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
또한 9써클 마스터가 심혈을 기울여 새겨 넣은 마법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차례차례 드래고니안이 패했다.
소드 마스터 열넷을 물리친 이후 현수의 검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밋밋하던 검식에 변초가 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상대의 검법에서 착안된 것이다. 그러자 막아내는 것이 한결 쉬워졌다.
현수는 꼼수가 아닌 통쾌한 승리 쪽을 유도해 냈다. 상대의 반감을 덜어내기 위함이다.
드래고니안들은 현수가 본시 소드 마스터임에도 일부러 검강이 아닌 검기만 쓰는 것으로 오인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스물일곱 번째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깔끔한 승리를 쟁취하고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다음 상대자가 대련장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갑자기 현수의 시선이 몽롱해진다. 그리곤 대규모 마나 유동 현상이 발생되기 시작하였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현수를 중심으로 마나가 회오리처럼 휘감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긴장된 시선으로 검을 뽑던 스물여덟 번째 소드 마스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곤 말없이 기다렸다.
처음 세 번을 제외하곤 드래고니안은 승부가 끝날 때마다 패자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였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소드 마스터들을 제압하니 승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물일곱 번째 패배자 역시 그들의 위로를 받으며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던 중이다. 그러다 모두들 입을 다물자 뒤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이곳 라수스 협곡에서 가끔 일어나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수가 각성하여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오르는 중이었던 것이다.
관중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한참을 기다려 줬다.
대련장의 시계는 잠시 멈춘 듯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현수의 신체 곳곳이 제멋대로 들썩인다. 또 한 번의 바디 체인지가 일어나는 중인 것이다.
이미 한 번의 바디 체인지를 하였는지라 냄새나는 노폐물이 밖으로 배어나와 악취를 풍기는 일은 없었다.
이전의 바디 체인지가 마법을 위한 최적화된 몸 구성이었다면 이번은 검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몸으로 바뀌는 중이다.
그렇게 대략 네 시간쯤 시간이 흘렀다. 먼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현수의 눈이 떠진다.
많은 드래고니안이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물여덟 번째 소드 마스터도 저만치 떨어진 채 보고 있다.
뽑았던 검을 겁집에 도로 집어넣은 채이다.
현수는 어찌된 영문인지를 깨닫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높은 경지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짝, 짝, 짝, 짝, 짝!
“축하한다, 애송아.”
“축하해.”
“축하받을 만하지. 아암, 그렇고말고. 더욱 정진해라.”
인간 알기를 뭣같이 아는 드래고니안이지만 같은 검사이기에 진심 어린 축하의 박수를 쳐준다.
“소드 마스터가 된 걸 축하한다. 하지만 우리의 대결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거 잘 알지?”
“기다려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수는 스물여덟 번째 소드 마스터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시작할까?”
“좋습니다.”
말을 마친 현수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지이이잉―!
현수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와 더불어 검강이 뻗어난다. 이제 갓 소드 마스터가 되었는지라 균일하거나 길지는 않다.
하지만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무기가 생긴 것인지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소드 익스퍼트일 때에도 형제들을 이겼는데 이제 소드 마스터가 되었으니 내가 먼저 공격하지.”
“네에.”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격이 시작되었다.
“야아아압!”
스팟―!
공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엄청난 빠르기로 쇄도한다.
현수가 일반 검사였다면 언제 다가왔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목이 베어졌을 것이다.
이제 막 검강을 얻은 현수는 그 위력이 궁금했다. 하여 그야말로 섬전처럼 다가오는 검을 막아갔다.
깡! 깡, 까깡! 까까까깡!
조금 밀리기는 하지만 파괴되거나 잘리지는 않는다. 같은 검강이라 그런 듯하다.
그러고 보니 조지 루카스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스타워즈’에서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가 변절한 제다이의 기사 다스 베이더와 싸우는 장면에서 사용했던 광선검과 비슷해 보인다.
드래고니안의 검은 진하지는 않지만 붉은 빛을 낸다. 레드 드래곤의 후손이라 그런 듯하다. 현수의 것은 서늘한 푸른빛이다.
두 개의 검이 교차하고 만날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난다.
깡, 까깡! 깡, 까까깡! 깡깡! 깡! 깡!
대련장은 두 검이 격돌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관중석의 관중들은 시선을 모은 채 둘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물여덟 번째 대결자는 드래고니안의 맏형이다.
다시 말해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이 인간 여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첫 번째 아들이다.
다른 드래고니안과 달리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는 동안 가장 먼저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올랐다.
그 뒤로 아우들을 이끌어준 검법의 스승이기도 하다.
현수는 바디 리프레쉬 마법으로 지친 몸에 활력을 부어가며 대결에 임했다. 하여 체력엔 문제가 없지만 소드 마스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것은 마법으로 메웠다.
블링크와 그리스 등 아주 초보적인 마법이지만 위기 극복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문제는 마법을 남발해야 할 정도로 상대가 노련하다는 것이다. 그 탓에 체내 마나량이 현저히 줄어든 상태이다.
마냥 수비나 하거나 피할 수밖에 없기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정말 쉽지 않다. 허점이 거의 노출되지 않았던 것이다. 설사 허점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금방 사라진다.
같은 소드 마스터이지만 현수가 완전 초보라면 상대는 능숙하다 못해 완숙에 접어든 상태이다.
현수는 모르지만 아르센 대륙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못한 그랜드 마스터를 넘볼 수준인 것이다.
치열한 접전은 거의 30분이나 진행되었다. 드래곤의 자식이라 그런지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질려 버린 현수는 슬쩍 전능의 팔찌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은 더 타임 딜레이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만일을 위해 최대한 아끼고 있지만 아직도 상대는 둘이나 남아 있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인 나머지 여섯은 마법 없이도 이길 수 있기에 치지 않은 것이다.
‘으으음, 지독한 상대를 만났어. 할 수 없군. 나머지 둘은 내 마법으로 상대할 수밖에.’
현수는 이번 상대와의 접전을 승리한다면 그 즉시 마나 포션을 복용할 생각을 했다.
“타임 딜레이!”
마법이 구현되자 현수의 움직임이 갑자기 섬전처럼 빨라진다.
둘의 대결을 주시하던 모든 드래고니안은 현수의 움직임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대체 어떤 기술인지 알고자 함이다.
마법을 익힌 드래고니안들은 헤이스트 마법을 중첩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지 않고야 사람의 움직임이 섬전처럼 빠를 수 없기 때문이다.
검법만을 익힌 드래고니안들은 뭔가 색다른 기술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것을 배울 목적으로 집중한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가 갑자기 빨라지자 스물여덟 번째 드래고니안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수는 자신의 목젖을 찌를 듯 파고드는 검을 불과 몇 ㎝ 간격을 둔 채 이동하며 검을 뻗어낸다.
현수의 검끝이 노린 곳은 드래고니안의 블레이드의 최하단부, 다시 말해 가드(Guard) 바로 위이다.
칼의 날 밑은 날 부분 중 가장 두툼한 부위이다. 그렇기에 웬만한 타격으론 파괴하기 어렵다.
하여 현수는 검의 끝부분에서 솟아난 검강으로 그곳을 강하게 찔렀다. 일종의 끊어 치기를 시도한 것이다.
권투에서 끊어 치기는 다음과 같은 계산으로 충격량을 계산한다.
현수가 검으로 강력하게 찌르는 순간 상대는 너무 놀란 상황이다.
하여 순간적으로 마나의 흐름이 교란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오러나 검강으로 검을 완전히 지배한 상태가 아니다.
채앵―! 퍼걱―!
“……!”
날카로운 금속음에 이어 상대의 검이 산산조각 난다.
현수는 즉시 뒤로 물러났다. 혹시라도 상대가 무검 내지는 심검을 운용할 실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자네가 이겼군.”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여러 번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스물여덟 번째 대결자는 현수와 대결을 하는 동안 자신의 검결을 가다듬었다. 검법과 마법을 병용하는 아주 변칙적인 상대를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결자는 현수의 목숨을 취하거나 승리만을 노리지 않았다.
평생 검을 수련하였기에 모처럼 만난 흥겨운 상대와의 대결 자체를 즐긴 것이다.
“좋은 대결이었네.”
“감사합니다.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현수는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스물아홉 번째 상대가 내려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
“검법으로는 더 이상의 대결은 없다.”
누군가의 음성이다. 현수가 누가 말한 것인지를 찾으려 시선을 돌리려는데 말이 이어진다.
“너는 우리 중 가장 강한 검을 꺾었으니 이제부턴 마법사들이 내려갈 것이다.”
어쩐지 되게 힘든 상대였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40대로 보이는 사내가 내려선다. 확인해 보니 7써클 마법사이다.
“나는 레온이라 한다.”
“네, 하인스입니다.”
똑같이 마나의 길을 걷기에 정중히 예를 갖췄다.
“먼저 소드 마스터가 되었음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대결에 앞서 하나 묻자.”
“말씀하십시오.”
“검사들을 상대할 때 갑자기 빨라지곤 했다. 마법인가?”
“맞습니다.”
현수는 굳이 속이거나 감출 필요가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스트 중첩인가?”
역시 마법사이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빛을 빛낸다.
“그건 아닙니다. 헤이스트로는 그만한 속력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럼 어떤 마법인가?”
현수는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타임 딜레이입니다.”
“뭐? 타임 딜레이?”
대결 중에 타임 딜레이 마법을 썼다는 말에 놀란 듯하다.
타임 딜레이 마법이 걸렸을 때 마법사 본인도 범위 안에 있다면 똑같이 시간의 흐름이 늦어진다. 따라서 입을 열어 다른 마법을 구현시키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여 놀란 것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마법을 걸어놓고 검법을 시전했기 때문이다.
타임 딜레이는 5써클 마법이다.
딜레이 비율은 보통 1 대 2부터 시작된다. 지속 시간은 써클 수와 마나량에 정비례한다.
워낙 마나 소모량이 많은지라 1분을 넘기기 힘들다.
하지만 6써클이 되면 딜레이 시간이 더 길어진다. 마스터가 되면 1 대 10도 가능하다. 대략 5분 정도 유지된다.
7써클 마스터는 1 대 30으로 시간을 지체시킬 수 있다. 대부분 10분이 한계이다.
8써클 마스터는 1 대 60까지 가능하다. 20분 정도 가능하다.
9써클 마스터는 1 대 120이다. 40분까지 가능하다.
2장 목욕하는 여인
마법사 드래고니안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딜레이 비율을 물어봐도 되겠나?”
이 대목에서 현수는 잠시 생각을 했다. 써클별 타임 딜레이 마법이 어떤지 알기 때문이다.
“1 대 60입니다.”
“뭐, 뭐라고? 유, 유, 육십? 정말인가?”
“제가 속여서 뭐하겠습니까?”
“하긴 그 정도였으니 그렇게 보였지.”
마법사는 현수의 움직임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주어 고맙네. 이번 대결은 내가 진 걸로 하세.”