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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294화 (294/1,307)

# 294

이레나 상단의 수문위병 발루네는 현수를 보는 순간 경악성을 내며 허리를 꺾었다.

“발루네, 오랜만이네.”

“네, 네! 어,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전에는 못 들어가게 하려 애를 썼는데 이번엔 비켜서며 손짓까지 한다. 현수는 피식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엔 불나방들이 없는가?”

“웬걸요? 카이로시아 지사장님의 미모에 반한 녀석들이 하루에도 50명은 찾아옵니다.”

“그래? 그 녀석들은 잘 내쫓고 있지?”

“하하, 그럼요.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후후, 고맙네.”

안으로 들어서 몇 발짝을 떼었는데 또 아는 얼굴이 보인다.

“아니? 하인스 백작님이 아니십니까?”

“아, 자넨! B급 용병 토마스이군. 그간 잘 있었는가?”

“아이고, 그럼요.”

토마스는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현수는 일전에 유카리안 영지에 억류되어 있던 카이로시아를 구하기 위해 B급 용병 3명과 C급 용병 5명을 고용한 바 있다.

유카리안 영지까지 가는 동안 이들에게 검술의 기초를 닦아주었다. 그때 용병들의 대표를 맡은 이가 바로 B급 용병 토마스이다.

“그런데 자네가 어찌 이곳에……?”

“요즘은 이레나 상단을 위해 일하고 있습죠.”

“아! 그런가? 검술은 좀 나아졌고?”

“백작님의 가르침에 힘입어 조만간 A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거 축하할 일이군.”

“네에. 감사드립니다.”

토마스를 뒤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이다.

“멈추시오. 이곳은 특별한 용무가 없는 이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소. 어디서 온 누구이며, 어떤 용무가 있소이까?”

나이 40쯤 된 강맹하게 생긴 사내이다.

“자넨 누군가?”

“이레나 상단의 호위임무를 맡은 A급 용병 루토라 하오.”

“그래?”

현수가 흘깃 바라보니 소드 익스퍼트 중급과 상급 사이쯤 되어 보인다. 자신을 살피는 줄 모르는 루토는 하던 말을 이었다.

“이곳부터는 이레나 상단의 중지이라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소. 그러니 신분부터 밝혀주시오.”

“그런가? 나는 코리아 제국에서 온 하인스 킴 백작이네. 테세린 지부장인 카이로시아를 만나러 왔으니 허락을 구해주게.”

“네에……?”

루토의 눈이 커진다. 평범한 복장을 한 이가 작위를 가진 귀족 본인이라 하니 놀란 것이다.

“시간을 지체하면 카이로시아가 몹시 싫어할 것이네.”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루토는 현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후다닥 달려간다.

엘리터 습격사건 이후 고용된 루토는 용병 계약서를 쓸 때 카이로시아로부터 여러 당부를 들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의 부군이 될 하인스 백작에 관한 것이다.

나이는 젊어 보이지만 작위를 가진 귀족이며, 때에 따라 평민들이나 입을 옷을 입기도 한다. 게다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검사이므로 절대 무례하게 대하지 말라는 등의 이야기이다.

루토는 고용된 직후 하인스 백작의 무용담을 들었다.

단단하고 질기기로 이름난 엘리터의 껍질을 무 썰 듯 베어냈다고 한다. 이곳 테세린 영지의 무적기사단장 홀리세와 철혈기사단장 펠른도 어쩌지 못한 놈들을 마구 베어내 영지를 구해낸 장본인이다.

고용 계약서를 쓸 때 루토는 기회가 닿으면 하인스 백작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을 넣었다. 검을 다루는 검사이기 때문이다.

이에 카이로시아는 하인스 백작이 허락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본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님을 명확히 한 것이다.

다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기에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용병이건만 이레나 상단과 장기 계약을 맺은 것이다.

“어서 오세요, 백작님!”

“피해 복구는 잘 되고 있소?”

“네, 상품 피해는 경미했고, 희생자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이루어졌어요. 이제 담장만 손보면 될 것 같아요. 새로 쌓아야 한다기에 나가서 보았는데 이 기회에 방벽을 조금 더 든든하게 쌓으려구요.”

“그렇소? 그럼 이렇게 쌓아보시오.”

손에 물을 찍어 탁자에 그림을 그리자 고구려 성의 특징인 치(雉)가 나타난다.

별 의미도 없는 것 같기에 카이로시아가 묻는다.

“근데 이 부분은 왜 이렇게 하는 거죠? 쌓기도 힘든데.”

“이렇게 성벽의 일부분을 내쌓으면 누군가의 공격을 받을 때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으니까.”

“아……!”

영리한 카이로시아는 단번에 치의 용도를 깨달은 모양이다.

“괜찮지?”

“그럼요. 이거 대단한 거예요. 이렇게 하면 공성전에서 수비 쪽이 엄청 유리해지잖아요.”

“성벽 위에 이렇게 담장을 더 쌓으면…….”

현수는 여장의 입면과 단면을 그려주며 설명을 이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을 보호할 수 있지.”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네요. 성벽 위의 담이라…….”

카이로시아는 눈빛을 빛냈다. 그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현수는 하던 말을 이었다.

“특히 문이 있는 부위엔 이렇게 성벽을 둥글게 쌓아서…….”

현수가 그린 그림은 성문 부위의 평면도이다.

적이 공성무기를 사용하여 성문을 깨려는 시도를 하는 동안 사방에서 공격하여 섬멸시킬 수 있도록 치를 둥글게 내쌓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멀리서 보면 성문이 보이지 않게 하는 효과도 있다.

“아! 이렇게 하면…….”

카이로시아는 이번에도 확실히 깨달은 듯하다.

이레나 상단은 테세린 영지에 있기에 안전하다. 하지만 만일이라는 것이 있다.

이번에 새로 담장을 쌓으면서 현수가 일러준 대로 하면 당장 돈은 더 든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경계근무에 투입할 인원이 줄어든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득이다.

그리고 현수는 무심코 말해주는 것이지만 전쟁이 잦고, 영지전도 빈번한 이곳 아르센 대륙에서 아주 귀중한 정보이다.

“백작님, 잠깐만요.”

카이로시아는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횡 하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흐음, 그러고 보니 여기도 오랜만이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둘러보았다. 인테리어라는 개념이 없는 곳이기에 휑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센스가 엿보인다.

돌덩이들을 쌓아 만든 일종의 성이기에 마감재는 거의 전부가 돌이다. 그것도 반듯반듯하게 잘 다듬은 게 아니라 울퉁불퉁하다.

어찌 보면 고풍스럽지만 모든 게 이런 이곳에선 이런 느낌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커다란 천으로 벽면 전체를 가려놓았다.

어찌 염색을 한 건지 모르지만 집무실에 있어도 드넓은 초지를 연상시킬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떤 천인가 싶어 구석에서 들쳐본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뒤에는 제법 많은 양의 크래커 박스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후후, 몰래 감춰놓고 먹나 보네. 살찔 텐데. 참, 쉐리엔이 있으니 괜찮지.”

혼자서 크래커를 먹는 카이로시아를 연상한 현수는 웃음 띈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는 문이 아니다.

짧은 복도 양쪽은 옷방으로 쓰이는 듯하다. 옷들이 걸려 있고, 각종 장신구들이 진열대 위에 놓여 있다.

안쪽의 문을 여니 커다란 창과 커튼, 그리고 화장대와 침대가 보인다. 현수가 준 에이스 침대가 보인다.

자가드 원단 오리털 이불은 한쪽에 갈 개켜져 있다. 그걸 덮기엔 날씨가 더워서인지 침대 위엔 다른 이불이 있다.

“흐음, 이불이 뭐가 있지?”

현수는 아공간을 뒤져 화사한 꽃무늬가 그려진 차렵이불과 패드 몇 장을 꺼냈다. 알러지 방지가 되고, 집먼지 진드기의 서식을 막는다는 극세사 이불이다.

새 것이라 그런지 몹시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이다.

생각난 김에 홑이불도 몇 개 꺼냈다. 이건 여름용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엔 냉장고도,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다. 더운 여름이 되면 사람들이 어찌 지내는지 알 수 없다.

현수는 생각난 김에 기분 좋은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카이로시아가 잠드는 이곳에 항온 마법진과 공기 정화 마법진을 새겨줄 생각을 한 것이다.

겨울도 올 것이기에 여름용과 겨울용 마법진부터 만들었다.

스테인리스 철판에 판금도구를 사용하여 마법진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신경을 집중해서 그리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일이기에 금방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여름용은 실내 온도를 22.3℃이고, 겨울용은 19.0℃로 맞췄다. 사람이 가장 쾌적함을 느끼는 온도라 한다.

마법진에 끼우는 마나석은 하급을 썼다. 그리고 마나 집적진까지 새겨 반영구적인 효능을 보이도록 했다.

생각난 김에 해충들을 물리치는 초음파 발생 마법진도 만들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파의 주파수는 20㎐∼20㎑이다.

이 범위 밖의 음파를 초음파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해충이나 쥐의 청신경에 불쾌감이나 고통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구가 핵무기로 멸망해도 바퀴벌레는 끝까지 생존할 거라는 말이 있다. 그런 바퀴벌레도 음압이 100㏈ 정도가 되면 먹이나 수분을 취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숨어 있던 장소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

현수는 카이로시아가 쾌적한 거처에서 지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마법진을 만든 것이다.

모든 마법진은 마나석을 끼우거나 빼는 즉시 작동되도록 조치를 취했다. 작업 도구들을 정리하고 나니 1시간이 후딱 지나 있었다.

“이제 끝나셨어요?”

“응? 언제 와 있었소?”

카이로시아가 내미는 음료수 잔을 받아든 현수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집중한 나머지 들어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왔어요. 근데 뭘 그렇게 열심히 만드셨어요?”

“으응, 이거? 로시아를 위해서 만들었지.”

“뭔데요, 그거?”

“이건 항온 마법진이야. 일정 범위를 항상 같은 온도가 유지되도록 해주는 것이지. 이건 여름용이야. 이걸 이렇게 작동시키면…….”

말을 하면서 마나석을 구멍에 끼우자 실내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 건물은 석재로 지어졌고, 단열재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이다.

현재의 온도는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모두 받아들였던 건축 재료들이 그것을 뿜어내는 시각이다. 하여 27∼8℃ 정도 되었다.

그런데 마법진이 가동된 이후 조금씩 온도가 낮아진다.

“봐, 실내 온도가 내려갔지? 그리고 이걸 이렇게 가동시키면…….”

현수가 가동시킨 것은 초음파 발생 마법진이다. 이실리프 마법서에 기록된 음파 발생 마법진을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9장 금괴 만드는 방법

마법진이 가동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로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침대 아래에서, 벽에서, 그리고 바닥과 천정 등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한 때문이다. 갈 데가 없어 우왕좌왕하기에 문을 열었다.

벌레들이 일제히 그곳을 통해 빠져나간다.

“보다시피 이건 벌레가 꾀지 않도록 하는 마법진이야. 이걸 해제하려면 이렇게 하면 돼.”

현수가 마나석을 빼자 나갔던 벌레 가운데 일부가 되돌아온다. 하여 다시 끼웠다. 그러자 얼른 가던 방향으로 내뺀다. 카이로시아는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벌레들을 보고 탄성을 냈다.

“세상에…….”

로시아가 놀라든 말든 현수의 설명은 이어졌다.

“이건 겨울에 쓰라고 만든 거지만 아주 더우면 이걸 작동시켜도 돼. 그럼 온도가 더 내려가니까.”

말을 하며 여름용을 중지시키고 겨울용을 가동시켰다. 얼마 후 서늘한 기분이 들 정도로 온도가 내려간다.

이 대목에서 로시아는 의문이 생겼다.

“왜 온도 조절 마법진이 두 개인 거죠?”

“그건 여름과 겨울에 인간이 느끼는 쾌적온도가 다르기 때문이야. 그리고 외부와의 온도차가 너무 크면 면역 기능에 교란이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지.”

“아! 그래서…….”

카이로시아는 눈빛을 반짝이며 현수를 바라보았다.

“저기 저건 극세사로 짠 섬유 이불이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집먼지 진드기가 서식할 수 없는 거지.”

“집먼지 진드기요?”

“그래,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좋은 거니까 이걸 써. 세탁비누는 저걸 쓰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빨면 될 거야.”

현수는 CJ에서 나온 비트와 LG생활건강에서 나온 테크를 가리켰다. 세탁과 살균, 그리고 묵은 때 제거와 선명한 색상을 강조한 세제이다.

“고마워요.”

“고맙긴…….”

“그래도요. 으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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