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
“여차하면 몸을 빼십시오. 인간이 드래곤과 대적하여 이긴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도망쳐도 명예에 흠 가는 것 아니니 생명 보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십시오.”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명심하죠. 그럼 이만……!”
드디어 율리안 영지를 떠나는 순간이다.
라수스 협곡만 지나면 평탄한 평야지대가 이어진다고 한다. 그곳을 거치면 아드리안 공국까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상되는 기간은 대충 3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잡고 있다.
현수가 아르센 대륙에 첫발을 디딘 것은 지난 1월이다. 그리고 오늘은 6월 20일이다. 스승인 멀린은 아드리안 공국이 최소한 1년은 버틸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바뀌었다.
미판테 왕국, 쿠르스 왕국, 그리고 엘라이 왕국이 아드리안 공국에서 발견된 미스릴 광산에 대한 야욕을 버린 것은 아니다.
여전히 국경을 봉쇄한 채 기회만 노리고 있다.
이들이 직접적인 행동을 할 수 없도록 한 결정적 이유가 바로 현수 본인이다.
현수가 처음 아르센 대륙에 왔을 때 방문한 곳은 알베제 마을이다.
이곳에서 만난 케이상단의 알론은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들이 총출동하였다는 소문을 대륙에 퍼뜨렸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이 있듯 오지 중의 오지라 할 수 있는 이곳 율리안 영지까지 소문이 전해진 상황이다.
멀린은 공식적으로 9써클 마스터에 이르렀던 마법사이다. 그의 휘하에서 수련한 마법사들의 수준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는 말이 있다. ‘호랑이 같은 아버지에게 개 같은 아들은 없다’는 좋은 의미의 부전자전을 말한다.
대륙의 마탑주 중 최강자는 라이셔 제국의 혈운의 마탑주이다.
7써클 유저가 최고인 셈이다.
그런데 얼마나 강한 마법사들이 출동했는지를 알 수 없다.
인간으로서 9써클은 요원한 일이므로 8써클을 최고라 가정하면 혈운의 마탑도 하루 만에 무너질 수 있다.
무시무시한 헬 파이어, 또는 기가스 라이트닝 스톰 같은 마법 한 방이면 일개 군단쯤은 단숨에 찜 쪄 먹는다.
7써클이라 하더라도 마스터에 이르면 당해낼 자가 없다.
이런 마법사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자중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아드리안 공국의 위기는 이실리프 마법사들이 완전히 등장하고 난 뒤에야 진행될 것이다.
마법사들이 강하다면 3국은 물러날 것이다. 아니면 멸망의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약하다면 당연히 아드리안 공국을 집어삼킬 것이고 마법사들을 죽일 것이다.
어쨌거나 멀린으로 부탁받은 1년이 채워지려면 아직 6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 그리고 라수스 협곡을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3개월 정도 될 것이다.
그렇기에 현수는 조급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현수는 모두의 시선을 뒤로하고 라수스 협곡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렇게 얼마를 가고 나니 숲속에서 작은 인영이 튀어나온다.
현수는 훌쩍 뛰어내렸다. 케린도 빌모아는 다리가 짧아 말을 탈 수 없다. 그리고 보폭도 작다. 그래서 내린 것이다.
말의 엉덩이를 툭툭 치니 알아서 돌아간다.
“영감님! 여기서 일족 분들이 기거하는 곳까지 거리가 멉니까?”
“멀지! 경계선까지 가야 하니 말이네.”
“경계선이라니요?”
“라수스 협곡엔 위대하신 분이 계시네. 그분과 가족 분들이 머무는 곳엔 인간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네.”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현수의 말에 케린도 빌모아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사방을 살핀다.
“그렇게 말하지 말게. 우리가 발을 들여놓은 숲엔 사방에 눈과 귀가 있네.”
“네에, 그러지요.”
사소한 일로 말하기 싫었기에 얼른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곳 아르센 대륙 사람들에게 있어 드래곤은 중간계의 조율자, 위대한 존재,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생명체로 인식되어 있다.
심지어 멀린이 기록한 이실리프 마법서에도 드래곤과 감히 대적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현수에게 있어 드래곤은 지능이 있고, 마법을 쓸 줄 아는 파충류일 뿐이다. 그림으로 본 드래곤은 조금 큰, 아니, 많이 큰 도마뱀의 일종이다.
이곳 사람들은 드래곤이 마나만 있으면 안 먹어도 사는 줄 안다. 그런데 그럴 리가 있겠는가!
중고등학교 시절 배운 과학적 지식만으로도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알을 깨고 나온 녀석의 몸체가 처음부터 150m가 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엔 작았으나 점점 자라나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필요한 영양분이 있어야 한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 그것이다. 그런데 어찌 아무것도 안 먹는데 덩치가 커지겠는가!
게다가 드래곤들은 제법 긴 수면기를 갖는다고 한다.
현수는 드래곤이 무언가를 왕창 먹었을 경우 이를 소화시키기 위한 기간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파충류의 대사 특성은 주변 온도가 낮아지면 대사 능력이 억제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파충류는 24℃ 이하로 체온이 떨어지면 움직임이 억제된다. 하여 낮아진 체온이 높아질 때까지 최소한의 활동만을 한다.
이곳의 드래곤들이 무엇을 먹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먹이를 먹은 뒤 낮아진 체온 때문에, 그리고 먹은 것을 소화시키기 위해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소화를 통해 영양분을 흡수한 뒤 뱀이 탈피하듯 껍질을 벗으면서 더 큰 덩치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파충류에 대해 어찌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렇기에 현수는 드래곤을 지칭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는 것이다.
다리가 짧은 케린도 빌모아의 뒤를 따라 한나절을 이동했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되어 그런지 좁은 오솔길은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다.
케린도 빌모아 역시 오랜만인지 자주 길을 잃고 헤맸다.
자꾸 지체되어 짜증날 법도 하지만 현수는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그리고 마법을 써서 길을 찾지도 않았다. 이실리프 마법서에서 드래곤은 마나의 유동에 매우 민감하다는 글귀를 본 때문이다.
그들에게 별 관심도 없지만 그들로부터의 관심 역시 사절이다. 알아서 크게 좋을 일 없다 판단한 것이다.
결국 케린도 빌모아는 기억을 더듬으며 전진했다.
“빌어먹을 겨우 20년인데 길이 없어져?”
자연의 복원력을 우습게 아는 모양인지라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무려 20년이나 지났음에도 길이 있기를 바라기에 웃은 것이다.
더듬거리는 빌모아의 뒤를 따라 드워프 마을로 접어든 것은 해가 떨어지고 난 뒤였다. 점점 어두워지는 숲을 헤치며 전진하던 케린도 빌모아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밤이 되면 온갖 몬스터들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멈춰라! 누구냐?”
“아! 다행이다.”
“누구냐고 했다.”
마을에 당도한 것은 완전한 어둠이 내린 뒤였다. 그렇기에 케린도 빌모아와 현수를 볼 수 없기에 물은 것이다.
“나야, 나! 케린도 빌모아. 유수페 빌모아의 형제!”
“케린도? 나이즐님의 아들?”
“그래, 그 빌모아 맞아.”
화악―!
갑자기 불길이 일어난다. 그 빛 너머로 여섯이나 되는 작은 인영들이 보인다. 케린도의 얼굴을 살피는 듯하다.
“흠, 일단 우리 일족인 것은 맞군. 진짜 케린도야?”
“그래, 유수페와 닮지 않았나?”
“맞군, 닮은 건 인정! 근데 뒤에 있는 장대 같은 녀석은 뭐지? 일족의 계율을 어기고 감히 인간을 데리고 온 거야?”
냉랭한 음성이다. 보아하니 케린도는 일족의 환영을 못 받는 존재인 듯하다.
“거래할 게 있어서 데리고 왔어. 안으로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뵙게 해줘.”
“너는 되지만 인간은 안 돼! 설마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아주 중요한 거래야.”
“그래도 안 돼. 일단 너만 따라와.”
“크으, 알았어. 이보게, 여기서 조금 기다려 주게.”
“뭐, 그러시죠.”
어둠 따윈 뚫고 볼 능력을 지닌 현수이기에 느긋하다. 몬스터들이 떼로 덤벼들어도 모두 물리칠 능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케린도 빌모아와 일족은 교묘하게 만든 입구를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나와서 확인하지 않았다면 밤새 헤맬 뻔했다.
현수는 근처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주변을 살폈다. 방금 전의 소란 때문인지 풀벌레들도 조용하다.
“흐음, 조용해서 좋기는 하네.”
바람에 나뭇잎 비벼지는 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고즈넉함이 마음에 든다. 지구에서 언제 이런 분위기를 즐길 수 있겠는가!
현수는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를 즐겼다. 그러는 동안 빌모아 일가들은 케린도를 쥐 잡듯 잡고 있었다.
20년 전 마을에서 쫓겨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명을 어긴 것과 인간을 데리고 온 것에 대한 처벌이다.
케린도는 할아버지인 족장 앞에 무릎 꿇은 해 장로와 어른들의 질책을 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길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무소식이자 현수는 아공간에 담긴 캔맥주를 꺼냈다. 안주로 비엔나소시지와 땅콩을 꺼냈다.
그리곤 천천히 마셨다.
약 2시간이 흘렀을 무렵이다.
삐이꺽―!
워낙 조용했던 터라 아주 작은 소음임에도 소리가 들린다.
“하인스라 했나? 안으로 들어와라.”
“알겠소.”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빈 캔 세 개와 약간의 쓰레기들을 주섬주섬 주웠다.
“그건 뭔가?”
동굴 비슷한 안으로부터 흘러나온 빛에도 캔의 반짝임을 본 모양이다.
“아! 이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냥 쓰레기입니다.”
현수는 아무 생각 없는 듯 캔을 내밀었다. 드워프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었다.
“쓰레기? 헐……! 뭐가 이렇게 가벼워? 응? 이건 뭐에 쓰는 거지?”
색깔만 보고 납인 줄 알았던 드워프는 그 가벼움에 놀란다. 그리곤 얼른 불빛에 비춰보곤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건 쓰레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겉면은 말할 수 없이 반들반들하다. 게다가 어떤 방법으로 새겼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예쁜 도안이 그려져 있다.
손으로 더듬어 보았으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얇게 파고 색소를 채워 넣은 듯하다.
뒤집으려는 순간 액체 몇 방울이 손끝을 적신다.
“이건……? 헐! 술이잖아? 흐음, 이건 대체 무슨 술이지?”
드워프들은 맥주를 즐겨 마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맥주가 한국에서 파는 맥주인 것은 아니다.
알콜의 도수는 더 낮고, 텁텁한 맛이 난다.
한국에서는 맥주를 만들 때 두 번의 발효 과정을 거친다.
1차 발효는 냉각된 맥아즙에 맥주 효모를 첨가하여 발효탱크에 넣는 것으로 시작된다. 효모가 선장, 번식하면서 발효성 당을 섭취하는 대신 알콜과 이상화탄소를 배출하는 과정이다.
2차 발효는 발효용기라 불리는 저장 탱크로 옮겨서 숙성시키는 과정이다. 에일은 2주, 라거는 낮은 온도에서 30일 이상 숙성시킨다.
아무튼 이곳의 맥주는 지구의 그것과는 다르다.
첫째, 보리가 아닌 비슷한 곡물이 원료이다.
둘째, 2차 발효 과정이 없다.
셋째, 발효 용기가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반복 사용을 한다.
넷째, 여과와 가열처리 과정이 없다.
이런 차이가 있어 지구의 맥주와 다른 것이다.
드워프는 몇 방울 남은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는 맛을 음미해 보았다. 하지만 너무 양이 적었던 모양이다. 다시 캔을 살펴본다.
“헉! 이건……?”
불빛에 비춰본 빈 캔의 안쪽엔 뭔가가 있다. 안으로 밀려들어 간 뚜껑이다. 이때 캔의 두께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드워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캔과 현수를 번갈아 바라본다.
“안으로 안 들어갑니까?”
“아, 참! 험험, 들어가세. 참, 이건 내가 가져도 되나?”
드워프는 빈 캔을 들어 보인다.
“뭐, 그러시든지요. 이것도 드릴까요?”
손에 있던 나머지 둘을 보여주자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고, 고맙네.”
간단히 쓰레기를 처리한 현수는 슬쩍 웃음 지었다. 의도된 대로 되어가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 케린도 빌모아가 본인의 호언장담과 달리 일족으로부터 배척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칫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기에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 일부러 캔맥주를 꺼낸 것이다.
입구로부터 마을까지는 제법 멀었다. 가는 동안 살펴보니 광산의 갱도를 개조하여 만든 듯하다.
이리저리 구불거리는 동안 많은 통로들이 보인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