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
당연하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찌르면 나는 조금 아픈데?”
“아파?”
이번엔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응! 찌를 때마다 많이 아파. 네가 찔렀던 데에 ‘호’ 해줄래?”
“호……?”
“응! 네가 입김을 불어넣으면 조금 덜 아플 것 같아.”
“아라쩌. 내가 호 해줄게.”
꼬맹이가 들고 있던 막대를 내려놓고 다가오려던 순간이다.
“멈춰라!”
“……!”
갑자기 나타난 사내의 얼음장 같은 음성에 세바스찬이 굳어버린다. 시선을 돌려 누군가를 확인하곤 얼른 고개를 숙인다.
그리곤 걸음아 날 살려라라는 표정으로 줄행랑친다.
“하인스 킴이라고 했나?”
“누구십니까?”
상대가 누군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풍기는 기도로 미루어 짐작컨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검사이자 드래고니안이다.
그럼에도 짐짓 모르는 척했다.
“내가 누구냐고? 보아하니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버르장머리 없군. 인간 귀족이라 이건가?”
“그쪽도 나보다 훨씬 늙어 보이지는 않는군요. 근데 초면에 말이 좀 짧으시네요.”
일부러 도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뜸 하대하니 기분이 상한 것이다.
“무어라?”
역시 성질 급한 레드 드래곤의 후손답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검사임에도 금방 얼굴이 붉어진다. 열 받았다는 뜻이다.
하나 곧 신색을 되찾는다.
“네놈이 이곳에 침투한 목적은 뭐지?”
“침투라니요? 저는 그냥 협곡 건너편에 있는 미판테 왕국으로 가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인간은 출입금지 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모르나?”
“인간, 있던데요? 당장 이 마을에도 몇몇은 인간 아닙니까?”
“그, 그런…….”
말문이 막힌 드래고니안이 잠시 째려본다. 감히 말문을 막히게 하느냐는 표정이다.
“저 진짜 그냥 건너편으로 가려고만 온 겁니다. 안 그러면 수천㎞를 돌아가야 하니까요.”
“저쪽으로 가선 무엇을 하려고?”
“아드리안 공국으로 가는 것이 최종목적입니다.”
“아드리안 공국……!”
어디쯤 처박혀 있는 땅인지 가늠하는 표정이다.
“저어,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아무래도 딴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긴 인간 혼자서 올 수는 없는 곳이잖습니까.”
나마젤이라 불리던 쿼터의 말에 드래고니안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일단은 조사를 해봐야겠다. 데렌!”
“네, 할아버지.”
드래고니안의 호출에 즉각 허리를 꺽은 것은 40살쯤 되어 보인다.
‘헐! 이제 겨우 스물다섯쯤으로 보이는데 마흔 살 된 손자가 있어? 그럼 몇 살이지?’
현수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이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각각 스물에 애를 낳았다 치면 최하 80은 되었다는 뜻인데 그 나이에 겨우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야?’
지구와 달리 이곳은 여가를 즐길 만한 특별한 것이 없다.
인터넷은 당연히 없고, 컴퓨터 게임도 없다. 만화책도 없으며, 소설책이랄 것도 없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 만한 것이라곤 막대기와 자갈 정도뿐이다.
어른이 되면 칼이나 도끼, 또는 창이 놀이기구가 되며, 생계도구가 된다. 80이면 열다섯에 처음 검을 잡았다 하더라도 65년이나 검법을 수련했을 나이이다.
그러기엔 수준이 낮기에 사내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이를 다른 뜻으로 오인한 드래고니안이 거만한 표정을 짓는다.
“왜 말끝이 짧은지 이제 알았지?”
“……!”
현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이놈을 성으로 데리고 와라.”
“네, 할아버지.”
데렌이란 이름을 가진 쿼터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드래고니안이 현수를 한 번 째려보고는 총총 걸음으로 사라진다.
“끄으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드래곤을 피해보려던 애초의 계획이 무산된 때문이다.
잠시 후, 현수는 쿼터들에 의해 포획된 짐승처럼 기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성이란 곳으로 가고 있었다.
“아버지, 어르신들이 이놈을 죽일까요?”
“아마도……. 위대하신 존재께서 인간을 극도로 혐오하시니까.”
“어르신들을 잉태하여 낳아주신 분들도 모두 인간이잖아요.”
데렌은 아들의 물음에 답할 말이 궁색한지 잠시 말이 없었다.
“……!”
“엄마도 인간이잖아요. 할머니도 그렇구요.”
“그, 그야 네 엄마와 할머니, 증조할머니와 고조할머니는 모두 아름다운 여자잖아. 안 그래?”
“아하! 인간 여자는 되고 남자는 안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뭔가 깨우쳤다는 듯 눈빛을 반짝인다.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현수는 슬슬 기분이 나빠진다.
파충류 주제에 인간 여성을 납치하여 강제로 잉태하게 만든 놈이 라이세뮤리안이다.
그리고 놈이 낳은 드래고니안들도 여자를 납치하여 새끼를 낳는 생산공장으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녀석이 또 다른 여자를 납치해서 자식을 낳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그놈의 자식 역시 여자를 강제로 끌고 와 겁탈했다. 맨 정신에 인간이 아닌 종자들과 결합하려는 여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을 혐오한다니 부화가 치민 것이다.
“아버지, 그럼 이놈은 곧 죽겠네요.”
아들이라는 놈이 현수를 발로 툭툭 차며 한 말이다.
“아마도……! 칼을 차고 있으니 어르신들의 한때 유흥이 되겠지.”
“에이, 어떻게 어르신들의 상대가 되었어요? 아직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그래, 내 생각에도 그렇다.”
“근데 아버지, 하나 이상한 게 있어요.”
“뭐지?”
“이놈 머리카락 색깔이요, 이렇게 까만 인간도 있나요?”
“헐! 그러고 보니……. 혹시 마족과 관련된 놈일지도 모르겠구나.”
“마족이요?”
아들은 흠칫 놀라며 얼른 떨어진다.
성까지 가는 동안 현수는 제법 많은 정보를 획득했다.
“놈을 풀어줘라.”
“네, 어르신!”
“너희는 이만 돌아가도록!”
“네, 어르신!”
밧줄에서 풀린 현수는 눈앞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고 둘은 소드 마스터이다.
손목을 묶었던 밧줄 자국을 문지르고 있을 때 이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잠입한 목적은?”
“라수스 협곡 너머 미판테 왕국으로 가기 위함입니다.”
“네 말이 정녕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현수는 놈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검을 쓸 줄 아는가?”
“약간은…….”
“뽑아라! 네가 검으로 나를 이기면 네 말이 맞다 쳐 주마.”
“제가 이기면 라수스 협곡을 지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어림도 없는 수작!”
말도 안 된다는 듯 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럼 뽑지 않겠습니다. 보아하니 소드 마스터이신 듯한데 검을 뽑아 재롱을 부려봐야 아무 소득도 없잖습니까?”
“소득! 지금 감히 내게서 소득을 얻으려 하나?”
“검을 뽑는다 함은 목숨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목숨을 걸 이유가 없잖습니까?”
“레뮈를 이긴다면 그렇게 해주지.”
지금껏 말없이 바라만 보던 적발의 드래고니안이 한 말이다.
“형님……!”
레뮈라 불린 드래고니안이 무슨 말이냐며 눈을 크게 뜬다. 이에 형이라 불린 사내가 피식 웃음 짓는다.
“레뮈, 저 녀석에게 져?”
“무슨 말씀을……. 저따위 인간에게 어찌……!”
“심심하지 않냐? 형제들과의 대련은 이제 신물이 나지? 저놈, 최상급에는 이른 놈 같다.”
“……!”
레뮈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웃음 짓는다.
“정말 제가 이기면 여길 지나칠 수 있게 해주실 거죠?”
“그래. 레뮈를 이기면…….”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스르르르릉―!
현수가 애검을 뽑아 들었다. 레뮈는 피식 웃고는 허리춤의 검을 뽑는다.
“잠깐……! 형제들을 불러야지. 이 좋은 광경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대련장으로 이동해.”
“크흐흐, 그럼요. 부르십시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요리해서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드려야죠.”
레뮈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현수는 기분이 나빴지만 소드 마스터를 상대할 계획 수립이 먼저이기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잠시 후, 현수는 로마의 콜로세움 비슷한 곳으로 이동했다. 거기엔 많은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드래고니안과 그들의 배우자이다.
“레뮈! 귀찮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
“솜씨를 발휘해 보라고.”
“레뮈! 망신당하지 않게 조심해.”
모두들 한마디씩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상념에 잠겨 있다. 검법으로는 레뮈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마법을 써야 하는데 무엇을 쓸 것인지 생각한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스르르릉―!
레뮈의 검이 뽑힌다. 한눈에 보기에도 명검이다. 현수는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지이이잉―!
검에 마나가 주입되자 검기가 뻗어나온다. 처음부터 강수를 두지 않으면 수세에 몰리다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검기가 제법 정순하군.”
주아아아앙―!
레뮈의 검끝에서 현수와 비슷한 수준의 검기가 뿜어진다. 굳이 검강을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야아아압!”
쐐에에에엑―!
파공음을 내며 현수의 검이 쏘아져 오자 레뮈가 비웃음을 머금은 채 마주쳤다.
깡―!
검과 검이 순간적으로 격돌했다.
‘세군……!’
현수의 느낌이다. 닿는 순간 밀린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다음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레뮈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파고드는 중이기 때문이다.
슈아아앙―!
까, 깡!
아주 짧은 순간 연속으로 검이 부딪친다. 그때마다 현수는 움찔해야 했다. 확실히 상대가 강한 때문이다.
깡! 까깡! 까까깡! 깡! 깡깡!
대략 5분 정도 현수는 상대에 의해 조롱을 당했다.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순간이었음에도 검을 회수하곤 했던 때문이다.
그때마다 움찔거렸다.
블링크 같은 마법을 쓰려던 순간에 멈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살면서 이런 기분은 느껴보긴 처음인지라 슬슬 얼굴이 붉어진다. 하긴 놀림 당하고 있는데 기분 좋을 사람 누가 있겠는가!
깡, 깡! 깡깡!
검과 검을 맞대고 힘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상황이 도출되었다.
온 힘을 쏟아 검을 밀어내고 있는데 상대는 여유가 있다는 듯 웃음까지 짓는다.
“크흐흐! 애송이, 재미 좋았어? 지금까진 장난이고 이제부터 진짜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야.”
말을 마친 레뮈가 검을 뺀다. 현수는 얼른 자세를 바로 잡았다.
‘검법으론 감당이 안 돼! 그럼 할 수 없지.’
“챠압, 내 검을 받아랏!”
쐐에에에엑―!
지금까지 장난이었다는 레뮈의 말은 사실이었다. 검의 속도가 조금 전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검강을 뿜어내지 않고 있지만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레뮈의 검이 목젖을 노리고 파고드는 절체절명의 순간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블링크!”
“뭐야? 마검사였어? 크크, 이게 재미있게 되었구만.”
레뮈는 신난다는 표정이다. 관중석의 드래고니안들도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마검사가 몹시 드문 세상이기 때문이다.
“야! 레뮈, 그놈 내게 양보해라.”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슈!”
레뮈는 혀로 입술에 침을 바르며 웃음 짓는다. 형제들과의 대련은 이제 거의 정형이 되었다. 상대의 습성을 완벽히 파악했기에 어떨지 뻔하기에 대련도 시들해진 지 오래이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유형의 상대가 나타났다. 검사에게 있어 이는 즐거움이다. 그렇기에 형의 말을 씹은 것이다.
한편, 순간적으로 20여m를 이동한 현수는 숨을 고르며 다음 수를 계산했다. 이때 레뮈가 득달처럼 달려든다.
“크하하! 마검사니까 검강을 써도 되겠지?”
지이이이잉―!
검끝에서 뿜어진 희뿌연 빛의 줄기가 눈부시다. 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무엇이든 파괴하는 궁극의 무기이다.
쒜에에에에엑―!
더욱 강력한 파공음을 내며 쇄도하는 검에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상대가 마검사이니 마음 놓고 공격하겠다는 의도이다.
“그리스! 블링크!”
쭈우욱―!
갑작스레 바닥이 미끄러짐에도 레뮈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또한 눈앞에서 사라진 현수가 있을 법한 좌측 뒤로 섬전처럼 쏘아져 온다.
“아앗! 블링크!”
또 한 번 현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하지만 재차 마법을 구현시켜야 했다. 위치를 파악한 레뮈의 검이 쏘아져 왔기 때문이다.
몇 번의 블링크로 위기를 넘긴 현수는 나름대로 상황에 적응했다.
‘좋아! 한번 해보자 이거지.’
『전능의 팔찌』 제1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