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계십니까?”
가는귀를 먹어 잘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수는 부러 소리를 냈다. 무단침입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이다.
땅, 땅, 땅, 땅……!
“빌모아 영감님!”
땅, 땅, 땅, 땅……!
“안 들려요? 나 왔어요.”
땅, 땅, 땅, 땅……!
“만든다는 건 만들어 놨어요? 영감님!”
현수가 일부터 큰 소리를 냈지만 케린도 빌모아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는 듯 망치질만 하고 있다.
땅, 땅, 땅, 땅……!
보아하니 호미 비슷한 것을 만드는 중이다. 케린도 빌모아는 작업 삼매경에 빠졌다는 듯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케린도 빌모아가 슬쩍 곁눈질하던 순간을 포착한 때문이다.
“영감님! 못 만들었군요. 내가 그럴 줄 알았지요.”
땅, 땅―!
“이놈아! 이건 대체 뭐로 어떻게 만든 거냐?”
도저히 궁금해 참을 수 없다는 듯 현수가 준 OKC―3S 대검을 꺼내든다. 현수는 웃음만 지었을 뿐이다.
“영감님, 저하고 내기했던 거 기억나죠?”
“그, 그게……. 그래도 무기는 만들어줄 수 없다.”
케린도 빌모아의 얼굴은 붉었다. 자존심이 상해 열 받은 때문이다.
현수가 던져 주고 간 것과 똑같은 재질을 가진 걸 만들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귀하디귀한 오리하르콘까지 섞어보았다. 강도는 비슷해졌다. 하지만 특유의 절삭력이라든지 빛깔을 낼 수 없었다.
빌모아 가문의 비전인 제련법 책까지 샅샅이 뒤졌다. 가문을 떠날 때 조부가 필사해 준 것이다. 그럼에도 해결책은 없었다.
“저는 무기를 만들어달라고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그래? 그럼 뭘 만들어주면 되겠느냐?”
케린도 빌모아는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내기에 졌으니 무엇을 원하든 해줘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금이 조금 있어요. 그걸 이렇게 만들어줄 수 있나요?”
현수가 꺼낸 것은 화원공사 왕영백이 킨샤사로 마약과 함께 밀반입하려던 1㎏짜리 금괴이다.
케린도 빌모아는 현수가 내민 골드바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양이 좀 많습니다. 소화해 낼 수 있겠습니까?”
현수의 말이 도발적으로 들린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케린도 빌모아가 발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뭐야? 내 실력을 얼마나 안다고……. 내놔 봐. 다 만들어줄게.”
“아주 많은데도 가능하겠습니까?”
“나를 뭘로 보고……. 아무리 많아도 다 할 수 있으니까 내놔.”
제깟 놈이 금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싶은 모양이다. 현수는 마법 가방처럼 보이는 것을 꺼내들었다.
아공간이 있음을 보여서 좋을 일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다 된다고 했습니다.”
“오냐. 얼마든지 만들어주마. 금이 산더미처럼 있어도 말이야.”
케린도 빌모아의 말에 현수는 실소를 지었다. 그리곤 아공간 속의 금덩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일본 효고현에 소재한 다다은동 광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감춰두었던 그것이다.
케린도 빌모아는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금덩이들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렇게 많은 황금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 잠깐만!”
“왜요?”
“이런 게 얼마나 더 있나?”
“글쎄요? 다 꺼내면 산더미에는 못 미치지만 작은 동산만큼은 있을 거 같은데요?”
“자, 자네 위, 위대하신 존재이신가? 아니, 이신가요?”
이렇듯 많은 황금은 귀족들에게도 없다. 그런데 현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놓는다.
“아뇨. 사람인데요.”
“그, 그럼 자네의 신, 신분은 뭔가? 나이를 보니 아직 왕은 아닌 것 같고 어느 왕국의 왕자? 아니, 제국의 황자인건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 그런데 어찌 이렇듯 많은 황금을…….”
“아! 이건 제 선조들이 절 위해 남겨놓았던 겁니다. 아무튼 출처는 묻지 마시고 이걸 손에 들고 있는 그것처럼 만들어주십시오.”
“이, 이 많은 걸 다……?”
너무 많아 질린다는 표정이다. 이때까지 현수가 꺼내놓은 건 대략 1톤 정도 된다. 한화로 약 607억 4천만 원어치이다.
“흐음, 아직 안 꺼낸 게 훨씬 많은데…….”
“뭐, 뭐어……? 어, 얼마나 더 있는데?”
현수는 어림잡아 생각해 보았다.
이실리프 농산과 축산, 그리고 농장을 만드는 비용을 1조 원 정도로 잡으면 약 16.5톤의 금괴를 처분해야 한다. 이는 정확한 계산이 아니다. 따라서 얼마나 더 필요한지 알 수 없다.
“일단 꺼내놓은 것의 약 50배 정도를 더 만들어야 합니다.”
“뭐어……? 오, 오십 배……?”
지구에서도 그렇지만 이곳 아르센 대륙에서도 금력은 대단하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금괴 50톤을 꺼내놓는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자, 자네! 아니, 당신 정말 위대한 존재가 아니십니까?”
“아이 참, 사람이라니까요. 근데 이거 만들어줄 수 있어요, 없어요?”
“마, 만들 수는 있지만 시, 시간이 오래…….”
케린도 빌모아는 괜스레 위축되는지 자꾸 말을 더듬는다.
“협곡 안에 드워프 마을이 있다면서요. 거기 가져가면 더 빨리 만들 수 있지 않나요?”
“무, 물론이네.”
“이걸 해주시면 제가 보답을 하지요.”
“보답? 무슨 보답?”
“술 좋아하죠? 이런 술 마셔봤어요?”
현수가 꺼낸 것은 갈색 병에 담긴 하이트 맥주이다. 냉장 판매되던 것인지라 시원하다.
뿅―!
특유의 병 따는 소리가 나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현수는 500㏄짜리 맥주 잔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따랐다.
이내 노란 맥주 위를 하얀 거품이 덮는다.
꿀꺽―!
케린도 빌모아는 침을 삼키며 잔이 채워지길 기다렸다.
“자아, 한번 마셔 보세요. 속이 다 시원할 겁니다.”
“고, 고맙네.”
케린도 빌모아는 혹여 누가 빼앗기라도 한다는 듯 허겁지겁 잔을 움켜쥔다. 그리곤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목젖이 움직이며 부드럽게 술이 넘어간다.
카아아―!
단숨에 500㏄를 비운 케린도 빌모아가 입가의 거품을 닦아낸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술이…….”
“한 잔 더 하세요.”
또 한 병을 꺼내 술을 따라주었다. 또 단숨에 잔을 비운다.
“어때요? 시원하죠? 맛은 어떻습니까?”
“이거 어디서 파는 건가? 응? 말해주게. 아무리 비싸도 이걸 사 먹으러 가야겠네. 우리 빌모아 일족 전부 데리고 말이네.”
주머니에 담긴 금화를 꺼내는 걸 보니 진짜로 그러려는 몸짓이다.
“아마 사기 어려울 겁니다.”
“왜? 다 팔리고 없대?”
사기 치지 말라는 표정이다.
“맥주가 담겼던 병을 한번 보시죠.”
“병? 이거……? 헉……! 어떻게 이렇게…….”
케린도 빌모아의 입이 딱 벌어진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두 개의 갈색 병!
장인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워프 가운데에서도 빌모아 일족은 솜씨가 좋기로 이름나 있다.
그런데 두 개의 병은 한눈에 보기에도 명품이다. 게다가 크기와 모양, 그리고 앞에 붙여놓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까지 100% 똑같다.
늘 자신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살았지만 처음으로 이런 건 못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상되던 반응이기에 현수는 또 한 번 실소를 지었다.
“후후……!”
“세,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것이……. 이건… 이건……! 이건 대체 뭘로 만든 건가? 이렇게 진한 갈색 빛이 감도는 보석이 있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리고 이걸 만들려면 그 크기가…….”
제멋대로 상상한 케린도 빌모아는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에 마신 기막히게 시원하고 맛이 끝내주는 맥주도 맥주지만 병이 지닌 가치를 더 높이 산 때문이다.
“보다시피 아르센 대륙에선 만들 수 없는 겁니다. 인정합니까?”
“그, 그럼! 인정하네, 인정하고 말고. 나도 이렇게는 못 만드네. 그리고 이걸 만들 만큼 큰 보석도 없고.”
“이건 바다 건너 코리아 제국이란 곳에서 생산된 맥주라는 겁니다. 이 마법 가방 안에는 이런 게 약 1,000병이 들어 있죠.”
“처, 천 병이나?”
“네, 금괴를 만들어주면 그걸 모두 주겠습니다.”
“정말?”
케린도 빌모아가 눈을 크게 뜬다.
“하지만 병은 줄 수 없습니다. 빈 병을 갖다 줘야 새로운 걸 살 수 있으니까요.”
“그, 그야 그렇겠지.”
술보다도 병의 가치를 더 높이 판단했다는 뜻이다.
“어쩌시겠습니까? 만들어주시겠습니까?”
“물론이네. 아암, 당연하고 말고. 하지만 이곳에선 곤란하네.”
“라수스 협곡까지 가야 한다면 그렇게 하죠.”
“그렇긴 한데…….”
케린도 빌모아는 잠시 고심했다. 드워프 마을의 위치가 드러나는 것이 저어된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정했다.
“그러세. 같이 가지.”
현수와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으면 50톤에 가까운 금덩이를 드워프들이 직접 운반해야 한다. 그리고 준다는 맥주 1,000병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정적으로 현수가 금덩이 50톤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뭘 믿고 그 많은 걸 주겠는가!
금덩이 50톤이면 국가를 만들고도 남을 엄청난 양이다.
하여 내일 새벽에 동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정말 가실 거예요?”
엘리시아가 눈물 글썽한 눈으로 애원하듯 바라본다.
“네. 이제 곧 출발할 예정입니다.”
여전히 C급 용병 차림인 현수는 안장의 끈을 조이고 있다.
그 곁에는 나후엘 자작의 천금 같은 딸인 엘리시아가 있고, 아델 또한 있다.
이밖에 나후엘 자작과 라임하르트 남작 또한 있다.
“안 가면 안 돼요? 라수스 협곡에 발을 들여놓았던 사람치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없단 말이에요.”
실제이기에 엘리시아의 눈엔 걱정의 빛이 그득했다.
“맞습니다.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던 100이면 100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재고해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라임하르트 역시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다.
현수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 실력으로 어찌 흉폭하기로 이름난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과 그놈의 자식들인 드래고니안들을 당해낸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애꿎은 목숨이 끊길까 싶어 만류하는 것이다.
“그래도 갈 겁니다. 협곡 건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거든요.”
현수는 여전히 엘리시아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어제 저녁, 엘리시아는 늘 따라다니는 아델까지 떼어놓고 현수에게로 왔다. 저녁 식사 후에는 이상하게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후엘 자작이 현수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반경 300m 이내에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제 저녁 일시적으로 내성이 텅텅 비었었다. 나후엘 자작 본인마저 성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엘리시아는 스스로 옷을 벗었다. 이미 못 볼 꼴을 다 보인 상황이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쓴 육탄돌격이다.
하지만 현수는 엘리시아의 겉옷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자리를 떴다. 발목 잡으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엘리시아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현수는 이를 보지 못하였다. 그때는 이미 내성 밖에 있었던 때문이다.
“엘리시아 아가씨! 사내란 한번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한, 한번 칼을 뽑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베어야 거둡니다.”
이 대목에서 나후엘 자작과 라임하르트 남작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가 말을 잇는다.
“저를 생각하여 만류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제가 사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독백하듯 허공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한 이슬을 머금은 엘리시아의 눈을 바라보면 혹여 마음이 약해질까 싶어서이다.
“흐흑! 그래요, 가세요. 하인스님은 남자니까요.”
“……!”
“하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오셔요.”
“기회가 닿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10장 출발! 라수스 협곡 안으로
현수는 이곳에 돌아올 마음이 없다. 아니, 있기는 하다.
케린도 빌모아와 그 일족에게 맡길 히데요시의 금덩이가 금괴로 탈바꿈하게 되면 찾으러 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시아를 만날 생각은 없다.
그렇기에 두루뭉술한 대답을 한 것이다.
“자작님! 남작님! 저 이만 가겠습니다. 나날이 발전하는 율리안 영지가 되기를 기원 드립니다.”
“조심해서 가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