘은 하인스 백작님을 위한 건배부터 하고 식사하세.”

로니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들 잔을 든다.

“하인스 킴 백작 덕분에 우리 영지의 어려움은 극복되었다. 백작의 도움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백작의 앞길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기원하고 싶네.”

“백작님의 앞길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챙, 챙, 챙챙!

사람들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곤 식사가 시작되었다.

가장 상석은 비워두었다. 식탁 중심부엔 로니안 자작 부부가 앉았고, 맞은편엔 현수와 로잘린이 앉았다.

나머지 좌석은 영지 귀족들과 기사 홀리세 경, 펠른 경, 클로니 경, 그리고 롤랑 마법사가 채우고 있다.

“하인스 백작님, 아주 돌아오신 건가요?”

세실리아 자작부인의 물음이다.

“아닙니다. 다시 떠나야 합니다. 제가 계획한 것의 절반 정도밖에 못 갔거든요.”

“그럼, 다시 돌아오실 거죠?”

로잘린의 미래가 걱정되는지 딸의 안색을 살핀다.

“그럼요! 여행을 마치면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그런데 아까 이곳까지 마법 스크롤을 사용해서 오셨다 했는데 그러려면 최소 7써클 마법사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궁금한 것이 많은 롤랑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7써클 마법사가 만든 스크롤입니다.”

“그럼 마탑주님을 만나신 겁니까? 어느 마탑의 탑주님이신지요?”

작은 인연이 나아가 큰 인연이 되는 법이다.

자신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는 마법사와의 연이 없던 롤랑이기에 예의가 아니건만 저도 모르게 물은 것이다.

“이곳의 마탑주가 아니라 우리 코리아 제국의 마법사를 만났습니다. 7써클 마스터로서 대륙을 여행하던 중이라 하더이다.”

“네에? 치, 칠 써클 마스터요?”

롤랑의 눈이 커진다. 하긴 아르센 대륙엔 7써클 마스터가 없다.

기록에 의하면 9써클에 올랐던 아드리안 공국의 시조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 후작 이후 단 하나도 7써클 마스터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그 귀중한 인물이 대륙을 여행 중이라니 눈이 커진 것이다.

“7써클 마스터 맞습니다. 우리 가문과 깊은 인연이 있던 사람이기에 그에게서 스크롤 몇 장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기, 깊은 인연이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스크롤들을 얻었습니다.”

“죄, 죄송하지만 남은 게 있으면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 아닙니다. 식사 후 따로 만나지요.”

“가, 감사합니다. 백작님!”

롤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직각으로 꺾는다. 스크롤을 견식하는 것만으로도 소득이 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난 후 현수는 롤랑과 만난 자리에서 스크롤을 보여주었다. 멀린이 남긴 아공간 속에 있던 것이다.

이를 보게 된 롤랑은 격동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그렇게 스크롤을 보고 있기에 한마디 해주었다.

“메모리 마법을 쓰면 더 오래 기억한다고 아는데…….”

“저, 정녕 그래도 되겠습니까?”

“보고 기억하는 건데 뭐 어쩌겠습니까?”

“오오! 감사합니다.”

롤랑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고마워했다. 현수가 이렇게 너그러운 이유는 과거에 그를 재운 바 있기 때문이다.

무너진 북쪽 첨탑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려던 때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롤랑은 모종의 실험을 하던 중이다. 그런데 느닷없는 슬립 마법에 잠들면서 쓰러졌다.

그때 실험하던 것이 떨어지는 바람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수련 마법사에 의해 일찍 발견되지 않았으면 너무 많은 실혈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롤랑의 정중한 배웅을 받은 현수는 이레나 상단으로 향했다.

“아앗! 하, 하인스 백작님!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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