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295화 (295/1,307)

# 295

스스럼없이 카이로시아가 안겨든다. 현수는 당연하다는 듯 안았다. 그리곤 키스를 했다. 카이로시아의 입술이 열렸고, 고르고 흰 치열마저 열렸다. 그리곤 부드러운 설육이 마중 나온다.

잠시 숨 막힐 듯한 열정적인 입맞춤이 지속되었다. 시계가 없는 아르센 대륙의 모든 시간들이 멈춘 듯한 순간들이다.

우주는, 세상은, 그리고 모든 자연은 카이로시아와 현수를 위해 정지했다. 그렇게 달콤한 시간이 흐른 뒤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로시아! 잘 있어 주어 고마워.”

“저도요. 절 구해주러 오셔서 고마워요.”

“늘 보고 싶어했다는 거 알지?”

“제 망막엔 늘 백작님의 실루엣이 맺혀 있었어요.”

서로의 마음을 전하곤 말없이 웃음 지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잠시 시선을 맞춘 둘은 또 다시 길고 긴 입맞춤을 했다.

“언제까지 머무실 거예요?”

“이곳의 위험이 해결되었으니 가야지.”

“또 오실 거죠?”

“당신이 있으니까……. 로시아가 있기에 이곳은 반드시 돌아와야 할 곳이 되었어. 건강히 있어.”

“네에. 백작님도, 아니, 자기야도 건강하세요.”

로시아는 가지 말라고 잡지 않았다. 그저 그윽한 시선을 보냈을 뿐이다.

“다음에 오면 그땐 더 세게 안아줄게.”

“갈비뼈 부러지지 않도록 운동할게요.”

“고마워! 로시아를 만난 게 내겐 행운인가 봐.”

이 세상 어디에 카이로시아 같은 여자가 있겠는가!

투기도, 투정도, 질투도, 원망도, 발목을 붙잡지도 않는다. 배경도 좋지만 아름답고 몸매까지 빼어나다.

“저녁만 먹고 갈 거야.”

“제가 차릴게요.”

“아니, 내가 요리해 줄게.”

“요리도 할 줄 아세요?”

“기대해도 될 거야.”

“기대돼요.”

아주 짧은 문장들만 오갔다.

그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진한 사랑과 신뢰가 배어 있다. 그렇기에 평범한 듯 들리지만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였다.

“하인스 2세를 얼른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하고 오세요.”

“그러리다. 그런데 주방은 어디에 있소?”

“주방이 어딘지 알려 드려요?”

“알려주겠소?”

“네, 저를 따라 오세요.”

앞서 걷는 카이로시아의 살랑이는 둔부가 현수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위 귀족답게 근엄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물론 속마음으론 카이로시아를 수십 번도 더 안고 뒹굴었다.

“그냥 가시면 로잘린이 울지 몰라요. 불러도 되죠?”

“그러구려.”

주방에서 프라이팬 신공을 발휘하던 현수의 대답이다.

현수가 온갖 솜씨를 발휘하고 있는 동안 쪽지를 쥔 사내 하나가 눈썹이 휘날리게 영주성을 다녀왔다. 물론 로잘린을 부르는 쪽지이다. 그리고 로잘린이 당도하는 순간 모든 음식이 세팅되었다.

“백작님!”

“어서 와. 로잘린!”

“언니, 불러주셔서 고마워요.”

“고맙긴. 로잘린도 백작님의 아내잖아.”

“네에.”

공손히 대답한 로잘린은 현수가 빼준 의자에 앉았다. 그런 그녀의 눈앞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러시아에서 배운 음식과 한식들이 망라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다 뭐래요?”

“나도 몰라. 백작님께서 코리아 제국의 음식들을 맛보라면서 만드셨어. 이렇게 음식을 잘 만드시는지 처음 알았어.”

“자, 말만 할게 아니라 이제 먹어봅시다. 이 음식은 이렇게…….”

현수는 불고기와 잡채부터 시작했다.

처음 맛보는 것이지만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느낌에 두 여인은 체면을 걷어버렸다. 그리곤 걸신들린 아귀처럼 음식들을 섭렵했다.

한편, 이레나 상단 주방에서도 난리가 벌어졌다.

현수가 만들어놓은 음식 때문이다.

이것들을 만들 때 일부러 넉넉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50여 명은 먹고도 남을 만큼이다.

음식을 만들 때 곁에 있던 숙수들에겐 아주 친절히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한 사람에게 하나씩 가르쳐 줬다.

음식이 완성된 이후 맛을 본 숙수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이 만드는 음식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던 때문이다.

현재 주방 식구들과 이레나 상단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중이다. 물론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이다.

“참, 로시아! 아까 내게 줬던 음료, 그거 뭐로 만든 거야?”

“아까 그거요? 그건 쉐리엔의 열매로 만든 거예요.”

“쉐리엔의 열매?”

“네, 쉐리엔의 잎과 줄기는 살이 찌지 않게 하는 효능이 있어요. 열매는 달콤한 맛을 내죠. 그리고 뿌리는 진통 효과가 있어요.”

“진통 효과?”

“네, 사람들은 잘 몰라요. 저도 얼마 전에야 알았거든요.”

카이로시아의 말은 사실이다.

카이로시아에겐 남들에게 말 못할 한 가지 고민이 있다.

생리통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월경통이라도 불리는 이것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첫째는 배란과 관련된 것이고, 둘째는 배란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카이로시아의 월경 주기는 일정하다. 그래서 자궁내막 내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의 생성 증가로 통증을 겪는다. 이것은 자궁 근육의 강한 수축을 일으켜 통증을 유발시키는 물질이다.

생리 때마다 쥐어짜는 것과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기에 카이로시아는 백방으로 진통 효과가 있는 것을 찾았다.

몇 달 전, 카이로시아는 뱃살이 약간 찐 듯한 느낌에 시녀들로 하여금 쉐리엔을 채취해 오도록 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후, 생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여겼다.

시녀들을 불러 물어보니 쉐리엔의 잎과 줄기뿐만 아니라 뿌리까지 짜냈다고 들었다.

다음 달 생리 직전에 카이로시아는 쉐리엔 뿌리를 짜서 복용했다. 놀랍게도 생리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진통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호오, 쉐리엔은 그야말로 버릴 게 없는 식물이구려.”

“네. 너무 흔하지만 정말 쓸모가 많죠.”

“으음……!”

현수는 잠시 턱을 괴었다.

‘쉐리엔을 농장으로 가져가서 재배를 해볼까? 여긴 온대기후인 듯한데 열대기후에서도 생육이 가능한가?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항온 마법진을 만들면 가능할까?’

현수는 쉐리엔의 상품성을 높이 판단했다.

하여 이실리프 농장에서 재배하는 것을 고려해 보았다.

잎과 줄기는 다이어트 보조제로 만들고, 뿌리는 진통제의 원료가 된다. 열매는 음료수를 만들 수 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도 먹는 게 된다.

“쉐리엔은 어떻게 재배를 하오?”

“재배요? 그런 거 안 하는데요? 지척으로 널려 있는데 굳이 재배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구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치곤 곧바로 쉐리엔을 찾았다.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은 왜 그러는지 궁금해했지만 묻지 않았다.

아직 여름이 되지 않아 쉐리엔은 꽃이 피지 않았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했다. 꽃이 핀 자리에서 열매가 맺힌다. 그것 하나하나의 크기는 체리 정도 된다고 한다.

껍질 색깔은 바위와 비슷한 색이다.

이것을 벗기면 연두빛 속살이 드러난다. 이것의 중심부에 씨앗이 있다. 이것을 심으면 재배가 가능할 듯싶다.

‘흐음, 수정은 뭐가 하는 거지? 충매화인가? 아님 풍매화? 충매화가 아니길 빈다.’

현수는 일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이 떠올렸다.

어떤 양봉업자가 많은 꿀을 얻기 위해 벌통을 열대지방으로 가져갔다.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곳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해엔 엄청난 양의 꿀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해엔 꿀통이 텅텅 비었다. 겨울이 없음을 꿀벌들이 알아낸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애써 꿀을 저장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수정시켜야 한다면 보통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여 꿀벌 같은 곤충에 의해 수정이 되는 충매화가 아니길 빌었다.

나중에 알게 될 사실이지만 쉐리엔은 풍매화이다.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꽃이 피지만 꽃이 너무 작아 벌이나 나비에 의한 수분, 수정이 어렵다. 그래서 바람에 꽃가루가 날려 수분, 수정이 된다.

“로시아, 쉐리엔을 채취해 놓으면 얼마나 빨리 시들지?”

“한 사흘은 괜찮은데 더 지체되면 누렇게 말라요.”

“흐음, 알았소.”

“대체 쉐리엔에 왜 이처럼 관심이 많은 거예요?”

“내게 필요해서 그렇소.”

“그나저나 여기엔 얼마나 머무실 거죠?”

“이제 곧 가야 하오.”

“……!”

한가롭게 이레나 상단의 정원을 걷던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의 말이 없어진다. 헤어짐이 섭섭해서이다.

그렇게 잠시 말없는 산책이 이어졌다.

“가시는 길을 조금 늦추면 안 되나요?”

“……?”

현수가 말없이 바라보자 카이로시아가 말을 잇는다.

“가기 전에 저와 동생을 거둬주세요.”

“……!”

“언제 오실지 모르잖아요. 저희가 당신의 여인이라는 낙인을…….”

카이로시아는 부끄러워서 말을 잇지 못했다. 곁에 있던 로잘린 역시이다.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건 아니 될 말씀이오. 당신들을 나의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하였지만 우린 아직 결혼하지 않았소. 로시아는 아버님의 허락 없이 결혼할 셈이오?”

“그, 그건 아니에요. 아버지께는 따로 연락드려서 허락을 받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하겠다면 허락하실 거예요.”

“허락 받은 상황이 아니질 않소? 만일 그랬다가 극구 반대하면 어쩌실 생각이오?”

“그, 그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말이기에 카이로시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같은 순간 로잘린은 생각이 달랐다.

자신의 부모는 이미 이 결혼을 승낙했을 뿐만 아니라 열렬히 지지한다. 본인도 하인스 백작의 아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따라서 걸림돌이 없는 상황이다.

현수는 로잘린의 표정을 보고 금방 속내를 알아차렸다.

“로잘린, 설마 언니보다 먼저 나와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니지?”

카이로시아를 힐끔 바라본 로잘린은 상황을 깨달았다.

“네? 그, 그럼요. 당연히 언니 먼저……. 네에, 그럼요.”

“미안해, 동생!”

“어머, 아니에요.”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 현수는 두 여인을 차례대로 포옹해 주었다.

남들 보는 눈이 있을 수도 있기에 입술이 아닌 이마에 뜨거운 입맞춤을 해주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또 올 것이오. 여행만 마치면 그때는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것이오.”

“네에. 저는 자기야를 믿어요.”

현수의 속삭임에 카이로시아가 대답한 말이다. 로잘린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었다.

“전 이미 백작님의 여인이에요. 언제든 오셔요.”

늦은 오후까지 셋은 담소를 나누었다. 로잘린이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라 오인했던 커피도 마셨고, 톡 쏘는 콜라도 마셨다.

두 여인의 무한한 순정에 미안한 기분이 든 현수는 아공간을 뒤져 많은 것들을 꺼내놓았다.

그중에는 양말과 운동화도 있다. 이것들을 신어본 두 여인은 너무도 발이 편하다면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 이외에도 생리대와 화장품, 그리고 각종 미용용품들이 쏟아져 나와 두 여인을 행복하게 했다. 그중에는 당연히 세실리아 자작부인을 위한 것들도 있었다.

이중 환경에 영향을 미칠 것들은 사용 후 따로 모아놓도록 했다. 나중에 회수할 생각인 것이다.

“흐음, 되돌아왔군.”

못내 안타까워하는 두 여인을 뒤로하고 현수는 이곳 율리안 영지로 되돌아왔다.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현수는 가까운 주점을 찾았다. 약초꾼 차림의 사내들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이다.

그중 하나가 현수를 알아보았다.

합석하게 되었고, 라수스 협곡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그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던 사내들의 눈에 공포의 빛이 어린다.

그리곤 다시는 말도 꺼내지 말라 한다. 협곡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치고 되돌아온 이가 없다고 한다.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현수는 밖으로 나왔다. 정보가 없더라도 라수스 협곡은 지나갈 셈이다. 드래곤과 드래고니안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7써클 마스터인 자신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 생각한 것이다.

“흐음,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현수는 케린도 빌모아 대장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올해 213살이며, 빌모아 가문의 대를 이을 뻔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드워프가 어떤지 보러 간 것이다.

땅, 땅, 땅, 땅……!

규칙적인 망치질 소리가 듣기에 좋다. 과연 장인의 망치질이라 할 만한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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